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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왜란 일본군의 주 함선인 아타케부네의 모습. 일본 함선 중 가장 규모가 커서 '안전하게 지낼 수 있다'는 뜻의 안택선(安宅船)이라는 이름을 가졌다. 물론 김충선도 이 배를 타고 바다를 건너왔을 것이다. 사진은 대구 달성군 가창면 한일우호관의 전시품을 촬영한 것이다.
 임진왜란 일본군의 주 함선인 아타케부네의 모습. 일본 함선 중 가장 규모가 커서 '안전하게 지낼 수 있다'는 뜻의 안택선(安宅船)이라는 이름을 가졌다. 물론 김충선도 이 배를 타고 바다를 건너왔을 것이다. 사진은 대구 달성군 가창면 한일우호관의 전시품을 촬영한 것이다.
ⓒ 정만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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녹동(鹿洞)서원은 대구 우록리(友鹿里)에 있다. 우록은 대구광역시의 법정리(法定里)이지만 '사슴(鹿)을 벗(友)하며 사는 마을(里)'이라는 이름만으로도 면 단위의 산촌이라는 사실을 짐작할 수 있다. 하지만 대구광역시 달성군 가창면 우록길 218(우록리 585)의 녹동서원은 임진왜란 유적지를 답사할 때 결코 빠뜨리면 안 되는 중요 방문지이다.

보통의 서원은 선비를 모시지만 녹동서원은 전혀 다르다. 이곳은 일본군 선봉장으로 전쟁에 참전했다가 '한 번도 싸우지 않고' 곧장 조선에 귀화하여 큰 무공을 세운 '특이한' 경력의 장수 김충선을 기리는 곳이다. (사야가가 조선에 귀화한 이유에 대해서는 오마이뉴스 <일본군 선봉장, '조선 장군 김충선'이 된 까닭> 기사 참조)

김충선은 과연 어떤 공을 세웠기에 일본군 장수 출신이면서도 조선의 서원에 배향되는 영광을 누리고 있는 것일까? 녹동서원 옆 '한일 우호관' 내부에 게시되어 있는 '모하당 김충선'의 내용을 통해 김충선의 업적을 살펴본다. (번호, 주석, 문장부호는 모두 필자가 임의로 붙인 것이다.)

(1) 경주, 울산 등지의 전투에 참가하여 큰 공을 세웠으며, (2) 조총 제작 기술과 사용법을 조선에 전수하였다. 또한 (3) 임진전쟁이 끝난 이후 대구 우록동에 거주하다가 (4) 자청하여 10년 동안 북쪽 변방을 지키다가 돌아왔으며, (5) 이괄의 난과 (6) 병자호란 때에도 큰 공을 세웠다. 이러한 공으로 삼란공신(三亂功臣, 왜란, 이괄의 난, 호란에 모두 공을 세운 공신)으로 불렸으며, 품계가 정헌대부(정2품)에 올랐다. 또한 (7) 김충선이라는 이름을 하사받고 '사성(賜姓)김씨'의 시조가 되었다.

경주시 감포읍 대본리 661 언덕, 사적 159호인 이견대가 문무왕 설화가 전해지는 대왕암을 바라보며 서 있다. 본래 신문왕이 아버지 문무왕을 기려 세운 것이지만 없어졌고 현존 건물은 1979년 건축물이다. 사야가는 이곳 전투에서 일본군을 크게 제압한 공로를 인정받아 선조로부터 높은 벼슬과 '김충선'이라는 이름을 얻는다.
 경주시 감포읍 대본리 661 언덕, 사적 159호인 이견대가 문무왕 설화가 전해지는 대왕암을 바라보며 서 있다. 본래 신문왕이 아버지 문무왕을 기려 세운 것이지만 없어졌고 현존 건물은 1979년 건축물이다. 사야가는 이곳 전투에서 일본군을 크게 제압한 공로를 인정받아 선조로부터 높은 벼슬과 '김충선'이라는 이름을 얻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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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충선은 귀화 이후 여러 전투에 참전하여 많은 공을 세운다. 1593년 4월 경주 이견대 싸움에 참전하여 일본군 300여 급을 참살했고, 1597년 12월 22일부터 이듬해 1월 4일까지 조명연합군이 울산성을 공격할 때에는 100여 군사를 거느리고 성을 넘어들어가 수십여 명의 적군을 참살했다. '모하당 김충선'이 '(1) 경주, 울산 등지의 전투에 참가하여 큰 공을 세웠다'고 기술한 것은 그 때문이다.

경주, 울산 등지에서 일본군을 대파하는 사야가

선조는 사야가를 크게 포상해야 한다는 도원수 권율, 어사 한준겸 등의 주청을 받아 그를 정2품 자헌대부(資憲大夫)로 대우하는 한편 성(姓)과 이름(名)을 하사한다. 선조는 사야가에게 "바다를 건너온 모래(沙)를 걸러 금(金)을 얻었다" 하고 기뻐하면서, '김해 김씨'를 성으로 삼으라 한다. 일본이름 사야가(沙也加)에 모래(沙)가 들어 있는 것을 보고 착상한 선조의 기발한 작명이었다. 충성스럽고 착한 인물이라는 뜻에서 이름은 '충선(忠善)'이라 정해졌다. 이를 '모하당 김충선'은 '(8) 김충선이라는 이름을 하사받고 사성김씨(賜姓金氏)의 시조가 되었다'라고 표현하고 있다.

김충선 가문은 김해김씨이지만 수로왕의 후손들이 아닌 까닭에 특별히 앞에 '임금이 내려준 성씨'라는 뜻의 '사성(賜姓)' 두 글자를 붙여 '사성 김해김씨'라고 부르기도 한다. 그래서 우록마을 마을회관에서 도랑을 건너 김충선 묘소로 오르는 임도 입구의 '차량 통제 구역' 안내판(사진 왼쪽)과, 그 앞 문중 묘소 빗돌에도 '사성 김해김씨'라는 표현이 들어 있다.
 김충선 가문은 김해김씨이지만 수로왕의 후손들이 아닌 까닭에 특별히 앞에 '임금이 내려준 성씨'라는 뜻의 '사성(賜姓)' 두 글자를 붙여 '사성 김해김씨'라고 부르기도 한다. 그래서 우록마을 마을회관에서 도랑을 건너 김충선 묘소로 오르는 임도 입구의 '차량 통제 구역' 안내판(사진 왼쪽)과, 그 앞 문중 묘소 빗돌에도 '사성 김해김씨'라는 표현이 들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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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력 호족들에게 사성(賜姓)을 하여 자기 세력을 확대하는 왕건의 고려 창업 과정이 말해주듯, 임금에게서 성(姓)씨를 받는(賜) 것은 엄청난 '가문의 영광'이었다. 사성 가문은 즉시 상류층에 편입되었고, 본인과 후손들에게는 탄탄대로의 벼슬길이 펼쳐졌다. 선조로부터 성명을 하사받은 김충선 역시 '술회가'를 지어 가슴 뜨거운 감회를 토로했다. 

자헌계(姿憲階) 사성명(賜姓名)이 일시에 특강(特降)하니
어와 성은(聖恩)니야 깁기도 망극다.
이 몸 가리된들 이 은혜 갑플소냐!

위 '술회가' 일부의 현대석

자헌대부라는 높은 품계와 성명을 한꺼번에 특별히 하사하시니
아, 임금의 은혜는 깊고도 끝이 없도다.
이 몸이 가루가 되도록 애쓴들 어찌 그 은혜를 다 갚을 수 있으랴! 


김충선 초상
 김충선 초상
ⓒ 녹동서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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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해 김씨는 수로왕, 김유신으로 대표되는 오랜 전통의 명문 거족이다. 즉, 사야가에게 주어진 임금의 하사품은 더할 나위 없이 빛나는 역사의 광영이었다.

그런데도 김충선 가문은 '임금이 내려준 성씨'라는 뜻의 '사성(賜姓)' 두 글자를 덧붙여 스스로를 '사성 김해 김씨'라 부른다. 그런 호칭은 임금으로부터 성씨를 하사받은 김충선의 후손이라는 영예를 당당하게 자랑하는 데 절묘하게 도움이 된다. 물론 본래의 김해김씨와 구분이 되지 않는 문제도 덩달아 해소된다.

조총 제작과 사용법을 조선에 전수한 김충선

김충선의 업적 중 한 가지는 '(2) 조총 제작 기술과 사용법을 조선에 전수했다'는 점이다. 본래 조선 정부는 조총의 제조와 사용법, 염초의 채취 및 화약의 제조법 등을 아는 항왜들로부터 그 기술을 전수받으려 했다. 그래서 그들에게 관직도 주었다.

조총은 임진왜란 당시 일본군의 주무기였던 휴대용 화기였다. 길이 1m 전후로, 사정거리는 100-200m, 명중률이 높은 거리는 100m 이내였는데 실제 전투시에는 대체로 50m 정도에서 사격하였다. 임진왜란 초기 조선군은 이 조총의 위력에 속수무책으로 당하였다.
 조총은 임진왜란 당시 일본군의 주무기였던 휴대용 화기였다. 길이 1m 전후로, 사정거리는 100-200m, 명중률이 높은 거리는 100m 이내였는데 실제 전투시에는 대체로 50m 정도에서 사격하였다. 임진왜란 초기 조선군은 이 조총의 위력에 속수무책으로 당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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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연히, 전문 능력을 갖춘 항왜의 대표적 인물 사야가는 조총과 화포 등 일본 무기 제조 기술을 전수하는 일에 힘을 쏟았고, 곽재우, 권율, 김성일, 이덕형, 이순신, 정철과 편지를 주고 받으며 조총 보급 등의 현안에 관해 논의했다. 그가 이순신에게 보낸 답서에 등장하는 '하문하신 조총과 화포에 화약을 섞는 법은 (중략) 이미 각 진영에 가르쳤습니다. 이제 또 김계수를 올려 보내라는 명령이 있사오니 어찌 따르지 않겠사옵니까.' 같은 기록도 그 사실을 증언해주는 사례의 한 가지이다.

김충선은 '(3) 임진왜란이 끝난 후 대구 우록동에 거주한다.'  그가 우록에서 살기로 마음먹은 까닭은 <모하당문집> '녹촌지'에 밝혀져 있다. 그는 1600년 '산중에 우거하는 사람은 대개 사슴(鹿)을 벗(友)하며 한가로움을 탐하는 것이다. 우록의 뜻은 내 평생토록 산중에 숨어살고자 하는 뜻에 부합한다. (중략) 그러므로 한 칸의 띠집을 세워서 자손에게 남기노니 이곳이 곧 나의 원하는 땅'이라면서 마을이름을 우록(友鹿)으로 바꾼다. 본래 우록마을의 한자 표기는 지형이 소(牛) 굴레(勒)를 닮았다고 하여 예로부터 우륵(牛勒)으로 내려져왔다.

향림사에서 본 우록마을의 지형. 본래 소(牛) 굴레(勒)처럼 생겼다고 하여 우륵(牛勒)이라 불렀으나 1600년에 김충선이 '사슴(鹿)을 벗(友)하며 살기 좋은 마을'이라는 뜻의 우록(友鹿)으로 바꾸었다.
 향림사에서 본 우록마을의 지형. 본래 소(牛) 굴레(勒)처럼 생겼다고 하여 우륵(牛勒)이라 불렀으나 1600년에 김충선이 '사슴(鹿)을 벗(友)하며 살기 좋은 마을'이라는 뜻의 우록(友鹿)으로 바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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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록동에 살던 김충선은 '(4) 자청하여 (1603년부터 1613년까지) 10년 동안 북쪽 변방을 지킨다.' 임금(광해)은 그 공을 칭찬하여 정헌대부(정2품)의 교지와 "자원하여 줄곧(仍) 지켰으니(防) 그 마음 가상하도다"(自願仍防其心加嘉)라는 여덟 글자의 어필(御筆)을 하사한다. 그가  '잉방시(仍防詩)'라는 제목의 시를 남긴 것은 이 어필에서 유래한 것이다.

'잉방시'의 어휘 풀이


장성 : 국경을 이루고 있는 긴 성
만리변새 : 먼 곳의 국경 요새
봉황성 : 중국 국경의 성
산해관 : 중국 국경의 관문
십만호병마 : 10만의 오랑캐 병사와 말
천추 : 평생
황천 : 하늘
성상 : 임금

이 몸이 장성(長城) 되야
만리변새(萬里邊塞)에 칼을 베고 누엇으니
봉황성(鳳凰城) 산해관(山海關)은
말발의 티끌이요
십만호병마(十萬胡兵馬)는
칼 끝의 풀잎이라
대장부 천추(千秋) 사업
이른 때에 못 이루고
그 언제 이뤄보랴
진실로 황천(黃泉)이 내 뜻을 아신다면
우리 성상(聖上) 근심 풀까 하노라

김충선은 '(5) 이괄의 난 때에도 큰 공을 세운다.' 1623년(광해 15) 인조반정 때의 공신 이괄(李适)은 논공행상에 큰 불만을 가지고 있던 차에 외아들 전(栴)이 모반 누명을 쓰는 상황이 벌어지자 1624년(인조 2) 반란을 일으킨다. 임진왜란 때 전투 경험이 있는 항왜 출신들을 선동하여 전투력을 크게 키운 이괄에 밀려 한때 인조는 공주까지 도망가는 치욕을 당한다.

이괄의 난 진압에도 크게 기여한 김충선

이괄을 피해 공주까지 도망친 인조는 두 그루 나무 아래에서 반란이 진압되기를 기다렸다. 두 그루 나무가 있던 자리에는 1708년(숙종 34) 정자 쌍수정이 건립되었고(사진에 원경으로 보임) 그 아래에는 인조가 이곳에 온 사실, 6일간 머물 때 있었던 일, 공산성의 모습 등을 새긴 '쌍수정 사적비'(유형문화재 35호)도 세워졌다. 사진은 쌍수정 사적비를 보호하고 있는 비각 주변의 겨울 풍경이다.
 이괄을 피해 공주까지 도망친 인조는 두 그루 나무 아래에서 반란이 진압되기를 기다렸다. 두 그루 나무가 있던 자리에는 1708년(숙종 34) 정자 쌍수정이 건립되었고(사진에 원경으로 보임) 그 아래에는 인조가 이곳에 온 사실, 6일간 머물 때 있었던 일, 공산성의 모습 등을 새긴 '쌍수정 사적비'(유형문화재 35호)도 세워졌다. 사진은 쌍수정 사적비를 보호하고 있는 비각 주변의 겨울 풍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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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때 54세의 노장 김충선은 이괄의 부장(副將)인 항왜 서아지(徐牙之)를 김해에서 참수하는 혁혁한 무공을 세운다. 조정은 김충선의 대공을 인정하여 사패지(賜牌地, 임금이 공신에게 내린 땅)를 하사한다. 김충선은 땅을 받지 않고 수어청(守禦廳)의 둔전(屯田)으로 바친다. 수어청은 임금(御)을 지키는(守) 관청, 즉 조선의 중앙 군영이었다. 임금 인조가 김충선을 얼마나 좋아했을지는 아래의 1628년(인조 6) 4월 23일자 <승정원일기>를 읽어보지 않아도 곧장 헤아려진다.

'김충선은 용맹이 출중할 뿐만 아니라 성품 또한 매우 공손하고 조심성이 있습니다. 그래서 이괄의 난 때에 도망친 항왜들을 추포하는 일을 당시 감사가 모두 이 사람에게 맡겨서 힘들이지 않고 해결할 수 있었으니, 진실로 가상합니다.'

1627년(인조 5) 정묘호란 때에도 자원군으로 참전하여 큰 공을 일구었던 김충선은 '(6) 병자호란 때에도 큰 공을 세운다.' 1636년(인조 14) 호란이 일어나자 아직 왕의 출전 명령이 하달되지 않았는데도 66세나 되는 고령의 김충선은 곧장 한성으로 출발한다. 북향 중 왕이 남한산성으로 파천한다는 소식을 들은 그는 바로 광주 쌍령(雙嶺)에 진을 친 다음 경상좌우병영 군사들과 나누어서 청군을 공격한다.150여 명으로 조직된 선봉군을 이끈 김충선은 청군을 대파한다. 전쟁이 끝난 뒤 임금은 "김충선의 자손에게는 대대로 벼슬을 주고 복호(復戶, 조세나 부역의 면제)를 하라"고 조정에 지시한다.

김충선의 공로와 마음을 진심으로 추앙한 조선 선비들

전란이 모두 끝난 뒤 김충선은 다시 우록동으로 돌아온다. 일본에 갈 수 있는 몸은 아니었으니 그가 이때 우록동으로 돌아온 것은 '영원한 귀향'이었다. 그는 향약을 제정하여 마을사람들의 공동체 정신을 북돋우는 한편, 제자들을 가르치면서 스스로 산골 선비가 되어 여생을 보냈다. '우흥(寓興)'은 그의 유유자적한 우록 생활을 잘 보여준다.

'우흥'의 어휘 풀이

기약 : 약속, 마음
황학봉 : 우륵동의 산 이름
선유동 : 우록동의 골짜기 이름
일일상대 : 매일 대하는
자양 : 주자가 살던 곳으로, 우록에도 자양이 있음
백록동 : 주자가 제자들을 가르친 곳으로, 역시 우록에도 있음
현송 : 음악소리와 글 읽는 소리
한천 : 현재의 냉천을 가리킴
진심 : 세상 티끌에 물든 마음

산즁의 기약 두고 우록촌에 돌아드니
황학봉(黃鶴峰) 선유동(仙遊洞)은
일일상대(日日相對) 내 벗이요
자양(紫陽)과 백록동(白鹿洞)은
도(道) 닦는 마당 되어
자손의 현송(絃誦) 소리 들리난고
한천(寒川) 말근 물의
진심(塵心)을 씻어볼까 하노라

일본군 선봉장으로서 조선군 장군이 되어 22세부터 66세까지 45년 내내 전쟁터를 누빈 무장 김충선. 시와 문장을 짓고 향약을 마련하여 향촌 살리기까지 실천한 선비 김충선. 영조(1724∼1776) 말기에 이르러 조선의 유림들은 김충선을 기리는 서원의 필요성을 임금에게 상소한다. 1789년(정조 13)에도 선비들은 재차 서원 건립을 청원한다.

녹동서원 강당과 그 오른쪽의 한일우호관
 녹동서원 강당과 그 오른쪽의 한일우호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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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윽고 1794년(정조 18) 그가 살았던 우록동에 녹동서원이 세워진다. 녹동서원은 그후 1864년(고종 1) 대원군의 전국 서원 훼철 때 화를 당하지만 1885년(고종 22) 영남 유림과 문중의 합심에 힘입어 재건된다. 일본인인데도 조선의 서원에 제향되고 있다는 점에서 김충선은 대단한 인물임에 틀림없지만, 귀화한 일본인을 기려 서원을 세우느라 진력한 이 땅의 유림들 또한 열린 마음을 가진 진정한 선비였다.

녹동서원의 정문에는 향양문(向陽門)이라는 현판이 걸려 있다. 해(陽)가 뜨는 남쪽 고향을 향(向)해 서 있는 문이라는 뜻이다. 고향 일본과 두고온 가족들을 내심으로는 한없이 그리워했을 김충선의 고통을 조선 선비들은 잊지 않았던 것이다. 그리고 2012년 5월, 녹동서원 옆에는 '달성 한일 우호관'이 새로 건립되었다. 김충선의 평화 정신을 오늘에 되새겨 한일 두 나라 사이의 우호를 더욱 돈독히 하자는 뜻이다.

김충선을 모시는 녹동사(녹동서원의 사당) 앞에 '김충선 장군 유적비'가 서 있는 모습
 김충선을 모시는 녹동사(녹동서원의 사당) 앞에 '김충선 장군 유적비'가 서 있는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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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 녹동서원 일대를 답사하는 순서에 대해서는 오마이뉴스 <일본군 선봉장, '조선 장군 김충선'이 된 까닭> 기사를 참조하시기 바랍니다.



태그:#김충선, #녹동서원, #임진왜란, #한일우호관, #이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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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편소설 <한인애국단><의열단><대한광복회><딸아, 울지 마라><백령도> 등과 역사기행서 <전국 임진왜란 유적 답사여행 총서(전 10권)>, <대구 독립운동유적 100곳 답사여행(2019 대구시 선정 '올해의 책')>, <삼국사기로 떠나는 경주여행>,<김유신과 떠나는 삼국여행> 등을 저술했고, 대구시 교육위원, 중고교 교사와 대학강사로 일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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