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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 서른넷 어느덧 벌써 30대 중반 나에겐 절대로 오지 않을 것 같았던 30대 중반 미친 듯이 일만 하며 살아온 10년이 넘는 시간 남은 것 고작 500만 원 가치의 중고차 한 대, 사자마자 폭락 중인 주식계좌에 500 아니 휴짓조각 될지도 모르지 대박 or 쪽박

2년 전 남들따라 가입한 비과세 통장 하나 넘쳐나서 별 의미도 없다는 1순위 청약통장 복리 좋대서 주워듣고 복리적금통장 몇% 더 벌려고 다 넣어둬 CMA통장 손가락 빨고 한 달 냅둬도 고작 담배 한 갑 살까 말까 한 CMA통장 이자 외국에 이민 가서 살고 있는 고등학교 동창 친구놈 가끔 연락이 와 자기는 노가다 한대 노가다해도 한국 대기업 댕기는 나보다 낫대 이런 우라질레이션 평생 일해도 못 사 내 집 한 채" - 자작곡 <응답하라! 30대여~> 노랫말 중에서

백수로써 내 하루일과는 취업사이트부터 생활정보지까지 하루에도 몇번씩 새로운 구인광고가 있는지 확인하는 것이었다.
▲ 구직활동 백수로써 내 하루일과는 취업사이트부터 생활정보지까지 하루에도 몇번씩 새로운 구인광고가 있는지 확인하는 것이었다.
ⓒ pixab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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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 굴지의 대기업 가족회사에 취업했다가 나의 인생 철학과는 맞지 않을 것 같다는 판단으로 하루 만에 다시 백수가 됐다. 산업기능요원 복무가 만료되고 딱 일주일만 마음 편히 쉬려고 했는데 어렵게 취직한 회사를 박차고 나오는 바람에 의도치 않게 더 오랜 시간을 쉬어야 했다. 그 휴식은 처음 일주일처럼 홀가분하고 마음이 편한 휴식은 아니었다.

자취방에서 빈둥거리며 느즈막이 일어나 하루 온종일 하는 일이라고는 '취업 사이트'를 뒤지는 일이었다. 그곳도 어쩌다 한 번씩 들어가야 새로운 구인광고들을 볼 수 있을 텐데 하루에도 몇 번씩 들락거리다 보니 매일 보는 구인광고들뿐이었다. 거기도 매일 같이 들여다보니 광고만 보고도 괜찮은 회사인지 열악한 회사인지 판단할 수 있는 능력이 생겨났다.

괜찮은 회사들은 이직률이 낮다. 그래서 새로운 사업에 진출해 신규 인력을 모집하는 게 아니라면 구인광고가 잘 나오지 않는다. 누군가가 나가야 빈자리가 생겨 사람을 뽑을 텐데 괜찮은 회사를 그만두는 사람은 당연히 별로 없기 마련이다. 그러니 자연스럽게 그런 회사들의 구인광고는 잘 나오지 않았다.

백수로 노는 시간이 점점 길어질수록 마음은 조급해지기 시작했다. 얼마 안되는 퇴직금으로는 두 달 생활비도 충당이 안 될 정도였기 때문에 서둘러 취업하지 않으면 생활을 유지할 수 없었다. 처음엔 인터넷 취업사이트에서만 구직활동을 하다가 집 근처 생활정보지도 매일같이 가져와 구인란을 샅샅히 뒤졌다.

구미는 공단지역이라 수 많은 회사들이 있는데도 막상 구직활동을 하다보니 마땅한 자리가 별로 없었다. 나와 함께 산업기능요원으로 함께 복무하기 위해 부산에서 올라온 친구들도 내가 백수로 놀고 있을 때 하나둘 복무 만료를 맞았다. 같은 대학에 다니는 형과 함께 병역특례를 받으러 올라온 친구는 복무 만료가 된 후 다시 부산에 있는 집으로 내려갔다. 그리고 다음 학기에 복학을 했다.

다른 한 명의 친구는 내가 산업기능요원으로 복무할 때 생산 라인 작업자로 근무하다가 내 후임 수리사로 키워준 친구였는데 복무가 만료될 때까지 2년을 꾸준히 수리사로 역량을 키워 나보다 빨리 다른 회사에 취직했다. 다들 각자 자기 갈 길을 잘 찾아가고 있는데 제일 먼저 복무가 만료된 나만 제대로 자리를 잡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에 자존심이 무척 상하기도 했다.

내가 구직활동을 하던 2005년 당시 우리나라는 주5일 근무제가 도입되기 시작한 시점이었다. 대기업들은 이미 주5일 근무제를 시행하고 있었고 중소기업은 규모에 따라 순차적으로 주5일 근무제를 도입하고 있는 중이었다.

나는 취업은 하되 내 생활을 충분히 즐기고 싶었기 때문에 가능하면 주5일 근무제를 시행하고 있으면서 교대 근무를 하지 않는 일자리를 원했다. 그런 조건의 일자리만을 고집하면서도 급여는 일정수준 이상의 자리를 찾다 보니 취업이 점점 늦어졌다.

총원 6명, 작은 스타트업의 창립 멤버가 되다

사원증이 없으면 들어갈 수 없는 대기업 사옥, 그 중에서도 내가 근무하던 연구소는 별도의 보안 검색대를 통과해서 출입을 할 수 있었다.
▲ 대기업 출입문 사원증이 없으면 들어갈 수 없는 대기업 사옥, 그 중에서도 내가 근무하던 연구소는 별도의 보안 검색대를 통과해서 출입을 할 수 있었다.
ⓒ 강상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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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직금을 받아 넣어뒀던 통장의 잔고도 슬슬 바닥이 나기 시작했을 무렵이 돼서야 나는 취업에 성공했다. 그 회사는 이제 막 신설된 회사로 대기업의 사내 협력업체였다. 보통 대기업 사내 협력업체라고 하면, 생산 공정 중에서도 노동강도가 높고 위험한 일들을 받아 하거나 생산 라인에 파견 인력을 보내는등의 회사가 대부분이었다. 그런데 이 회사는 특이하게도 연구소 소속의 업무 도급회사였다.

내가 이 회사에 취업한 이유는 주5일 근무에 교대 근무 없이 주간 근무만 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제일 마음에 들었던건 '근무 환경'과 '업무 분야'였다. 그 대기업에서 회사가 맡고 있는 업무는 PDP연구소 '신뢰성 센터'를 대신 운영하는 일이었다. 그렇다 보니 근무지가 그 대기업 연구소였고 담당 업무는 그 연구소에서 새로 개발되는 제품의 신뢰성 테스트를 하는 것이었다. 지금껏 내가 계속 해오던 디스플레이 분야 QC(Quality Control)와 비슷했기 때문에 아주 익숙한 분야였다.

인터넷 취업 사이트에서 그 회사 구인광고를 보고 이력서를 작성해 메일로 보냈다. 그리고 며칠 뒤 면접을 보러 오라는 연락이 왔다. 면접 역시 그 대기업의 연구소가 있는 사업장에서 진행됐는데 아직 사업을 시작하지 않은 상태라 사무실이 없어 구내식당에 앉아 면접을 봐야 했다. 면접을 보러온 사람은 나를 포함해 총 4명이었고 우리는 모두 합격했다. 그렇게 우리 넷은 새로 창업한 신생 회사의 창립 멤버가 됐다.

우리와 마주 앉아 면접을 본 사람은 회사의 사장님이었다. 50대는 족히 돼 보이는 푸근한 인상의 '아저씨'였다. 사장님은 이미 그 대기업의 다른 계열사에 사내 협력업체를 하나 운영하고 있었고 그와 별개로 이번에 새로 추가 사업을 진행하는 것이었다.

대기업의 사내 협력업체 사장 자리는 아무나 할 수 있는 게 아니다. 그 대기업 고위 임원 출신 정도는 돼야 일정 부분의 사업을 하나 받을 수 있다고 한다. 심지어 그 대기업의 사업장에서 나오는 쓰레기 처리 업체까지도 모두 그 회사 출신들이 하고 있다고 했다. 알고보니 내가 취업한 회사의 사장님도 그 대기업 '개발 실장' 출신이었다.

다함께 그 자리에서 '합격'이라는 이야기를 들은 우리 1기들은 면접을 본 날 서로의 얼굴을 익히고 화기애애한 분위기에서 헤어졌다. 그리고 그 분위기는 첫 출근을 하는 날도 계속 됐다. 번쩍번쩍한 대기업 연구소에 출근해서 우리가 앞으로 생활할 사무실에 책상을 옮겨 놓고 청소를 했다.

그 대기업의 연구소는 드 넓은 사업장 내에 있는 건물중에 가장 좋은 건물의 꼭대기 층에 있었다. 그 사업장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사원증이 있어야 하는데 그와 별개로 연구소가 있는 층의 엘리베이터 앞에는 별도의 보안검색대가 또 설치가 돼 있었다. 연구소 소속이 아니면 그 대기업의 직원들도 출입이 힘든 그곳을, 협력업체 직원인 우리는 매일 들락거릴수 있었다. 그 또한 하나의 소소한 즐거움이었다.

점심시간에 한참을 걸어 처음으로 가본 그 대기업의 구내식당도 엄청 좋았다. 메뉴도 한 가지가 아니라 여러 가지 중에 내가 먹고 싶은 메뉴를 골라 먹을 수 있었다. 식당 이외에도 이 대기업의 사업장 내에 있는 좋은 복지 인프라를 모두 이용할 수 있다는 사실에 내내 싱글벙글했다. 잠시 '이 대기업의 직원들은 참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이내 나도 취업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첫날 우리 1기 멤버 이외에도 과장님 한 분이 출근했다. 관리직으로 입사한 과장님은 30대 중반으로 역시 이 대기업 출신이었다. 이렇게 사장님과 과장님 그리고 우리 1기 멤버 4명으로 구성된 작은 스타트업이 내가 산업기능요원 복무를 마치고 처음으로 '일반 사원'으로 근무한 회사였다. 그곳에서 내 새로운 인생이 시작됐다.

덧붙이는 글 | 자작곡 '응답하라! 30대여~' 듣는 곳
http://www.bainil.com/album/365



태그:#PDP, #대기업, #연구소, #협력업체, #취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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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드콘텐츠 대표 문화기획과 콘텐츠 제작을 주로 하고 있는 롯데자이언츠의 팬이자 히어로 영화 매니아, 자유로운 여행자입니다. <언제나 너일께> <보태준거 있어?> '힙합' 싱글앨범 발매 <오늘 창업했습니다> <나는 고졸사원이다> <갑상선암 투병일기> 저서 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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