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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은 세월호 참사 1주기를 맞이하여 우리 사회에서 자신의 자리를 잃어버린 사람들과 함께하고 이들의 목소리를 전하기 위해 시작되었습니다. 지난 1년간 <사람들>은 네 번의 프로젝트를 거치며 해고노동자, 농민, 세월호 유가족, 이주노동자, 성소수자 등 함께 사는 세상을 위해 살아가는 많은 '사람들'을 만났습니다. 이번 <사람들>에서는 사회적 가치와 공익을 위해 조금은 '다른 삶'을 택한 '함께 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전해드립니다. 20대의 청년활동가, 30대의 노동활동가, 40대의 공익의료활동가를 모시고 새로운 삶의 가능성을 밝혀보고자 합니다. - 기자 말

재작년, 에볼라가 전 세계를 덮쳤다. 치사율이 50%에 이른다고 알려진 질병에 사망한 사람의 수만 현재까지 1만여 명을 넘어선다. 뚜렷한 백신이 있지도 않았다. 그야말로 '패닉'에 빠지는 게 당연했다. 한국도 예외는 아니어서, 그해 8월 UN 여성기구 주최 국제대회를 취소하라는 의견이 빗발쳤다. 아프리카 출신의 참가자들이 대회에 참석한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그렇게 모두가 국경을 예민하게 주시할 때, 에볼라 발병 지역으로 훌쩍 넘어간 사람이 있었다. 무슨 자신감이었을까? 피부 조직과 장기를 괴사시키는 이 끔찍한 질병이, 그는 두렵지 않았던 것일까. 행동하는의사회 대표였으며, 국경없는의사회 활동가이자, 현재는 노동당 관악당원협의회에서 활동 중인 범상치 않은 이력의 정상훈씨를 만나보았다.

"사람된 도리를 했다는 보람"

시에라리온에서 구호 활동을 펼치고 있는 정상훈 활동가
 시에라리온에서 구호 활동을 펼치고 있는 정상훈 활동가
ⓒ 국경없는의사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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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상훈 선생님은 한국인 의사로서는 최초로 에볼라 유행 지역에 들어갔던 분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당시 치사율이 90%에 육박한다고 알려졌던 질병을 퇴치하기 위해 시에라리온에 가게 된 경위가 궁금합니다. 한국으로 다시 돌아오지 못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은 없으셨나요?
"먼저 두려움이 없었다고 하면 거짓말입니다. 제 아내에, 아이도 둘이나 있기 때문에 두렵지 않을 수가 없었죠. 2014년 11월 시에라리온의 카일라훈에 처음 들어갔을 무렵, 어린아이에게 무언가 먹여주는 일을 하게 되었어요. 저는 분명히 개인보호장구를 몇 차례에 걸쳐서 입은 상태였거든요. 에이프런을 하고, 고글도 하고, 장갑은 이중으로 꼈고요. 그랬는데도 아이를 안았을 때, 저와 그 아이 사이에 아무것도 없는 듯한 두려움을 느꼈습니다. 아이의 땀이 저한테 그대로 묻을 것만 같은 두려움이요.

그렇다면 도대체 왜 에볼라를 퇴치하러 갈 생각을 하게 되었던가? 저 자신을 강하게 밀어붙이는 충동 때문이었습니다. 에볼라는 재작년부터 창궐하기 시작해서, 2014년 3월 공식화된 질병입니다. 국경없는의사회가 그때 처음으로 개입했기 때문에, 소식을 쭉 듣고 있었죠. 여름이 지나고부터는 우리나라에서도 에볼라 관련 뉴스가 많이 나왔습니다. 처음으로 미국인이 에볼라에 걸리면서, 전 세계적으로 시끄러워졌던 것인데요.

그렇게 아프리카에서 죽어가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나올 무렵부터, 가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우리가 언제나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행동만을 택하지는 않잖아요? 위험할 수 있다는 걸 알았지만, 제가 이왕에 국경없는의사회 활동을 선택했기 때문에, 그 가치 있는 선택에 떳떳해지기 위해서 가기로 했습니다."

- 에볼라뿐만 아니라, 과거에 아르메니아에서 다제내성결핵을 치료했고, 레바논에서는 시리아 난민들을 진료했다고 알고 있습니다. 활동하면서 가장 보람을 느낀 순간은 언제였나요?
"제가 의사가 되려고 마음먹은 것은 굉장히 순진한 생각에서였습니다. 슈바이처 같은 사람이 되고 싶다. 그래서 이 세상에서 가장 바닥에 있는 분들을 제 눈으로 직접 보고, 직접 돕고 싶다는 생각. 그랬기에 제 커다란 보람은, 삶의 밑바닥에 가 있다는 사실 그 자체에서 왔습니다. 저는 오로지 저 자신이나 가족이 잘살기 위해 태어났다고 생각해본 적은 없거든요. 제가 이 세상에 도움이 되어야 하는데, 어떻게 보면 가장 도움이 필요한 분들에게 제가 가있는 것이었기 때문에, 제가 사람 된 도리를 했다는 보람이 가장 컸습니다.

그다음으로는 완쾌된 분들을 볼 때 느끼는 보람이 있었습니다. 다제내성결핵 같은 경우 약값만 해도 일 년에 수백만 원에 이르거든요. 그런데 그 돈이 없어 아르메니아 정부가 치료를 못 해주는 상황이었죠. 아르메니아는 굉장히 가난한 나라거든요. 결핵이 대표적으로 가난한 사람들의 병이라, 환자들 스스로 치료하기도 힘들었고요. 다행히 국경없는의사회가 치료하면서 완쾌된 분들을 많이 봤습니다. 또 시에라리온에서는 3남매가 입원해 있었는데, 그 부모님은 다 돌아가신 상황이었어요. 하지만 우여곡절 끝에 결국 3남매가 다 완쾌되어서, 내가 태어나서 어떤 목숨을 살렸구나 하는 보람을 느꼈습니다."

- 사람들이 으레 떠올리기 마련인 정의로운 활동 이면의, 개인적인 회의나 고통은 없었나요?  
"사실 제가 느낀 보람은 동전의 양면입니다. 제가 어떤 분들을 살렸다고 말했지만, 살리지 못한 분들이 훨씬 많은 것 같습니다. 보통 결핵은 6개월 정도 약을 먹는데, 이 아르메니아 다제내성결핵 같은 경우에는 2년을 먹어야 합니다. 그런데 치료 프로그램을 완전히 마쳐서 완쾌된 분이 50%밖에 되지 않습니다. 나머지 50%는 치료를 했지만 돌아가신 경우도 많았고, 또 치료를 중간에 포기하신 경우도 많았습니다.

약을 안 드시면 죽는다고 설명해도, "나는 치료를 중단하고 돈 벌러 다시 러시아로 가야겠다"고 하는 분들을 보았을 때 제가 의사로서 해드릴 수 있는 일은 더 이상 없었죠. 그런 무력감이 있었고요. 또 시에라리온에서도 의료진 개입 후 치사율이 90%에서 50%로 떨어졌지만, 여전히 많은 분이 제가 머무는 동안에도 시체가 되어 돌아나갔습니다.

에볼라 같은 경우 특히 끔찍했던 사실이 있습니다. 물론 모든 생명이 귀하지만, 의사 입장에서는 한정된 자원이 있을 때 임산부와 어린아이를 먼저 치료해야 합니다. 그런데 이들의 사망률은 끝까지 90% 이상, 거의 100%에 가까웠어요. 임산부와 어린아이들은 면역력이 굉장히 약한 집단이기 때문이었지요. 그들의 죽음을 지켜만 봐야 하는 현실은, 저뿐만 아니라 에볼라 창궐 지역에 들어갔던 국경없는의사회 활동가들 모두가 겪어야 하는 심리적 고통이었습니다."

- 제가 듣기로는, 에볼라와 관련해 국경없는의사회에서 파견한 인원이 지금껏 수백 명에 달하는데요. 한국에서 파견한 인원은 2명뿐이라고 알고 있어서, 국제적인 평균에 비하면 많이 낮은 것이 아닌가 생각했습니다. 이 점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세요? 
"시에라리온에서의 일화가 떠오르는데요. 제가 한국인으로서 최초로 파견되다 보니, 국경없는 의사회 차원의 홍보를 위해 인터뷰를 진행한 바 있습니다. 그랬더니 외국인 활동가들이 '네 인터뷰 완벽했다'며 농담을 던지더라고요. 제가 한국말로 인터뷰했으니 그들은 당연히 알아들을 리가 없었죠.

그런데 저는 조금 부끄럽기도 했습니다. 왜냐하면, 저는 사실 국경없는의사회가 에볼라 대응을 위해 파견한 70여 번째 해외활동가일 뿐이었으니까요. 다만 한국인으로는 최초이다 보니 우리나라에 돌아온 뒤에도 인터뷰를 했던 것이고요. 지적하셨던 것처럼 우리나라 국력에 비하면 파견 인원이 적은 것이 아닌가 합니다. 에볼라로는 한국에서 지금까지 딱 2명만이 활동가로 갔으니까요.

그 이유는 뭘까요? 저는 우리나라의 복지제도와 연관이 있다고 봅니다. 외국인 의료인들의 경우 몇 달 유급휴가나 심지어 1년, 2년 무급휴가를 내는 게 굉장히 쉽습니다. 시에라리온에서 본 네덜란드 분은, 두 달 치 유급 휴가를 내고 오셨더라고요. 그게 부러웠습니다. 그만큼 유럽은 기본적으로 복지 제도가 잘 되어 있어서, 의사들도 그런 제도를 잘 누리는 거죠.

그런데 우리나라는 의사가 아니라 심지어 일반 노동자들도 장기 휴가가 거의 불가능하잖아요. 특히 의사들 같은 전문직에서는 거의 불가능해요. 병원에 근무하는 분들은 말할 나위도 없고, 개원한 분들도 그만큼 병원을 닫으면 망하는 거죠.

그러니까 에볼라 사태에서만 한국 의사들이 적었던 것이 아닙니다. 정확히 말하면, 안타깝게도 국경없는의사회에서 활동하는 한국 의사분들 자체가 아직 많지 않아요. 그러니 시에라리온에 갈 만한 조건이 되는 분들도 적었던 거죠. 우리나라의 근무 조건, 노동 환경은 기본적으로 열악하고, 장시간 노동에 맞춰져 있습니다. 이런 문제가 해결되지 않으면 국경없는의사회 활동을 할 의사는 앞으로도 계속 부족할 것입니다."

"자원활동만으로는 결코 세상이 바뀌지 않는다"

- 그런데도 선생님은 시에라리온으로 향할 수 있었잖아요? 한국에서 어떤 활동을 하는지, 일상은 어떻게 보내는지 궁금합니다.
"저는 어떻게 보면 조금 독특한 길을 걸어왔기 때문에 이런 선택을 할 수 있었습니다. 지금 한국에서 국경없는의사회 활동을 열심히 하시는 분들 역시 저랑 비슷하세요. 정규적인 근무지를 가지고 계시지 않은 것이죠. 쉽게 말하면 알바 의사를 하고 있달까요? 그때그때 필요할 때마다, 저 같은 경우는 대략 일주일에 두세 번 정도 일을 합니다.

의사들은 대개 의사 면허를 딴 뒤에 전공의 과정을 거쳐 전문의가 되는데요. 저는 그 과정을 거치다가 뜻한 바가 있어 그만두고, 행동하는의사회를 만들었습니다. 그때부터는 활동가가 제 직업이 된 것 같아요. 그렇기에 다른 의사들처럼 넉넉한 형편은 아닙니다. 저도 가족이 있기 때문에, 최소한의 단기 대진을 하면서 생활을 하고 있고요. 근무를 안 하는 시간에는 방송통신대학에도 다니고, 도서관에 다니면서 활동가로서 일하기도 합니다. 사실 시간을 자유롭게, 저 스스로 관리하기를 원했고 그런 삶을 살고 있습니다."

- 시간을 좀 거슬러 올라가 볼까요. 선생님이 대학에 들어가 시작한 행동하는 의사회는 80년대의 운동 단체들과는 대비되는, 장애인과 소수자로부터 출발한 단체였다고 알고 있습니다. 대학을 졸업하고 구호단체에서 활동하는 길도 있었을 텐데, 학생 시절부터 그런 운동에 뛰어들게 된 이유는 무엇이었나요?
"두 가지 계기가 있습니다. 첫째는 의약분업 사태가 있었죠. 의사들이 거의 총파업을 한 2000년 초유의 사태였는데요. 그때 저는 기본적으로 의약분업에 찬성하는 입장이었습니다. 의사들은 대다수가 반대했었죠. 제 주위에는 의약분업에 찬성하는 의사들도 있었고 잘 모르겠다는 의사들, 즉 정책적으로 의사들이 완전히 틀리지 않다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그렇지만 당시 의사들 내부의 논의는 굉장히 폭력적이었습니다. 다른 의견을 일절 허용하지 않았었죠. 그래서 심지어는 파업에 참가하지 않은 한 의사 선생님께 다른 의사들이 집단으로 찾아가서 폭언을 퍼붓는 일도 있었고요. 온라인상이든 오프라인상이든, 당시 투쟁본부와 조금이라도 다른 의견을 제시하는 의사들은 집단으로 매장하는 분위기가 있었습니다. 저는 그런 모습이 명백한 집단 이기주의로 보였습니다. 국민과 환자들보다는 의사 직종의 가치를 앞세우는 활동이며, 이것은 젊은 의사들이 해야 할 일이 아니라고 생각했습니다.

두 번째 계기는 나눔운동을 기본으로 하는 단체를 만들게 된 것과 관련이 있는데요. 과거 의사단체들의 활동은 정책 중심이었습니다. 정책을 만들어서 그것을 다른 정당이나 정치단체들이 제안한 방식으로 투쟁을 만드는, 제한적인 활동이었던 것이지요. 제가 보기에 그런 정책 운동은 많은 의사가 참가하기에 한계가 있었거든요. 정책을 짤 능력이 있는 분들만 할 수 있으니까요.

제 주위에 있었던 많은 동료, 후배 의사들은 그보다는 직접 행동을 하고, 주류 의료계와는 다른 목소리와 활동을 만들고 싶어 했습니다. 그래서 대중적으로 할 수 있는 동시에 사회의 어려운 분들과 직접 만나는 활동을 고민하다 보니, 나눔 운동과 자원활동을 기본으로 하게 되었습니다."

정상훈 활동가가 2011년 행동하는 의사회 소속으로 라오스에서 의료봉사를 펼치는 모습
 정상훈 활동가가 2011년 행동하는 의사회 소속으로 라오스에서 의료봉사를 펼치는 모습
ⓒ 행동하는 의사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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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렇다면 선생님이 행동하는의사회 이후, 국경없는의사회에서 활동하게 된 이유는 무엇인가요? 둘 다 자원활동을 배경으로 하는데, 자원활동에 대한 인식 자체에 변화가 생긴건가요?
"네, 조금 변했습니다. 저는 행동하는의사회를 자원활동과 나눔만 하는 단체로 만든 건 아니었습니다. 그걸 기본으로 의사들과 폭넓게 연대하면서도, 주류와는 다른 진보적인 목소리를 낼 수 있겠다는 기대가 있었죠. 그 말은 자원활동 이상의 무언가가 필요하다는 사실을 저 자신도 알고 있었다는 것인데요. 하지만 단순히 알고 있는 것과 제가 보았을 때 느낀 건 굉장히 달랐습니다.

행동하는의사회 대표직을 단체 출범 때부터 맡아오다가 2006년 내려놓게 된 것도, 여러 이유가 있었지만 공허하다는 느낌이 한몫했습니다. 당시에 스스로를 맑스주의자라 여겼음에도 그 이론적 근거가 취약했고, 또 자원활동에 대한 시야 역시 좁았던 것이죠. 그래서 쉬는 기회에 책도 좀 많이 읽고, 영어도 공부하면서 세계적인 안목을 키워야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잘 살펴보니 국경없는의사회가 제가 원하는 경험을 제공해줄 수 있을 것 같아 선택하게 되었고요. 

현재의 결론은, 나눔이나 자원활동만으로는 결코 세상이 바뀌지 않는다는 것이죠. 이미 말씀드렸듯이, 저는 분명히 해외로 가서 많은 사람을 살렸지만 또 많은 사람이 속수무책으로 죽어가는 것을 지켜봐야만 했습니다. 이건 무자비한 수레바퀴거든요. 어떤 한 개인이나 나라, 일부 사람들의 힘만으로는 도저히 멈출 수 없는 수레바퀴를 사람들이 계속 굴리고 있습니다. 그걸 멈추게 할 정치적 힘을 가질 때만 그 수레바퀴를 멈추고, 다른 기획을 할 수 있다는 사실을 뼈저리게 느꼈습니다.

이렇듯 자원활동이나 나눔 운동이 정치 운동과 좀 더 가까워져야 한다고 생각했기에, 작년 5월 노동당에 입당하게 되었고 앞으로 활동을 열심히 해볼 생각입니다. 그러나 꼭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정치라는 게 워낙 빨리 변하기도 하니, 제가 시간을 당 이외의 공간에서 보내야 한다면 다시 주저하지 않고 국경없는의사회 활동을 할 것입니다."

'다른 삶'은 자기반성에서부터

에볼라 구호 첫 한국인으로 jtbc 뉴스룸에 출연한 정상훈씨
 에볼라 구호 첫 한국인으로 jtbc 뉴스룸에 출연한 정상훈씨
ⓒ jtbc 뉴스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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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현재 노동당 관악당원협의회 비상대책위원장으로 활동하고 있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 사람들에게 박수 받는 의료활동가에서, 구태여 '순수성을 의심받는' 정치판으로 뛰어들며 이루고 싶은 목표는 무엇인가요?
"제가 손석희 씨와 JTBC 인터뷰를 하고 나니 영상이 국경없는의사회 페이스북에 올라가고, 댓글도 많이 달렸더라고요. 좋은 일 한다고, 많이 응원해주셨는데 그중 한 댓글이 굉장히 인상 깊었습니다. "너무 좋은 일 하십니다, 그러니 부디 정치는 하지 마세요." 의미심장한 말씀이었죠. 그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노동당에 입당했는데요.

아르메니아에서 노동자들이 치료를 중단한 대표적인 이유는, 말씀드렸듯이 먹고 살 수가 없기 때문이었습니다. 다제내성결핵 환자들은 러시아로 건너가 열악한 환경에서 일하다가, 결핵에 걸려 일을 할 수 없게 되어 돌아온 경우가 많았죠. 그런 처지의 분들이 2년 동안 일하지 않으며 치료를 받을 수는 없습니다. 물론 아르메니아 정부가 돈을 조금 주긴 하지만, 정말 가난하거나 가족이 많다면 그 돈만으로는 도저히 생계가 안 됩니다.

그래서 치료를 받고 조금 좋아지시고 나면, 중단하고 떠나버리시는 환자분들이 있었죠. 악순환의 고리잖아요. 아르메니아가 가난하고, 실업률이 높아 러시아에 경제적으로 종속된 상황이요. 이 구조를 바꾸지 않으면, 아르메니아 노동자들이 본국에서 일할 수 있게 한다든지, 혹은 이주 노동을 하더라도 좋은 조건에서 일할 수 있게 한다든지, 아니면 병에 걸렸더라도 걱정 없이 치료받을 수 있게 만드는 일은 불가능합니다. 세상에 모든 사람이 먹고살기에 충분한 자원이 있는데, 자원은 불평등하게 분배되고 있습니다. 왜 이 구조를 못 바꿀까? 전 거기에 너무 화가 났고, 분노했습니다.

레바논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IS의 출현이라는 분쟁의 뿌리에는, 중동을 나눠 먹으려는 강대국들의 이해관계가 있잖아요. 그건 사실 식민지 시절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것이고요. 이미 국경 자체가 식민지 열강들이 갈라놓은 것이며, 이것이 종교와 연결이 되며 뿌리가 깊어진 것이지요. 그래서 자기 나라에서 쫓겨와 시리아에서 밑바닥 생활을 하시는 것이고요. 굶어서, 먹고 살아야 하니까요.

그러면서 이제는 또 레바논에서 막노동하는 노동자들과 시리아 난민들이 경쟁을 합니다. 이게 굉장한 사회 문제가 된 상황이고요. 문제의 뿌리는 결국 돈이라는 거죠. 권력과 이윤의 문제요. 블러드 다이아몬드부터 시작해서 아프리카를 끊임없이 빈곤, 기아, 질병이 되풀이되는 땅으로 만드는 문제. 이것이 드러난 형태의 하나가 에볼라였을 뿐이고, 이제는 다행히도 에볼라가 소멸할 시기가 다가오고 있지만 이게 끝일 수는 없거든요.

아프리카 사람들의 고난은 다른 형태로 계속 반복될 것이며, 이는 우리가 전 세계적으로 자원을 생산하고 분배하는 구조를 바꾸지 않는 이상 멈추지 않을 것입니다. 그래서 자본주의와 싸워야 한다는 것이, 뜨거운 분노 속에서 자기 동기로 다지게 된 신념이었고요. 한국에서 그런 정당은 노동당밖에 없다고 생각하여 입당하게 되었습니다. 노동당이 자본주의와 타협하지 않고 싸우는 정당으로, 국민에게 제대로 인정받는 좌파 정당이 될 수 있게 일조하는 것이 제 목표입니다."

자신의 삶을 이야기하고 있는 정상훈 활동가
 자신의 삶을 이야기하고 있는 정상훈 활동가
ⓒ 김동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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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지막으로, 선생님처럼 조금은 다른 삶을 사려는 사람들에게 해주고 싶은 말이 있으면 한 마디 해주세요.
"저 개인적으로 매트릭스라는 영화를 좋아합니다. 거기서 모피어스가 네오에게 두 가지 알약을 선택하라고 주잖아요. 저는 그것이 자기반성의 기회라고 생각합니다. 지금처럼 그대로 살 것인가에 대해서요. 거기 보면 다른 요원은, 고기가 가짜인 줄 알면서도 맛있게 먹는 장면이 나오잖습니까. 자본주의는 워낙에 엄청난 자기 파괴적인 경쟁을 즉 남보다 조금이라도 앞서기 위한 경쟁을 부추기지만, 결과적으로는 모두가 평균에 머물고 또 많은 사람은 평균 이하로 도태됩니다. 그렇기에 자신을 스스로 돌아볼 기회를 얻기가 굉장히 힘든 것 같아요.

스스로 쉬었던 시기가, 저 개인적으로는 굉장히 힘든 시기였거든요. 제가 그동안 이루었던 걸 다 내려놔야 했으니까요. 하지만 지금 생각하면, 그것이 저를 되돌아보는 계기가 되면서 그때보다는 훨씬 성숙해진 것 같아요. 그러니 다른 삶을 꿈꾸신다면, 지금 당장 멈추어보세요. 지금 당장 조금만이라도 우리가 경쟁에서 물러나면, 내가 지금 해야만 하는 일을 잠시 쉬면 큰일 날 것 같지만, 그렇지 않을 수 있더라고요.

물론, 하루하루 먹고살기 힘든 분들에게는 더 쉽지 않은 결정이겠지만, 잠시라도 쉬며 자신을 되돌아보는 기회를 가지면 나중에 훨씬 더 많이 나가고, 멀리 볼 수 있는 기회를 가지게 되실 겁니다. 그리고 특히 젊은 분들이 생각하시는 것보다, 인생은 좀 길더라고요. 30대 중반에 제가 그렇게 쉬었지만, 40대 중반이 되어서 지금 다시 새로운 출발을 하고 있잖아요? 저는 여전히 젊고, 열정이 넘친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자기 성찰의 시간을 가져보시는 게 어떨까, 이런 조언을 해드리고 싶습니다."


태그:#정상훈, #에볼라, #시에라리온, #국경없는의사회, #노동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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