메뉴 건너뛰기

close

【오마이뉴스의 모토는 '모든 시민은 기자다'입니다. 시민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사는 이야기'도 뉴스로 싣고 있습니다. 당신의 살아가는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이재관이 다짜고짜 공방에서 화목난로를 만들고 있다.
▲ 다짜고짜 공방 이재관이 다짜고짜 공방에서 화목난로를 만들고 있다.
ⓒ 안건모

관련사진보기


'전라도 촌놈', 노동자로 서다

"뭣이든 재골시롭게 다 잘해. 못허는 것이 웂재."

20년 넘게 대기업 노동자로 살다가 시골로 들어온 지 15년. 동네사람들은 이재관이 무엇이든 척척 해결하는 만능으로 안다. 무엇이건 탈나면 우선 이재관부터 찾는다.

이재관은 전남 보성에서 태어났다. 어렸을 적 보고 들은 기억을 더듬어보면 할머니는 동학교도였고 아버지는 해방을 전후해 '산사람'(빨치산)으로 살았다고 들었다. 손재주가 탁월하고 어머니와 싸우는 걸 본 적이 없을 정도로 온화한 분이었다. 아버지는 1994년 돌아가시고 어머니는 얼마 전 2016년 1월에 돌아가셨다. 4남 3녀였는데 장남은 행방을 알 수 없고 둘째형은 50대에 세상을 뜨고 누나 둘과 여동생, 남동생이 있다.

이재관은 초등학교를 나온 뒤 고등공민학교를 다니면서 중학교학력인정검정고시에 합격했다. 집안이 가난해 고등학교엔 진학할 수 없었다. 이재관은 돈을 벌겠다고 1978년 무렵 서울로 올라갔다. 구장위동과 녹번동 작은 공장에서 일하다가 을지로 방산시장에 있는 비닐가공 공장을 다녔다. 거기서 2년 동안 일했는데 금방 기술을 배워 기사 대우를 받았다. 하지만 회사가 부도가 났다.

이재관은 시험을 치르고 정수 직업훈련원에 들어갔다. 그곳은 군대나 마찬가지였다. 두 달 동안을 제식훈련만 했다. 교대로 보초를 서야 했고 추운 겨울날 연병장에서 팔굽혀 펴기 얼차려는 예사였다. 이유 없이 '줄빠따' 200여 대를 맞기도 했다. 교육을 받다가 도망가는 훈련생도 많았다. 휴가를 나와 집에 갔을 때 허벅지에 든 멍을 보고 어머니가 울었다. 가지 말라고 애원했다. 이재관은 여태껏 배웠던 시간이 너무 아까워 가겠다고 했다.

정수 직업훈련원에서 선반을 배운 이재관은 1년 만에 일반기능사 2급 자격증과 정밀기능사 2급 자격증을 한꺼번에 땄다. 기능올림픽에 출전해 보라는 제의를 뒤로 하고 1981년 8월 선박엔진을 만드는 울산 현대엔진에서 일하기 시작했다. 주야 맞교대에 토, 일 철야, 월 400시간을 넘기기 일쑤였다. 한겨울 야근 때는 휴게실조차 없어서 야식을 먹고 보루(걸레)나 박스를 깔고 잠깐 동안 눈을 붙여야 했다. 이재관은 힘든 일을 하면서도 방송통신고등학교 과정을 공부했고 병역특례를 신청했다. 나머지 시간엔 또 틈틈이 기타 학원을 다녔다.

같은 아파트에 함께 사는 형들이 "우리 연극하는데 같이 할래?"라고 해서 극단 '태화' 단원이 됐다. 두 달쯤 된 어느 날 연출자가 이재관을 불렀다. 오태석 작 <점을 칩니다> 연극에 의사 역할을 맡았던 연기자가 목소리가 어울리지 않는다고 이재관 보고 해보라고 했다. 처음 무대에 올랐다. 관객들 반응이 좋았다. 연극에도 재주가 있었는지 그 뒤 이재관은 조연출로, 무대감독으로 활동했다. <관객모독> <장사의 꿈>을 거쳐 틈틈이 통기타의 밤 공연을 했고, 다리오 포 작 <돈 내지 맙시다>에서 주인공을 맡았다. 이재관은 특례를 마치면 회사를 그만두고 아예 연극의 길로 나서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인생은 뜻대로 되지 않는다. 세상은 민주화의 열망이 분출하고 있었다. 전두환 독재정권에 맞서 1987년 6월항쟁이 터졌다. 노태우가 거짓 항복하면서 항쟁은 수그러들었지만 1987년 1년 동안 노동쟁의 3749건이 발생했다. 현대엔진, 현대중공업도 예외가 아니었다.

그 당시 현대공장 현장 분위기는 군대식이었다. 머리는 스포츠형으로 강제했고 바지주머니도 없었다(바지주머니에 손을 넣고 다니면 건방져 보인다는 게 주머니를 꿰맨 이유였다). 주면 주는 대로, 시키면 시키는 대로 해야 했던 노예 같은 삶. 현대엔진 노동자들은 1987년 7월 5일에 노동조합을 결성했다. 그러나 2년 뒤 현대엔진노조는 강성노조로 찍혀 중공업 엔진사업부로 합병을 당했다.

'사람답게 살고 싶다'는 노동자들의 열망은 2, 3월 옥상점거농성, 오좌불숙소 파업, 128일 파업, 골리앗 투쟁으로 이어졌고 경찰은 '아침이슬'이라는 작전명을 걸고 파업을 진압하기 위해 2만여 명 되는 대병력으로 육·해·공 진압작전을 폈다.

1988년 2, 3월 옥상 점거 농성 때 이재관은 파업 기획실장을 맡게 됐다. 이재관은 파업 프로그램을 짜는 일을 했다. 기타를 배워 놨던 게 큰 도움이 됐다. 연극 무대도 연출했다. 치약으로 휜 머리를 만들고 종이를 태운 재로 수염을 그려 배우를 분장시켰다. <우리가 왜 파업에 들어갈 수밖에 없는가>. 노동자와 자본가가 싸우는 과정이었다. 연극배우로 뽑힌 노동자들은 연기자가 아니라 모두 노동자 실제 인물이었다. 연극하면서 부둥켜 울기도 했고 구경하는 사람들도 웃고 울었다. 지도부의 상황 판단 미숙으로 2, 3월 옥상점거농성도 실패로 돌아갔다.

노조 활동과 골리앗 투쟁

1991년 5월 15일. 이재관이(가운데 안경 쓴 이) 감옥에서 출소하고 있다. 아내 김귀숙이 환하게 웃는다.
▲ 출소하는 이재관 1991년 5월 15일. 이재관이(가운데 안경 쓴 이) 감옥에서 출소하고 있다. 아내 김귀숙이 환하게 웃는다.
ⓒ 이재관 제공

관련사진보기


이재관이 현대엔진노조 활동을 하던 시절. 현대중공업노조 일을 도왔다는 구실을 들어 제3자 개입으로 구속하려던 경찰은 증거불충분으로 그를 놓아줄 수밖에 없었다. 모두 예닐곱 번을 잡혀갔는데 그때마다 빠져 나왔다.

골리앗투쟁은 13일만에 끝났다. 골리앗투쟁 때 이재관은 야전지도부 선전편집을 맡았다. 인쇄를 해주겠다는 업자가 없어서 철필로 긁고 등사기로 밀어 투쟁 속보를 만들어 뿌렸다. 박철모가 파업 현장을 취재해왔고 이재관은 친구 자취방에 숨어서 투쟁 속보를 펴냈다. 밤에 몰래 소식지를 나를 때는 환한 달빛이 원망스러웠다.

이재관이 수배받던 시절 형사들은 가끔 고향집에 쫓아와 이재관 부모님에게 캐물었다. 이재관이 학출 아니냐, 위장취업한 거 아니냐, 어떻게 학교를 안 다닌 놈이 선전물을 그렇게 잘 쓸 수 있느냐고 물었다. 현대 정주영이 "무지랭이 노동자들이 하룻밤에 선전물 수만 장을 절대 낼 수가 없다, 분명코 외부세력이 개입했다"라고 하던 주장과 똑같았다. 이재관 아버지는 아무리 형사들이 윽박질러도 의연했다.

"우리 아들은 배우지 않았어도 옳게 살고 있을 거다. 내 자식은 입바른 소리하고 옳은 일, 해야 할 일은 하고 마는 놈이다."

검거 광풍이 휘몰아쳤다. 이재관은 안기부 프락치 밀고로 잡혀 감옥으로 들어갔다. 그때 큰딸 솔이 돌 지날 무렵이었다. 2년 6월형을 받은 이재관은 감옥에서도 싸웠다. 재소자들의 인권을 위해 단식투쟁을 네 번 했다. 아버지는 이재관이 구속돼 있을 때 방에 불도 안 때고 냉골에 주무셨다. 자식놈이 옳은 일하다 감옥에 가 있는데 어떻게 따뜻한 방에서 잘 수 있겠냐 하는 마음이었다. 그 당시 감옥 생활을 쓴 글이 1997년 전태일문학상 최우수상을 받고 단행본으로 출간된다. <왈왈이들의 합창>(보리출판사)이다.

항소를 거쳐 1년 복역 뒤 출소해 해고자 신분이던 이재관은 복직 싸움을 거쳐 회사로 돌아갔고 현장과 노조 상근을 번갈아 했다. 1994년 파업을 끝으로 현대중공업 노조는 파업 한 번 해보지 못한 종이호랑이가 됐다. 현장 분위기는 완전히 달라져 있었다.

어용노조가 생기니 조퇴가 없어지고 월차를 반으로 쪼갠 반월차가 생기기도 했다. 근무시간이 오전 8시부터였는데 슬금슬금 경쟁하듯 앞당겨져 오전 7시 30분부터 체조를 강요했다. 이재관은 이를 거부했다. 회사는 이재관에게 잔업을 시키지 않고 딱 8시간만 일을 시켜 임금으로 압박했다. 야근을 명령하고 오전 5시에 퇴근시킬 때도 많았다. 그러거나 말거나 이재관은 수그러들 사람이 아니었다.

2001년 어느 날 이재관이 기계 위에서 떨어지면서 머리를 쇠에 부딪혀 목을 다쳤다. 이재관이 다치는 걸 본 동료가 있었는데 처음엔 봤다고 하더니 회사에서 입막음을 해 목격자는 증언해주지 않았다. 이재관은 그때 일어난 사고를 그림으로 그렸다. 자신이 기계 위에서 떨어지는 현장 상황을 아주 자세히 그림으로 그려서 근로복지공단에 냈다. 결국 산재 인정을 받았다. 그런 예가 없었다.

이재관은 1년 넘게 입원 치료를 반복하다가 결국 파열되고 튀어나온 목 디스크 수술을 받았다. 한동안 꼼짝하지 못했다. 지금도 목뼈에 티타늄 나사 네 개가 박혀 있다. 이재관은 결국 산재 보상금을 받고 사표를 썼다.

귀농-시골살이 시작

2015년 12월 서귀포에 적정기술 교육을 하러 간 김에 아내 김귀숙과 김영갑 갤러리에서 한 장 찍었다.
▲ 이재관과 부인 김귀숙 2015년 12월 서귀포에 적정기술 교육을 하러 간 김에 아내 김귀숙과 김영갑 갤러리에서 한 장 찍었다.
ⓒ 안건모

관련사진보기


수술 당시 아내와 아이들은 전라북도 부안에서 빈집과 논밭을 빌려 시골살이를 시작했다. 부안에서는 핵폐기장 유치 반대 싸움이 벌어지고 있었다. 부안 인구 5~6만 가운데 날마다 2~3만 명이 모여 집회를 하고 있었다. 1987년 6월항쟁 같은 일이 또 벌어지고 있었다. 경찰은 도망가는 시위대들에게도 방패로 무차별 찍고 밟아 버렸다.

이재관은 아픈 몸으로 집회를 다녔다. 영화 간판 하던 분들이 현수막에 들어갈 글을 쓰는데 너무 느려 갑갑했다. 이재관이 다시 나섰다. 5분에 하나씩 휘갈겨 쓴 현수막이 400장을 넘었다. 공동 작업으로 아파트 걸개그림을 그리고, 부안 읍내 전체 면에 벽 200여 군데를 모두 노란색으로 칠한 뒤 반핵 구호와 그림을 쓰고 그렸다. 반핵투쟁위원회 일, 만화 대자보와 만화 현수막, <부안독립신문> 만평, 등교 거부와 민들레학교 운영…. 4년 동안 살면서 그는 핵폐기장 건설 반대 싸움에 함께했다.

마을에서는 이장을 맡겼다. 그곳에서 평생 살 터를 구하던 이재관은 부안에서 터를 잡지 못하고 2006년에 곡성군 겸면에 정착했다. 거의 1년 동안 전남 곡성 골짝골짝을 돌아 찾은 곳이다. 아내와 황토 벽돌 2000장을 찍어 집을 지었다.

어떻게 소문이 났는지 귀농하고 싶으니 터 좀 구해 달라는 사람들이 찾아왔다. 이재관은 전혀 모르는 사람이 와도 한 달 가까이 집에서 재워 주고 터를 찾아 줬다. 누가 찾아오면 하던 일을 멈추고 터를 소개하러 나서기를 수십 차례. 이재관이 이 마을로 온 뒤로 인구가 늘었다. 처음 이곳에 왔을 때는 열너댓 가구에 60 이상 나이 든 분들만 스물이 넘지 않았다. 지금은 스물 세 가구에 마흔네 명으로 늘었다.

하지만 사람에게 입은 상처도 많다. 기껏 땅을 소개해줬는데 등을 돌리거나 동네 사람들하고는 교류도 없고, 나중에 돈을 더 붙여 땅과 집을 팔고 나가는 사람도 있었다. 한동안 사람이 싫었다. 다행히 자립 생태를 이해하는 친구들이 귀농운동본부 교육을 받고 찾아왔다. 그 친구들과 힘을 합쳐 '항꾸네협동조합'을 만들었다.

이재관은 이 마을로 이사 온 뒤로 농약과 제초제, 화학비료, 비닐, 기계를 쓰지 않는 농사를 짓는다. 단 유기농 인증을 받지 않았다. 누가 누구를 인증하고 평가를 한다는 건가 하는 반발심이었다. 손수 정직하게 지은 농산물은 직거래를 하고 있다. 네이버 블로그와 카페 '이야기가 있는 산골'(회원 7800여 명)을 운영한다.

싸움이 따라다닌다

아직 자연이 살아있는 이 겸면에도 두어 번 위기가 있었다. 업자가 땅을 사들여서 오리농장을 들이려고 했다. 인근 여섯 개 마을 환경이 망가질 건 뻔하다. 저녁 늦게 이장 두 사람이 찾아왔다. "자네가 쌈 좀 해봤다면서? 대책위원장을 좀 해줬으면 좋겠는디." 이재관은 이장 여섯 분에게 공동대책위원장을 맡아주십사 하고 곁에서 돕겠다고 했다.

먼저 현수막을 주문해 동네에, 차에 걸었다. 집회 신고도 했다. 오리농장 사무장이 환경영향평가 보고회를 하러 마을에 왔다. 아랫마을 이장이 사회를 보다가 그 사람에게 마이크를 넘기려고 했다. 이재관이 마이크를 빼앗았다.

"당신들, 환경영향평가를 받았다고 서류를 받아서 요식 행위로 이런 보고대회까지 마쳤다고 하려는 것 아닌가. 개인의 돈벌이를 위해 대대손손 살아온 마을사람들 터전을 망가트리는 건 도둑놈 심보 아니냐. 만약 여기서 설명을 하고 마을사람들 반대 의견이 많으면 오리농장을 않겠다고 약속할 수 있다면 마이크를 주마. 그 약속 하지 못할 거면 여기 올 필요 없다. 여러분! 제 말이 틀렸습니까?"

"옳소!"

이재관은 그 사람을 옆에 세워 놓고 1시간 동안 '선동'했다. 결국 그 사람은 마이크도 못 잡아 보고 갔다. 정보과 형사가 이재관에게 "자주 봅시다" 하고 인사를 건넸다. 그는 "당신을 내가 볼 일이 없다"라고 잘라버렸다.

그 뒤로 그곳에다 채석장 허가를 낸다는 정보가 들어왔다. 또 회관으로 모였다. 이재관은 이장 세 분에게 기존 채석장이 들어온 담양, 장성 같은 마을을 견학하고 오시라고 부탁했다. 그리고 집회 신고를 하고 현수막, 버스, 농악대 등을 준비했다. 다음날 보고대회를 열고 채석장을 다녀온 이장 세 분에게 소감을 들었다.

"그것이 들어오면 마을이 다 죽게 생겼더라. 빨래도 못 널고 도랑물이 뜨물처럼 흘러. 대형덤프차가 하루 종일 차가 다니는디, 주민들 만나서 물어봤더니 도저히 살 수가 없다드라."

동네분들이 "만약 허가를 해주면 그냥 둘 수 없다, 군청으로 쳐들어가서 끝까지 싸운다"라면서 목소리를 높였다. 그 업자는 다음날 신청 서류를 취소하고 사라져 버렸다.

그런 일들이 있고 나서 동네 어른들 칭찬이 자자했다. 동네분들이 이재관에게 이장을 맡아 달라고 강권했다. 몇 번을 사양하다가 2013년부터 이장을 맡아서 3년 동안 일했다.

그림·글쓰기를 따로 배운 적이 없다

이재관이 곡성 겸면 마을 담벼락에 그린 그림
▲ 곡성 겸면 마을 담벼락 이재관이 곡성 겸면 마을 담벼락에 그린 그림
ⓒ 안건모

관련사진보기


이재관은 그림 정규수업을 받은 적이 없다. 현대중공업에서 그림을 그릴 때였다. 그려둔 만평에 잉크가 번져 당시 <한겨레> 만평을 그리고 있던 박재동한테 전화를 해 어떻게 하면 되느냐고 물었다. 박재동은 친절하게도 이재관한테 제도용 잉크와 종이를 따로 구해 쓰라고 알려줬다.

그때부터 이재관 그림이 살아나기 시작했다. 엔진노조 결성 당시 이재관은 선전홍보차장을 맡았고 그 뒤 홍보부장을 거쳐, 현대중공업 노조 교육선전실장, 편집실장을 거치며 선전편입 일에만 매달렸다. 당시 노조소식지에 실린 이재관의 만평은 촌철살인이었다. 그때 그렸던 만평을 모아 첫 만평집 <골리앗공화국>을 펴냈다. 발문을 박재동이 썼다. 나중에는 한겨레문화센터에서 박재동에 이어 노동자만화그리기 강의를 하기도 했다. 그 뒤 만평집 <맞고 내줄겨 그냥 내줄겨> <우짤낀데>를 펴냈다.

노동자 글쓰기를 하던 이재관은 감옥에 있을 때 이오덕의 책을 보고 충격을 받았다. 우리글바로쓰기 1, 2, 3권을 다 읽고 우리말법을 배웠다. 그 덕분에 민방위교육장에 가서 강사로 강의도 했다. '이장이 들려주는 시골살이' 또는 '우리말 바로 쓰기'.

그의 아내 이야기

울산 회사 다닐 때 자취방 친구가 소개해 한 여자를 만났다. 처음엔 시큰둥했다. 연극할 때나 가끔 만났다. 1988년 2, 3월 농성하고 경찰서에 잡혀 들어가 있을 때였다. 경찰서에 있다가 석방될 때는 신병을 인도받을 사람이 필요했다. 동료들은 거의 잡혀가서 데리러 올 사람이 없었다. 그때 전화번호가 하나 생각났다. 2-9867! 그 여자 집이었다. 와서 좀 데리고 나가 달라고 부탁했다.

그 뒤 아내와 혼인신고만 하고 살다가 큰딸 솔이가 태어나고 1989년 12월 16일 결혼식을 올렸다. 아내 집안은 보수 성향의 집안이었는데, 아내는 노조활동을 하는 이재관 때문에 집회 참석하고 해고구속자 가족 모임을 꾸리면서 자연스럽게 시국에 눈을 떴다.

후회는 없다

이재관이 살고 있는 곡성군 겸면 집. 왼쪽 입구엔 마을 카페가 들어선다.
▲ 집 이재관이 살고 있는 곡성군 겸면 집. 왼쪽 입구엔 마을 카페가 들어선다.
ⓒ 안건모

관련사진보기


이재관은 살아온 지난날을 돌아보며 후회가 없다. 고등학교 졸업장조차도 없지만 무슨 일이건 얼마든지 따라잡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감옥에서 나와 회사에 복귀한 뒤 회사가 현장으로 보내지 않고 품질 경영(QM) 추진자로 일하게 했을 때도 다른 추진자들에 견주어 가장 성과를 많이 낸 사람이 이재관이다. 상금도 받고 싱가포르, 대만 견학도 다녀올 수 있었다.

그동안 이재관은 정신없이 살았다. 제철농사를 지으면서 협동조합꾸리기, 귀농인의집 운영, 17개 마을 벽화그리기, 안행부 마을기업 선정, 2015년 '창조적마을만들기' 사업에도 공모해 선정됐다. 올해는 협동조합 적정기술 공방 앞에 숙소동 30평도 지어야 한다. 숙소는 젊은 청년들이 묵으면서 살아가는 기술(농사, 집짓기, 적정기술 등)을 배울 곳이다.

요즘은 그동안 배운 적정기술을 교육한다. 교육인원은 년 200여명. 효율 좋은 화덕과 화목난로를 보급하고, 힘들이지 않고 쓸 수 있는 무동력 스프링도끼도 만들고 있다. 동화책에 그림을 그렸고 적정기술을 알리는 <불과 화덕과 난로 이야기>를 펴냈다.

아이들도 학교에 매이지 않고 홈스쿨러로 산다. 큰딸 솔이만 대안학교인 영산 성지고등학교를 거쳐 특별전형으로 성공회대학교를 다녔다. 둘째 한결이는 초등학교 졸, 막내 찬이는 초3 중퇴다. 학교를 다니지 않는 일은 아이들 의견을 듣고 가족회의를 거쳐 결정했다.

"단순히 학교를 그만두는 게 아니라 너희가 할 수 있는 걸 해라. 학교에서 가르쳐 주지 않는 기술은 아빠 일 도우며 배우면 된다. 학교에 갇혀서 무의미한 시간 보내는 것보다 농사일도 도우며 배우고 여행도 다니고 그러면서 몸도 마음도 자라는 거라고 생각한다."

아이들은 훌륭하게 자랐다. 같이 홈스쿨링하는 아이들을 만나 프로그램을 짜서 자전거 여행도 다녀오고, 세상 구경도 하며 지낸다. 봉사활동 등으로 인도와 캄보디아도 다녀왔다. 막내 찬이는 4년 동안 집에서 토종닭 50~60마리를 혼자 키우다가 지금은 실상사 작은학교에 다닌다.

"대학원을 나와도 정작 자기가 살 길을 찾을 수 없는 구조다. 알아주는 대학을 가려고 경쟁하는 건 곧 안정된 직장을 가기 위한 것인데 결국 잘 먹고 잘 살자고 그러는 거 아닌가. 시골에서도 잘 살기 위한 길이 있는데 왜 멀리 돌아가는가."

이재관 자신이 못하는 게 없으니까 이렇게 큰소리치는 걸까? 이재관 사는 걸 보면 다른 이들도 그렇게 살아보고 싶기는 할 듯하다.

아참, 그런 이재관이 힘들어하는 게 있다. 컴퓨터나 전자 기계에 약하다. 독수리 타법에다가 논리정연하지도 못하고 계산에도 약하다. 스마트폰에 까는 어플리케이션 같은 것도 어려워한다. 역시 사람은  아무리 재주가 많아도 뭔가 한두 가지는 부족한 게 있다. 사실 지금 항꾸네협동조합과 마을 만들기 사업, 또 적정기술 보급도 둘레 마음이 맞는 이들이 아니면 할 수 있을까? 그래서 이재관은 함께하는 이들에게 늘 고마워한다. 아, 가장 고마운 이는 자신을 끝까지 믿어주고 이끌어 준 아내 김귀숙이다.

집에서 기타를 치고 있는 이재관.
▲ 기타 치는 이재관 집에서 기타를 치고 있는 이재관.
ⓒ 안건모

관련사진보기


덧붙이는 글 | 월간 작은책 2016년 2월호에 실린 글입니다.



태그:#작은책, #안건모, #생활글, #골리앗, #이재관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오마이뉴스 기획편집부 기자입니다. 조용한 걸 좋아해요.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