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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문서를 보면 마치 국회에서 보낸 것 처럼 보입니다.
 이 문서를 보면 마치 국회에서 보낸 것 처럼 보입니다.
ⓒ 신광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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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나 말을 잘하는지 사지 않을 수 없었어. 서로 지기 싫어하는 노인들이 옆집에서 사는데 가만히 있나. 일단 사고 보는 거지..."

강원도 화천군 한 마을 노인 회장은 '지금 생각해 보니 사기를 당한 것 같다'고 말했다. "안타까운 건 마을 노인들이 한 해 동안 노인 일자리에 참여해서 받은 돈과 자식들에게 받은 소중한 용돈을 건강식품 구입에 썼다는 것"이라고 덧붙였다.

국회에서 보낸 문서인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면장님, 시간되시면 지금 우리 마을 경로당 좀 다녀가실 수 있나요?"

지난 1월 중순, 강원도 화천군 사내면 광덕3리 이희철 이장으로부터 다급한 전화를 받았다. '국회에서 보낸 문서 같은데, 좀 이상하다'고 했다.

"혹시 지역 국회의원이 마을 어르신들을 위해 보낸 문서일지 모른다는 생각을 하시는 분들이 계시니 면장님이 확인 좀 해 주시죠."

건네받은 문서를 눈여겨봤다. 상단엔 큰 글씨로 '대한민국 국회'로 쓰여있다. 대다수 문서엔 상단에 기관명이 표시된다. 딱 보면 국회에서 보낸 문건이다. 문서 하단엔 발송자(기관·단체)명이 있다. 큰 글씨로 '대한민국 국회의사당 견학투어 사무국'으로 되어있다.

게다가 문서 중간쯤에 적힌 '2016년 국회의원 선거법으로 인해서 점심식사는 유료로 진행됨을 알려 드립니다'라는 문구를 보면 정말로 국회에서 보낸 것처럼 생각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아래를 자세히 보면 쉽게 알아볼 수 없을 정도의 작은 글씨로 'Sㅇㅇ투어'라는 회사명이 적혀있다.

"제가 보기에도 국회에서 보낸 게 맞는 것 같은데, 선거법 때문에 이런 행사는 할 수 없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한번 확인해 보겠습니다."

문서에 적힌 담당자에게 전화를 걸었다.

"네, 국회의사당 견학투어 사무국입니다."
"거기 국회 맞습니까? 마을 노인정으로 보내신 문서에 대해 문의해 볼 게 있어서 전화를 드린 겁니다."
"네, 말씀하세요."
"저는 강원도 화천군 사내면장입니다. 우리 마을 노인정에 발신처가 대한민국 국회로 되어있는 문서 보낸 거 맞으시죠? 이거 법적으로 문제가 되지 않나요?"

담당자는 내 신분을 밝히자, 당황하는 눈치를 보이더니 팀장을 연결해 주겠다고 했다.

"사실 여기는 여행사입니다. 문서에 적힌 내용은 틀림없습니다. 문서 하단을 보시면 Sㅇㅇ로 되어있지 않습니까?"
"이것 보세요. 문서 상단에 '대한민국 국회' 해 놓고, 하단엔 큰 글씨로 국회의사당 견학 사무국으로 되어있지 않습니까? 그리고 점심 식사는 선거법 때문에 안 된다? 이건 누가 봐도 국회에서 보낸 내용으로 착각할 수 있지 않을까요."
"아니, 싫으면 그만두면 되지 뭘 그렇게 따지십니까."

'건강식품' 판매에 수고비 요구까지

청와대 사랑채  체험 프로그램 대통령 집무실. 시골 노인들은 실제 대통령 집무실을 방문 하는 줄 알았단다.
 청와대 사랑채 체험 프로그램 대통령 집무실. 시골 노인들은 실제 대통령 집무실을 방문 하는 줄 알았단다.
ⓒ 신광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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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문건을 통해 여행을 다녀왔다는 마을 사람들 진술이 필요했다. 000마을 노인회장은 전화를 받자마자 대뜸 "그 사람들 사기꾼들이다. 가지 마라"라고 말했다.

"노인들이 차에 오르면 안내원이라는 한 여자가 마이크를 잡고, 한동안 천마와 녹용의 효능을 말한 후, 이런 기회가 늘 있는 것이 아니라면서 할머니 할아버지를 위해 특별히 20만 원~30만 원까지 염가 판매를 한다고 했어. 그런데 그 여자가 얼마나 싹싹하고 친절하게 말하는지 안 사고는 미안해서 버스에 앉아 있지를 못하겠다는 기분이 들더라는 거지."

"그럼 여행은 문서에 적힌 대로 하지 못하셨겠네요?"

"우린 국회보다는 청와대 구경을 시켜달라고 했지. 안내문에 청와대 집무실이 나와 있기에 대통령을 만나게 해 주는 줄 알았지. 근데 그게 아니더라고. 청와대 사랑채라는 곳인데 아무나 쉽게 갈 수 있는 그런 곳이더라고."

그들이 보낸 문서엔 '대통령 집무실'이라는 설명이 적힌 사진이 들어있고, '대통령 집무실을 체험할 수 있다'고 표기했다. 안내 문구 어디에도 '청와대 사랑채에 있는 가상 대통령 집무실'이란 내용은 없었다.

"시간을 많이 소비한 곳은 매장이었어. 우리들을 위한 특별 배려란 명목으로 안내받은 곳엔 녹용과 천마 등 온갖 약초 가공식품이 전시되어 있고 많은 종업원들이 판매에 열을 올리고 있더라고. 노인들은 거기에 넘어가 아들이나 며느리 주려고 사고, 본인 몸보신을 위해서 사고... 뭐 말릴 경황이 없었지."

그런데 더 황당한 건 돌아올 때 안내를 했던 여자가 노골적으로 기사님과 본인이 어르신들을 위해 봉사를 했으니 수고비를 달라고 하더란다. 노인 회장은 '그 사람들 비위를 맞춰주지 않았다가 험악하게 운전을 하면 어쩌나 하는' 마음에서 각각 5만 원씩 쥐어줬다고 했다.

여행 관련 문서 받았을 때 섣불리 판단 말아야

국회를 빙자한 또 다른 문서. 역시 여행사임을 쉽게 알 수 없다.
 국회를 빙자한 또 다른 문서. 역시 여행사임을 쉽게 알 수 없다.
ⓒ 신광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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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차 여행사 팀장이란 사람에게 전화를 걸었다. '이런저런 일이 있었다는데 사실이냐"라는 질문에 그는,

"버스에서 어떤 일이 있었는지 그건 모르겠고, 당신도 해외여행 다녀온 적 있지 않아요? 매장에 들르는 건 자연스러운 현상 아닙니까?"

"그런데 그 대상이 문제라는 겁니다. 노인들 쌈짓돈을 뺏는 행위가 잘한 건지 생각해 볼 일이고, 같은 여행사 소속 버스일 텐데 그런 행위를 모른다는 건 말이 안 되지 않습니까?"

내 질문에 그는 "피해를 입은 당사자도 아니면서 주제넘게 나선다"라는 말에 이어 "더 이상 긴말 할 시간 없으니 법대로 하라"며 일방적으로 전화를 끊었다. 이후 수차례 통화를 시도했으나 연결되지 않았다.

최근 위 사건과 관련한 한 라디오 방송 인터뷰에서 나는 이렇게 말했다.

"세상엔 공짜라는 게 없습니다. 어르신들께서 여행 관련 문서나 전화를 받거나, 금융기관 또는 수사기관으로부터 전화를 받았을 땐 섣불리 판단하지 말고, 마을 이장이나 읍·면사무소에 상담을 한 후 결정해 주시길 바랍니다."


태그:#여행사 사기, #국회, #청와대, #SKT 여행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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