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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새 일본 연수 마지막 날. 새벽에 눈 뜨자마자 내가 향한 곳은 숙소로부터 전철로 한 정거장 떨어져 있는 이쿠타 신사였다. 비록 연수지만 그래도 일본에 왔으니 신사 한 군데 정도는 들려야 한다는 생각이었다. 어쨌든 신사가 오랫동안 일본인들의 생활 깊숙이 관여하고 있는 만큼 그들을 이해하는 첫걸음일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었다.

15분 정도 걸어 도착한 모토마치 역. 역사 안에는 승무원이 보이지 않았지만, 자동판매기에서 전철표를 사고 전철을 탄 뒤 한 정거장 가는 일은 어렵지 않았다. 한자만 대충 알아도 충분했다. 이것이 바로 한자문화권이란 문명의 힘이겠지. 일본인들이나 중국인들도 한국에 오면 같은 마음일 것이다.

익숙한 풍경
▲ 일본의 출근길 익숙한 풍경
ⓒ 이희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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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의 전철 안 출근길 풍경은 우리와 별반 다르지 않았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스마트폰을 보고 있었고 단지 몇 명만이 책을 들고 있었다. 굳이 다른 점을 찾는다면 졸고 있는 사람이 우리보다 적다는 것이었는데, 그만큼 우리보다 밤 문화가 발전하지 않은 탓일 수도 있고, 혹은 우리보다 야근이 적기 때문인 듯도 했다. 어쨌든 한국처럼 밤늦게까지 다이나믹한 생활을 할 수 있는 곳이 또 있던가.

다음 역인 산노미아역에서 내려 이쿠타 신사까지 가는 길. 그것은 마치 이른 아침 서울 종로를 걷는 느낌이었다. 그 전날 밤 광란이 휩쓸고 간 뒤 권태로움만 남아있는, 번화한듯하지만 빛이 바래 약간의 애잔함이 묻어있는 거리. 그만큼 이 지역이 아주 오랜 기간 동안 번화가였다는 뜻일까? 이쿠타 신사는 우리네의 종묘와 비슷한 느낌이려나?

우리의 종묘와 달리 거리와 붙어있다
▲ 고베시 이쿠타 신사 우리의 종묘와 달리 거리와 붙어있다
ⓒ 이희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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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의 전형적인 신사 모습
▲ 신사 전경 일본의 전형적인 신사 모습
ⓒ 이희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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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웬걸. 번화가 바로 옆에 자리한 이쿠타 신사는 종묘와 전혀 다른 느낌이었다. 종묘보다 화려한 모습이었으며 좀 더 세속적인 느낌이었다. 종묘는 그 정문을 지나고 나면 이곳이 과연 종로 한가운데 위치한 곳인가 자문할 만큼 조용하고 엄숙하고 정적인 데 반해, 이쿠타 신사는 여전히 도심 한복판에 있는 것 같았고 생동감이 있었다. 뭐랄까. 종묘가 죽은 자를 위한 공간이라면, 신사는 살아있는 이를 위한 공간이라고 할까?

실제로 적지 않은 사람들이 출근길에 신사에 잠깐 들러 참배를 드리고 있었다. 기계적으로 돈을 던지고 종을 치고 손뼉을 치고 합장을 하는 그들의 모습은 어떤 종교의식이라기보다는 아무 생각 없는 일상적인 관습에 가까워 보였다. 지진과 태풍, 화산 등 자연재해가 잦은 이 땅에서 오늘 하루도 무사히 살아남길 바라는 이들의 풍습이 현재에까지 내려오기 때문이겠지.

그들의 일상
▲ 일본인의 신사참배 그들의 일상
ⓒ 이희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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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소한 바램들을 기록해 놓은 공간
▲ 신사의 풍경 소소한 바램들을 기록해 놓은 공간
ⓒ 이희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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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제는 이런 일본인들의 신사참배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에게 별로 유쾌해 보이지 않는다는 점인데 그것은 결국 이를 정치적으로 악용하는 이들 때문이다. 일제가 식민지 조선에서 신사참배를 강요하는 순간 그것은 풍습이 아니라 만행이 되었고, 일본 정부가 야스쿠니 신사에 굳이 일본군국주의의 전범들을 합사시키는 순간 그것은 단순히 일상적인 관습이 아니라 일본의 과거사 인정문제가 되지 않았던가. 일본이 주변국들과 진정한 평화를 만들어가기 위해서는 이와 같은 사실을 분명 인지하고 인정해야 할 것이다.

기타노 공방 거리

신사를 다녀온 뒤 이번 연수의 마지막 목적지인 기타노 공방 거리로 향했다. 그곳은 고베 대지진 이후 폐교된 100여 년 역사의 기타노 초등학교를 재활용한 공간으로서 고베의 유명한 관광지 중의 하나였는데, 고베시 북쪽 고베항이 보이는 낮은 구릉의 기타노이진칸 거리 안에 위치해 있었다.

한때 초등학교의 운동장이었을 주차장에 내려 기타노 공방 거리로 들어갔다. 비록 명칭은 '거리'였지만 초등학교 건물에 만들어진 공방들을 모두 일컬어 '공방 거리'라 부르고 것으로, 정확하게는 초등학교 건물 하나가 기타노 공방 거리였다.

폐교의 변신
▲ 기타노 공방 거리 폐교의 변신
ⓒ 홍찬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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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곳은 3일 전 들렀던 교토 아트센터와 마찬가지로 오래된 초등학교의 낯익은 건축 양식을 하고 있었지만 그 내부는 전혀 다른 모습이었다. 비록 한구석에는 과학실을 남겨놓아 이곳이 과거에 학교였음을 증명하고 있었지만, 층마다 성냥 공방, 디저트 공방, 의류 공방 등 가지각색의 20개가 넘는 공방들이 자리 잡고 있어 사람들의 이목을 끌고 있었다.

도대체 폐교에 이런 공방들이 어떻게 들어온 것일까? 이에 대해 관계자의 대답은 매우 간결했다. 대지진 이후 폐교된 이 건물 역시 활용방안에 대해 지역주민들과 행정이 함께 고민을 했는데, 그 결과 이곳을 체험형 공방으로 한다는 방침을 정했다는 것이다.

임대료는 매우 저렴하게 해서 지역의 중소상인들이나 청년들이 접근하기 쉽게 만들었으며, 체험을 필수로 하여 기타노 공방 거리를 특화시켰다고 했다. 움직임이 느릴 수밖에 없는 대자본 대신 아이디어와 혁신이 무기인 소규모 자본에 맞게 거리를 최적화시킨 것이다.

덕분에 현재 기타노 공방 거리는 하루 평균 2200여 명, 연간 75만 명이 방문하는 고베 최고의 관광자원이 되었다. 기타노이진칸 거리 관광에 앞서 거의 대부분의 관광객들이 이곳을 들러 이 지역 및 건물의 역사를 청취하고, 제품을 구경한다고 했다. 쓰러져 가던 폐교가 또 하나의 신화를 이룬 것이다.

과학관을 그대로 보존하고 있다
▲ 기카노 공방 거리의 교실 과학관을 그대로 보존하고 있다
ⓒ 이희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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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의 이야기를 듣고 있자니 당장 우리의 척박한 현실이 떠올랐다. 소위 젠트리피케이션이라고 하여 홍대에서 쫓겨나는 예술가 및 중소상인들. 과연 우리들은 이들을 어떻게 보호할 수 있을까? 단지 건물주의 합리적인 판단과 자비심에 기대야 할까? 기타노 공방 거리처럼 공공자원을 좀 더 활용하고 주민들의 공공의식을 높여 상생의 길을 여는 방법은 없을까?

나의 눈앞의 이익보다는 내가 살고 있는 지역의 가치를 높이는 것이 더 큰 이익이라는 깨달음. 우리는 언제쯤 이를 실현할 수 있을까? 기타노 공방 거리는 지역의 자원과 주민들을 어떻게 이어야 할지 고민하는 사회적경제와 마을공동체 구성원들에게 더 큰 숙제를 내주고 있었다.

기타노이진칸 거리와 인천

기타노 공방 거리를 나와 남는 시간 우리는 기타노이진칸 거리를 돌아다녔다. 그곳은 그 이름에 걸맞게(이진칸=異人館;외국인의 집) 과거 18세기 개항 이후 꽤 오랫동안 서양인들이 군락을 이루고 살던 곳으로서 아직까지도 서양풍의 건물들이 30개 정도 남아 거리를 전체적으로 이국적으로 만들고 있었다. 어쩐지 거리가 지금까지 보아 온 일본의 여느 거리들과 조금 다르게 느껴지더라니.

그러고 보니 우리뿐만 아니라 많은 일본인들도 기타노이진칸 거리를 관광 중이었다. 그중에는 교복을 입은 중고등학생들도 간혹 보였는데 아마도 고베시로 수학여행을 온 학생들인 듯 했다. 이곳이 수학여행의 코스라면 그만큼 일본인들이 개항을 중요시한다는 뜻이겠지.

수학여행 중인 그들
▲ 일본 고등학생들과 함께 수학여행 중인 그들
ⓒ 이희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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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우리는 왜 이런 공간이 없는 것일까? 비록 일제강점기를 거쳤지만, 우리도 일본과 똑같이 개항을 했었고 한때 많은 서양인들이 군락을 이루어 살지 않았던가. 한국전쟁 등을 거치면서 모든 것이 파괴되었기 때문일까?

아니다. 그건 결국 역사를 바라보는 관점 때문인 듯했다. 일본인들은 자신의 역사를 꼼꼼히 그대로 보존하는데 심혈을 기울이고 있었다. 폐교에도 불구하고 100여년 된 초등학교 건물을 다른 방식으로 이용하는 데서 알 수 있듯이 일본인들은 결코 그들의 역사를 쉬이 여기지 않고, 그것을 바탕으로 공동체를 하나로 모으고 있었다.

그런데 우리는 어떠한가. 공사를 하다가 과거 유물들이 나오면 문화재청에다가 신고하기는커녕 파묻어 버리기 일쑤이며, 어떤 건물이 역사적으로 아무리 가치가 있다 한들 그것이 현재 돈이 되지 않는다고 판단되면 아무 거리낌 없이 파괴해 버린다. 역사가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 그리고 그것이 공동체를 유지하는 데 있어서 얼마나 중요한지 개념 자체가 없는 것이다.

이국적인 풍경
▲ 기타노이진칸 거리 이국적인 풍경
ⓒ 이희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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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컨대 인천을 보자. 사실 인천은 일본의 고베와 별반 다르지 않다. 인천도 고베와 마찬가지로 개항됐던 곳이었으며, 한때 자유공원 일대는 서양인들이 모여 각국의 문화를 뽐내며 살았었던 지역이다.

하지만 인천에는 일본의 기타노이진칸 거리 같은 곳이 없다. 물론 전쟁 등을 겪으며 그만큼 자산들이 사라진 탓도 있겠지만, 인천이란 공간이 지니고 있는 역사가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에 대한 공감대가 형성되어 있지 않기 때문이다.

오직 경제성에만 집중한 결과 인천의 차이나타운은 지금 당장 돈이 되는 아이템만으로 가득하다. 그러니 일본의 기타노이진칸 거리가 가지고 있는 그 특유의 이국적이고 고급적인 느낌 대신 천박하고 속물적인 느낌만이 횡행할 수밖에.

이런 맥락으로 보면 현 정부의 이번 '위안부협상' 역시 결코 우연이 아니다. 그것은 결국 역사를 잊는 것에 대해 별 생각이 없는 우리 사회가 빚은 참상이기 때문이다. 

아울렛 대신 해변으로

기타노 공방 거리를 끝으로 연수단의 일정은 마무리되었다. 이제 다시 집으로 돌아가는 길. 현지 코디네이터는 시간이 남았다며 우리를 간사이공항 옆에 있는 린쿠 프리미엄 아울렛이라는 곳에 내려주었다. 우리의 여주 아울렛과 거의 흡사한 곳이었는데 출국하기 전 마지막으로 여행객들의 주머니를 탈탈 털기 위한 공간이었다. 결국 이 시스템조차 우리가 일본을 따라 하는 것이었던가.

쇼핑에 취미가 없는 탓에, 남는 시간을 주체 못하고 배회하고 있는데 문득 아울렛 밖이 궁금해졌다. 과연 이곳 너머에는 무엇이 있을까? 나는 무엇에 홀린 듯 발걸음을 옮겼고, 커다란 육교를 건너 바닷가를 보는 순간 탄성을 내지를 수밖에 없었다. 이렇게 아름다운 해변이 바로 지척에 있었다니. 지도를 보니 마블 비치라는 곳이었다.

아울렛을 벗어나면 이런 풍경이 펼쳐진다
▲ 간사이 공항 앞 마블 비치 아울렛을 벗어나면 이런 풍경이 펼쳐진다
ⓒ 이희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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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닷가는 모래 대신 흰 자갈로 채워져 있었다. 국내에서는 한 번도 보지 못한 풍경이었다. 몽돌해수욕장은 모두 검은 자갈인줄로만 알았건만 이런 곳도 있구나. 그래 이런 풍광을 많은 사람들이 고작 쇼핑 때문에 보지 못하다니.

드디어 비행기에 올랐다. 결코 짧지 않았던 일본 연수. 이제 그곳에서 배운 바를 내가 사는 곳에 적용시키는 건 나의 몫일 터, 그동안 일본에서 보고 듣고 생각한 것들을 다시 한 번 되새겨 본다.

부디 나의 일본연수기가 사회적경제와 마을공동체 활성화에 작은 디딤돌이 되기를.


태그:#일본, #고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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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와 사회학, 북한학을 전공한 사회학도입니다. 물류와 사회적경제 분야에서 일을 했었고, 2022년 강동구의회 의원이 되었습니다. 일상의 정치, 정치의 일상화를 꿈꾸는 17년차 오마이뉴스 시민기자로서, 더 나은 사회를 위하여 제가 선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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