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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전이었다. 대문 앞 수북이 쌓인 우편물들을 정리하고 있는데 여성가족부로부터 온 한 통의 편지가 눈에 들어왔다. 처음 보는 모양의 우편물이라 유심히 살펴보는데…, 어라? 수신자란에 내 이름이 적혀 있는 게 아닌가.

'여성가족부에서 나한테 무슨 볼 일이 있는 거지? 여성가족부에서도 무슨 세금을 걷는 건가? 아님 벌금인가?'

집 주변에 성범죄자가 산다고 알려준 여가부

여성가족부 장관이 보내온 편지
▲ 고지정보서 여성가족부 장관이 보내온 편지
ⓒ 이희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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궁금한 마음에 그 자리에서 당장 봉투를 뜯어봤다. 봉투 안에는 '고지정보서'라는 공문과 함께 조잡한 만화로 그려져 있는 설명문이 들어 있었다. 그 내용인 즉, 우리 집 주변에 이런 성범죄자가 살고 있으니 조심하라는 것이었다. 그러고 보니 예전 집에서도 아내가 식탁에 올려놓은, 이와 같은 통지서를 본 기억이 어렴풋이 떠올랐다.

'귀하의 댁 인근에 거주하는 성범죄자 신상정보를 아래와 같이 보내드리니, 귀 댁의 아동, 청소년을 보호하는 데 참조해주시기 바랍니다. 정부는 성범죄자에 대한 관리와 재범방지를 위한 활동을 통해 귀 가족의 안전을 지켜드리려고 노력하고 있으며, 그 일환으로 성범죄 예방과 안전 관련 정보도 함께 보내드리니 적극 활용해 주시기 바랍니다.'

고지정보서에는 위와 같은 안내문과 함께 우리 집 근처에 살고 있는 성범죄자의 개인정보가 자세히 기록돼 있었다. 이름부터 시작해서 나이, 키, 몸무게, 주소는 물론이요, 심지어 그의 전면, 측면 사진 등도 포함돼 있었다. 모르는 사람은 모를 수 있겠지만 주변에 아는 사람이라면 결코 몰라 볼 수 없을 정도의 정보량이었다.

이 정도 등산 쯤이야
▲ 까꿍이와 산들이 이 정도 등산 쯤이야
ⓒ 이희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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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득 언제인가 아동·청소년 대상 성범죄자 신상공개에 대해서 사회적으로 한창 논쟁이던 때가 떠올랐다. 아무리 성범죄자라지만 그 사람의 인권을 생각하면 신상을 공개할 수 없다는 의견과 아동·청소년 대상 성범죄가 재범의 우려가 많은 범죄인 이상 신상공개를 해야만 한다는 의견이 맞붙었다.

당시 난 그래도 성범죄자의 인권이 더 중요하다는 생각에 전자를 지지하는 편이었지만, 이제는 어느새 후자 쪽으로 마음이 기울여져 있었다. 본질적으로는 그럼에도 전자가 옳지만 현실적으로는 후자일 수밖에 없다는 모순적인 생각. 내가 그런 오류에 빠지는 이유는 단 하나다. 올해로 8살이 되는 까꿍이 때문이다.   

딸 키우기 무서운 사회

어느새 취학통지서를 받은 까꿍이
▲ 훌쩍 커버린 까꿍이 어느새 취학통지서를 받은 까꿍이
ⓒ 이희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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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젠 고백도 제법 그럴 듯 하다
▲ 까꿍이의 사랑 고백 이젠 고백도 제법 그럴 듯 하다
ⓒ 이희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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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새 첫째 딸 까꿍이가 8살이 됐다. 녀석의 똥기저귀를 갈았다고 기사 쓴 게 바로 엊그제 같은데, 어느덧 커서 아빠 그림도 그리고 시도 때도 없이 엄마·아빠에게 사랑 고백하는 편지도 쓰곤 한다.

어디 그뿐인가. 한 달 전에는 동네 통장을 통해 까꿍이의 취학통지서도 받았는데 기분이 참으로 묘했다. 우리 딸이 벌서 커서 초등학교를 갈 나이가 됐구나. 까꿍이는 옆에서 이제 학교를 가게 됐다며 환호성을 지르고 있었지만, 아내와 나는 우리가 벌써 학부모라는 사실이 믿어지지 않을 뿐이었다.

막상 까꿍이를 초등학교에 입학시킨다고 생각하니 걱정이 늘기 시작했다. 딸자식이 8살쯤 되니 뉴스에서 보도하는 범죄들이 새삼스레 심각해 보였으며, 여성가족부로부터 받은 성범죄자 고지정보서도 허투루 볼 수 없었다. 험한 세상, 우리가 금이야 옥이야 키운 까꿍이에게 어떤 일이 벌어질지는 아무도 모르기 때문이었다.

이젠 이렇게 데려다 줄 날도 얼마 남지 않았다
▲ 유치원 가는 까꿍이 이젠 이렇게 데려다 줄 날도 얼마 남지 않았다
ⓒ 이희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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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모든 사람을 잠재적 범죄자로 취급하는 건 문제가 있다. 언론에서는 연신 '소라넷'을 거론하며 그들이 모두 변태인 것처럼 이야기하지만, 그것은 과도한 일반화의 오류임에 분명하다. 하지만 그럼에도 그런 보도가 신경 쓰이는 건 어쩔 수 없다. 어쨌든 이 사회에서 여자아이는 가장 약한 존재로서 쉽게 범죄에 노출되기 때문이다.

등하굣길도 문제였다. 유치원 다닐 때는 워낙 거리가 멀었으니까 등원은 내가, 하원은 아내가 책임졌지만, 이제는 까꿍이 혼자 학교까지 걸어 다녀야 한다. 걸어서 10분 밖에 되지 않는 거리이기 때문이다.

문제는 동네가 워낙 인가와 동떨어져 있다는 사실인데, 집과 학교 사이 으슥한 거리를 딸자식 혼자 보낼 생각을 하니 은근히 걱정됐다. 어떤 이는 그 전원적인 풍경에도 딸이 중학생이 돼서는 이사를 갔다고 하지 않는가.

아름답지만 때론 위험한 공간
▲ 우리 동네 풍경 아름답지만 때론 위험한 공간
ⓒ 이희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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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살 여아가 혼자 걷기에는 조금 불안한 그 길
▲ 까꿍이의 등하교길 8살 여아가 혼자 걷기에는 조금 불안한 그 길
ⓒ 정가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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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도 이준익 감독의 영화 <소원>이 개봉했을 때 난 차마 그 영화를 볼 수 없었다. 돌이켜 생각해보면 그건 결국 내가 딸을 가진 부모이기 때문이었다. 물론 취향의 탓도 있었겠지만, 딸자식을 가진 부모로서 그와 같은 이야기를 접한다는 사실 자체가 유쾌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런데 이런 딸자식 가진 부모에게 2015년 연말 충격적인 소식이 들려왔다. 바로 한일 정부 간의 위안부 합의다.

만약 당신의 딸이 '당했다'면

처음 정부의 발표를 접했을 때, 난 그 기사의 진위부터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 아무리 좋은 미사여구를 갖다 붙인다 한들 결론은 한국 정부가 단 돈 10억 엔을 받고 일본의 위안부 범죄에 대해 면죄부를 준다는 것이었는데, 그것은 정부가 사회적인 논의 없이는 결코 진행할 수 없는 일이기 때문이었다.

아무리 현 정부가 막 나간다고 하더라도 위안부 문제는 국민 정서 상 '역린'에 가깝다. 그것이 한·미·일 동맹에 걸림돌이 되고, 한일 양국 관계에 장애물이 된다고 하더라도 위안부 문제는 그리 쉽게 해결할 수 있는 성질이 아니다.

근대국민국가가 존재하는 첫 번째 이유가 그 구성원의 보호에 있다면, '위안부'는 대한민국이 헌법에 3.1 운동을 계승한다고 적은 이상 국가가 국가의 본질적인 임무를 못한 대표적 사례로서, 힘없는 국가가 개인에게는 얼마나 큰 재앙이 될 수 있는지 보여주는 하나의 징표이기 때문이다.

'위안부'는 우리가 일본 제국주의의 식민지였다는 참혹한 과거를 의인화시키는 존재로서, 현재 생존해 계시는 피해 할머님들은 그 자체로서 일제 만행의 산 증인이며, 우리 민족의 아픔이다. 우리는 그들을 통해 다시는 그런 일이 이 땅에 벌어져서는 안 된다는 교훈을 끊임없이 되새겨야 하며, 그와 같은 범죄 행위가 인류 역사에서 사라지도록 전 세계와 아픔을 공유해야 한다. 그런 의미로 '소녀상'은 우리의 과거이자 미래이며, 또한 인류의 유산이다.

그런데 정부가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들과는 그 어떤 상의 하나 없이 일본과 최종적이고 불가역적인 합의를 맺었다고 공포했다. 역사란 끊임없이 되새기고 공부해야 하는 것임에도, 정부는 더 이상의 합의는 없다고 밝혔다. 아직은 진실게임 양상이지만 일본대사관 앞 소녀상 이전도 합의의 조건이라는 보도가 흘러나오고 있다. 일본의 아베 총리는 합의 발표 이후 직접 사과도 하지 않았으며, 오히려 더 이상의 사과는 없다고 오히려 큰 소리를 치고 있는 중이다.

더욱 기가 막힌 것은 지금도 위안부 소녀상 앞에 모여 말도 안 되는 퍼포먼스를 펼치고 있는 관변 단체들의 막말이었다. 자신의 딸이 위안부였어도 지금처럼 하겠다며 한일 정부 간의 위안부 합의를 옹호하고 나선 '엄마부대 봉사단' 주옥순 대표. 만약 그녀가 딸자식을 키웠다면 그 딸과 가족들은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성범죄' 합의를 받아들이라는 정부

큰누나의 포스
▲ 막내 이 닦아주는 까꿍이 큰누나의 포스
ⓒ 정가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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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새 4, 6, 8살이다
▲ 많이 컸다 삼남매 어느새 4, 6, 8살이다
ⓒ 정가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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딸자식을 가진 부모로서 이와 같은 뉴스를 듣고 있자니 울화통이 터졌다. 과연 위안부 합의를 이끌어낸 인사 중 딸을 가진 사람은 없단 말인가? 자신의 딸이 전쟁 중에 강제로 군대에 끌려가 성노리개로 전락하더라도, 상황이 바뀌면 어쩔 수 없었다며 단 돈 몇 푼에 사과 받고 끝낼 것인가?

<방황하는 칼날> <오로라 공주> <공정사회> <돈 크라이 마미> 등 딸이 성폭행을 당해 그 부모가 직접 나서서 복수를 하는 줄거리의 영화들이 많은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그것은 피해자가 받는 상처에 비해 사회적으로 합의돼 있는 처벌이 약하기 때문이며, 그 불합리성에 대해 많은 사람들이 공감하고 있음을 의미한다. 어떤 부모가 딸을 그 지경으로 만든 범인을 그대로 놔두고 싶을까.

일본군위안부 소녀상(평화비) 지키기 운동이 진행되는 가운데 지난 6일 오후 종로구 일본대사관앞 소녀상 에서 시민들의 염원이 담긴 길다란 현수막을 펼쳐지고 있다.
 일본군위안부 소녀상(평화비) 지키기 운동이 진행되는 가운데 지난 6일 오후 종로구 일본대사관앞 소녀상 에서 시민들의 염원이 담긴 길다란 현수막을 펼쳐지고 있다.
ⓒ 권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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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물며 위안부 할머니들이다. 그 오랜 시간 억울하셔서라도 눈을 제대로 감지 못하시는 분들을 두고 현재 정부는 오히려 자신들의 합의를 받아들이라고 '협박' 중이다. 정부가 위로는 하지 못할 망정 가슴에 못을 박지는 말아야지 않겠는가. 딸을 키우는 아비의 심정으로 다시 한 번 묻고 싶다. 당신들의 딸이라면 그럴 수 있는가.

정부가 나서서 이번 사태를 결자해지하길 바란다. 최종적이고 불가역적인 역사는 애초에 존재하지 않는다. 그것은 현재 권력을 잡은 이들의 만용이며 착각일 뿐이다. 역사는 지도층 일부가 아니라 우리 모두의 것이며, 따라서 우리는 항상 역사 앞에서 겸허해야 한다. 부디 정부가 우리의 딸들을 끝까지 보호한다는 믿음을 심어주기를. 그것이 바로 근대국민국가의 책임이며, 우리가 세금을 내는 이유이기도 하다.


태그:#육아일기, #위안부 합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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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와 사회학, 북한학을 전공한 사회학도입니다. 물류와 사회적경제 분야에서 일을 했었고, 2022년 강동구의회 의원이 되었습니다. 일상의 정치, 정치의 일상화를 꿈꾸는 17년차 오마이뉴스 시민기자로서, 더 나은 사회를 위하여 제가 선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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