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텍스트(Text)에는 맥락(Context)이 있습니다. 문화 콘텐츠도 마찬가지입니다. 100% 정치적인 예술이 존재할 수 없듯이, 100% 순수한 예술도 없습니다. 문화 공연을 때로는 인문학적으로, 때로는 사회과학적으로 읽어봅니다. 마음에 안 들면 신랄하게 태클도 걸어보고, 재미있으면 '우쭈쭈' 칭찬도 합니다. 공연을 철학적으로 혹은 정치·사회적으로 해석하려는 시도가 항상 성공하지는 않을 겁니다. 시도가 비록 재미(Fun)는 없더라도, 최소한 '뻔'한 리뷰는 쓰지 않으려 합니다. [편집자말]

드라큘라의 신념은 순수했다. 그는 신을 위해 싸웠고, 주를 위해 모든 걸 바쳤다. 400년 전, 그의 사랑 엘리자벳사가 참혹하게 죽음을 맞이할 때까지는 말이다. 신에게 모든 걸 바쳤지만, 결국 돌아온 건 사랑하는 이의 죽음이라는 사실에 그는 좌절한다. 신을 향해 저주의 말을 내뱉던 그는 십자가를 모욕한다. 결국, 뱀파이어가 되어 고통 속에 영생을 살아야 하는 대가를 치른다.

드라큘라의 사랑은 확고했다. 400년 후 드라큘라가 미나를 보는 순간, 그녀가 자신의 연인이었던 엘리자벳사의 환생이라는 걸 확신한다. 미나의 약혼자 조나단을 흡혈하여 젊음을 찾은 드라큘라는 미나를 자신과 같은 존재로 만들어 영원히 함께하고자 유혹한다. 400년 동안 간직해왔던, 흔들리지 않았던 사랑을 완성하기 위해.

뮤지컬 <드라큘라> 프레스콜 26일, 서울 세종문화회관 대극장에서 열린 뮤지컬 <드라큘라>의 프레스콜 현장 사진. 드라큘라에 김준수, 미나에 임혜영, 조나단에 진태화 페어. 하이라이트 1신~3신까지.

▲ 드라큘라의 좌절 지난 1월 26일, 서울 세종문화회관 대극장에서 열린 뮤지컬 <드라큘라>의 프레스콜 현장. 드라큘라 역의 김준수가 무릎을 꿇고 있다. 드라큘라는 미나가 엘리자벳사의 환생임을 확신하지만, 미나는 선뜻 드라큘라에게 다가서지 못한다. 드라큘라의 잘못된 사랑 방식은 파멸을 자초한다. ⓒ 곽우신


하지만 드라큘라는 몰랐다. 자신의 일방적인 사랑이 왜 자꾸 빗나가는지. 신을 향했던 열망은 저주로 돌아왔고, 미나가 거부하던 사랑은 제2의 피해자만 만들었다. 미나를 설득하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던 드라큘라. 그에게 오래 전 아내 줄리아를 빼앗긴 반 헬싱과 최근 애인 루시를 잃은 아서는 드라큘라를 없애기 위해 십자가와 말뚝, 성경과 성수를 챙겨 추적을 시작한다.

드라큘라의 운명은 어떤 끝을 향해 달리게 될까. 지난달 23일, "브로드웨이 역사상 가장 아름다운 입맞춤"을 표방하며 개막한 뮤지컬 <드라큘라>가 오는 9일 서울 세종문화회관 대극장에서 2주라는 짧지만 강렬한 재연의 문을 닫는다.

태생적 한계, 라이선스만의 매력으로 점차 보완 중

<드라큘라> 중 루시의 장례식 26일 뮤지컬 <드라큘라>의 프레스콜이 서울 세종문화회관 대극장에서 열렸다. '루시의 장례식(Lucy's Feneral)' 장면에서 '영원한 삶(Life after life)'을 열창하고 있는 드라큘라(박은석)와 루시(이예은).

▲ 루시의 장례식 지난 26일 뮤지컬 <드라큘라>의 프레스콜이 서울 세종문화회관 대극장에서 열렸다. '루시의 장례식(Lucy's Feneral)' 이후 '영원한 삶(Life after life)'을 열창하고 있는 드라큘라(박은석)와 루시(이예은). 중후하면서도 클래식한 음색의 박은석과 날카로우면서도 단단한 이예은의 목소리는 합이 잘 맞는다. 'Life After Life'는 1막의 끝을 닫는, 굉장히 강한 인상의 곡이다. 하지만 여기서 카리스마를 보여준 루시는 정작 2막이 시작하자마자 반 헬싱과 아서의 손에 최후를 맞는다. ⓒ 곽우신


<드라큘라>는 본래 서사가 상당히 취약한 작품이다. 오리지널 작품 자체의 스토리가 약하다 보니 라이선스도 이 엉성함을 완전히 덮을 수 없었다. 기승전결 중 기·승까지의 전개는 다소 늘어진다. 캐릭터 간 비중도 잘 조화가 안 된다. 드라큘라와 함께 '라이프 애프터 라이프(Life After Life)'를 열창하던 루시는 런던 전체를 '씹어먹을 듯한' 포스를 보여주며 1막을 닫지만, 정작 2막이 시작하자마자 퇴장한다.

뮤지컬 <드라큘라> 프레스콜 26일, 서울 세종문화회관 대극장에서 열린 뮤지컬 <드라큘라>의 프레스콜 현장. 'If I Had Wings'와 'Mina's Seduction'의 장면. 미나(임혜영), 드라큘라(박은석).

▲ 미나의 유혹 지난 26일, 서울 세종문화회관 대극장에서 열린 뮤지컬 <드라큘라>의 프레스콜 현장. 미나의 윻혹(Mina's Seduction) 장면에서 드라큘라(박은석)와 미나(임혜영)이 서로를 향해 노래하며 연기하고 있다. 미나 역에 원캐스트로 출연하는 임혜영은, 2014 초연 당시 조정은·정선아와는 또 다른 노선의 미나를 연기하며 색다른 매력을 선사한다. 장·단점이 확실하고 호불호도 갈리는 임혜영이지만, 일방적으로 폄훼당할 연기나 노래 실력은 결코 아니다. ⓒ 곽우신


뮤지컬 <드라큘라> 프레스콜 26일 서울 세종문화회관 대극장에서 열린 뮤지컬 <드라큘라>의 프레스콜. 'It's Over'를 부르며 반 헬싱(강홍석)과 드라큘라(박은석)가 대결을 펼치고 있다.

▲ 드라큘라와 반 헬싱의 대결 지난 1월 26일 서울 세종문화회관 대극장에서 열린 뮤지컬 <드라큘라>의 프레스콜. 미나의 유혹 이후, 드라큘라를 잡기 위해 반 헬싱(강홍석)과 아서 일행이 들이닥친다. 직전까지 드라큘라와 함께 하겠다며 몸을 섞은 미나는, 이 장면에서 반 헬싱을 죽이려는 드라큘라를 만류한다. 이처럼 미나는 장면마다 계속 편을 달리하며 갈등하는 캐릭터인데, 이 설득력이 약해지면 극을 따라가는 관객조차도 혼란스럽게 되어 버린다. ⓒ 곽우신


특히나 조나단은 드라큘라에 비해 지나치게 매력이 없어서 미나가 왜 갈등하는지 이해하기 어렵다. 조나단의 문제는 미나에게까지 영향을 미친다는 데 있다. 본래 미나는 여주인공으로서 이야기의 중심을 잡아야 하는 캐릭터이다. 환생 이전의 감정이 떠오르며, 그녀는 장면이 전환될 때마다 드라큘라와 약혼자 조나단 사이에서 태도를 바꾼다. 미나가 설득력을 잃으면 관객 입장에서는 극 자체가 혼란스러울 수밖에 없다.

그래도 지난 2014년 초연에 비해서는 확실히 나아졌다. 초연 때는 그토록 미나를 뱀파이어로 만들려던 드라큘라가 정작 미나가 마음을 돌렸을 때 그녀를 거부하고 죽음을 택하는 결말이 다소 뜬금없게 다가왔다. 이번 재연 때는, 초연 당시 드라큘라가 '돈오점수'하던 과정을 대폭 수정했다. 반 헬싱과의 대화 등 여러 대사나 장치를 마련해 관객을 이해시키려는 노력이 돋보였다. 무엇보다 죽음을 선택한 후 미나와 함께 맞이하는 결말은 이전까지 이야기의 구멍을 만회하는 '한 방'이다.


<드라큘라>는 전형적인 대극장 뮤지컬이다. 극 자체가 사람을 유혹하는 드라큘라와 비슷하다. 지루할 때쯤 관객을 홀리는 곡이 귓가에 터지며 서사의 허술함을 관객이 크게 개의치 않도록 만드는 매력이 있다. '프레쉬 블러드(Fresh Blood)', '러빙 유 킵스 미 얼라이브(Loving You Keeps Me Alive)', '플리즈 돈 메이크 미 러브 유(Please Don't Make Me Love You)', '잇츠 오버(It's Over)' 등 좋은 넘버가 워낙 많다. 여기에 회전무대나 영상의 활용 등으로 시각적 압도감 역시 선사한다.

국내 <드라큘라>는 오리지널 버전의 태생적 한계를 조금씩 보완하면서 기존에 가지고 있는 특·장점을 발전시키고 있다. <드라큘라>는 분명 더 좋은 작품이 되고 있고, 이 진화는 아직 완성형이 아니다. 해외 오리지널과 국내 창작극 사이에서 라이선스 작품만이 취할 수 있는 길이 무엇인지 <드라큘라>는 잘 보여주고 있다.

우리가 누군가를 사랑할 때


"많은 날들을 지낸 나의 삶, 세상 모든 걸 알 줄 알았는데. 왜 이제와서 방향을 잃었을까. 당신 아픔에 모든 게 흐려져. 왜 이제야 의심하게 되나. 무엇이 옳은 길인가. 내 사랑의 선택 그대를 위했나. 왜 이제야 자신이 없는지, 진실이 뭔지 흔들려." - 뮤지컬 <드라큘라> 제2막 No.27. 'The Longer I live' 중에서

극의 마지막 순간 직전에서야 드라큘라는 자문한다. 자신이 '첫 창조물'로 만들었던 루시는 그녀를 사랑하는 아서의 손으로 심장에 말뚝이 박혔다. 노예로 만들었던 줄리아는 남편 반 헬싱의 손에 최후를 맞는다. 그저 자신의 방식대로 상대를 사랑하면 되는 줄 알았다. 드라큘라는 그저 자기처럼 영원한 삶을 누리는 미나를 바랐던 것이지만, 그것이 비참한 최후를 의미하는 줄은 몰랐다.

뮤지컬 <드라큘라> 프레스콜 26일, 서울 세종문화회관 대극장에서 열린 뮤지컬 <드라큘라>의 프레스콜 현장 사진. 드라큘라에 김준수, 미나에 임혜영, 조나단에 진태화 페어. 하이라이트 1신~3신까지.

▲ 오열하는 샤큘 지난 1월 26일, 서울 세종문화회관 대극장에서 열린 뮤지컬 <드라큘라>의 프레스콜 현장. 드라큘라 역의 김준수가 죽은 엘리자벳사를 안고 오열하고 있다. 엘리자벳사의 죽음은 드라큘라를 좌절하게 했지만, 분노를 이기지 못한 채 성전을 모욕한 그는 저주를 받고 만다. 어쩌면 이때의 선택이, 400년 후의 죽음마저 예정하고 있던 건지 모른다. ⓒ 곽우신


우리는 사랑이라는 감정을 통해, 상대에게 나를 주입한다. 상대를 나와 비슷한 존재로 만들려고 한다. 있는 그대로의 상대를 받아들이려고 하기보다는, 서로 닮아가며 더 많은 공통점을 만들기를 바란다. 자연스러운 과정이지만, 때로는 그 과정에서 상대의 장점이나 특징을 나의 기준에 맞춰 깎아내기도 한다. 그 과정이 상대에게 상처가 되기도 한다. 신을 저주했던 순간부터 드라큘라에게 지난 400년은, 일방적으로 감정을 쏟아 부은 후 준만큼 돌려달라고 투정부리는 시간에 불과했다.

드라큘라의 비현실적 사랑이 현실적인 울림이 있는 건, 400년이라는 지고지순한 시간 때문도, 뱀파이어라는 흥미로운 설정 때문도 아니다. 우리가 대개 드라큘라처럼 일방적으로 사랑을 토해내고, 상대를 바꾸려 하는 탓이다. 상대를 고려하지 않은 채, 자신의 사랑이 최선이었다고 자위한다.

극이 모두 끝나고 극장을 나오면서 다소 뜬금없는 상상을 해봤다. 만약, 드라큘라가 조금만 더 일찍 이를 깨닫고 예정된 죽음을 맞이했다면 어떻게 됐을까. 엘리자벳사의 환생 미나는 조나단이 아니라, 드라큘라의 환생인 누군가와 맺어지지는 않았을까? 이토록 서로에게 상처만 남긴 채 끝나버리는 비극 이외의 다른 길은 없었던 걸까.

뮤지컬 <드라큘라>의 포스터 1월 23일부터 2월 9일까지.

▲ 뮤지컬 <드라큘라>의 포스터 지난 1월 23일에 국내 재연의 막을 올린 뮤지컬 <드라큘라>가 오는 9일까지 서울 세종문화회관에서 관객을 맞는다. 아이돌 가수에서 뮤지컬 배우로 발돋움하고 있는 김준수는 '대체불가능'한 자신만의 영역을 착실하게 만들고 있다. 그의 스타일에 대한 호불호가 있을 수 있어도, 실력만큼은 진짜이다. ⓒ 오디컴퍼니



드라큘라 뮤지컬 김준수 박은석 임혜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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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5월 공채 7기로 입사하여 편집부(2014.8), 오마이스타(2015.10), 기동팀(2018.1)을 거쳐 정치부 국회팀(2018.7)에 왔습니다. 정치적으로 공연을 읽고, 문화적으로 사회를 보려 합니다.

오마이뉴스 선임기자. 정신차리고 보니 기자 생활 20년이 훌쩍 넘었다. 언제쯤 세상이 좀 수월해질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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