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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4화에서 이어집니다)

저녁 시간 늦게 공동체본부 사무실에 도착한다. 일과가 끝난 사무실에는 사무실 주인인 엔도 명예본부장만 남아있다.

"잘 다녀왔나? 아까 자네가 올린 글은 읽었네. 정말 이상한 일이더군."
"네, 그렇죠. 사람들이 많이 퍼다 날랐는지 모르겠어요. 일단 반응이 어떤지, 한번 봤으면 좋겠네요."

김원택은 인터넷에서 오후에 작성한 기사와 블로그를 확인한다.

"어? 이상한데요. 모두 삭제됐습니다."
"뭐라고? 어떻게 그런 일이?"

독자들의 댓글은 고사하고, 아예 기사와 글이 통째로 없어졌다.

"인터넷 포털 게시판과 블로그에 이런 일이 있을 수 있습니까?"
"음. 자네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나?"
"검열에 의한 임의 삭제요?"
"잠시 산보 좀 하지 않겠나?"

엔도는 김원택을 이끌고 사무실에서 가까운 도쿄대 캠퍼스로 향한다.

"역시 우려한대로구먼."
"무슨 말씀이십니까?"

"최근 정부 조직 내에 있는 우리 조직원을 만나서 들은 것이 실제로, 이렇게 빨리 벌어지리라고는 생각을 못 했네. 지금 우리 일본의 시계는 거꾸로 돌아가고 있어. 태평양전쟁 시대로. 그때는 정부에 대해 비판이라도 하면 바로 '불온분자'로 몰아 잡아갔다지. 사회 어디에든 경찰이나 비밀조직을 통해 감시하고, 통제하고. 지금 현재 그렇게 되고 있다는 게 정부 조직 내부 분위기라는 것이지.

자네가 오늘 가서 목격한 장면도 그렇고. 동북수용소라는 데 아무래도 국가안전보장법을 내세워서 쥐도 새도 모르게 체포해 간 사람들이 모여 있는 곳 같아. 혹시 교토대 실종 학생들도 거기에 있을지 모르겠네."

"아무리 그래도 대명천지에 그게 가능하겠습니까?"

"지금 대명천지인 것은 날씨 밖에 없어. 지금은 벌써 반쯤은 어두워진, 해가 지고 있는 상태라고 보면 될 거야, 칠흑 같은 어둠을 앞두고 있는. 우선 무엇보다도 언론 쪽 채널을 확보해야 하네. 요즘 도무지 모든 언론들이 입을 알아서 닫는지, 아니면 정부의 입김이 벌써 작용했는지, 너무 조용하잖아? 그러니 눈멀고, 귀먹은 시민들이 무슨 수로 일본이 미쳐가는 것을 알겠나?"

"네, 알겠습니다. 한 번 찾아보겠습니다."
"민주당 소속 하부조직과의 연계에 대한 진행 상황도 체크하고."
"네, 차질 없이 준비해 놓겠습니다."

김원택은 내일 날이 밝는 대로 우선 사무실에 도청 장치나 다른 감시 장치가 감춰지지 않았는지 꼭 확인해 봐야겠다고 다짐한다.

미키 심기가 불편하다. 한국대사관에 K의 동북수용소 구금 사실을 알렸지만 반응이 영 신통치 않다. 대사관은 현재 발등에 떨어진 체류민 철수와 재일동포의 귀환 문제로 여력이 없단다. 고작 일본 정부에 진상에 대한 자료를 요구한다는 게 대책의 전부다. K 나라 정부를 대표하는 한국대사관이 그런 정도니 일본 경찰청과 법무성의 반응은 말할 나위 없다. 국가안전보장법과 관련된 사항은 별도로 청원을 하든, 정식 재판을 청구하라는 똑같은 대답이다.

게다가 언론에 알릴 길도 녹록지 않다. 동북수용소의 존재와 수용소 운영이 불법적으로 의심된다는 팩트로 기획기사를 작성하겠다고 데스크에 요청했다가 거절당했다. 사실이 정확히 확인되지 않았으며, 기사에 필요한 인터뷰도 부족하다는 근거다.

하지만 그것은 핑계에 불과했다. 최근 들어 정부를 비판하거나 정치적으로 민감한 기사들은 자체적으로 '킬(kill)'되고 있다. 알아서 기는 것이다. 한국 영화에서 나옴직한 나쁜 언론 전형이 지금 일본에서 일어나고 있다. 

2015~2016년 화제가 됐던, 원작 만화를 영화로 만든 <내부자들>에서는 대한민국 여론을 움직이는 보수신문 유명 논설주간 이강희(백윤식)가 등장한다. '구악 기자' 스테레오타입이다. 정치인들을 추켜올리거나 밟아 쥐락펴락하고, 그들에게 필요한 돈과 폭력을 얻을 수 있는 재벌, 조폭을 이어준다. 언론인 탈을 쓰고, 언론 권력으로 자신의 이익을 위해 정치판을 좌지우지하는 가장 저급하지만 힘쓰는 언론인을 적나라하게 보여줬다는 평가다.

영화 <내부자들>에서 유력 보수언론사 논설주간 이강희(백윤식)는 언론 권력으로 정치인들을 좌우하며, 재벌과 '조폭'을 연결시키는 등 '구악(舊惡) 기자'의 전형을 보여줬다.
 영화 <내부자들>에서 유력 보수언론사 논설주간 이강희(백윤식)는 언론 권력으로 정치인들을 좌우하며, 재벌과 '조폭'을 연결시키는 등 '구악(舊惡) 기자'의 전형을 보여줬다.
ⓒ (주)쇼박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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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행이론처럼 지금 일본에서도 나쁜 언론인들이 여기저기에서 전 언론을 스멀스멀 장악해 나가고 있다는 얘기다.

미키는 오하라 검사가 떠올랐지만 접었다. 최초로 동북수용소에 대해 소식을 전해준, 익명이 반드시 필요한 취재원에게 인터뷰 요청은 가당치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어떻게든 기사를 살려서 K를 수용소에서 벗어나게 해야 하는 것 이외에 다른 것은 안중에도 없는 미키다.

그렇게 기를 쓰고 인터넷을 뒤져대다 한줄기 빛을 찾았다. 전일본공동체본부 도쿄지부장 김원택이 쓴 기사를 개인 블로그에 퍼다 놓은 것을 발견한 것이다. 자신이 아는 내용에다 더 진전된 몇몇 사실들이 담겨있어 더 소중했다. 바로 필자의 필명과 이메일 주소를 적는다. 죽을 뻔 했던 자신의 기사를 살릴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느낌에 안도한다. 그 순간 핸드폰이 진동한다. 못 보던 번호다. 안 받을까 하다가 혹시나 하고 받는다.

"네, 이토 미킵니다."
"안녕하세요. 저는 오하라 검사님 후배 고바야시 에이지라고 합니다. 오하라 검사님 부탁으로 전해드릴 게 있는데요."

방송사 1층에 있는 커피숍에 먼저 온 것은 고바야시다. 20대 중반, 생각보다 젊은 친구다. 그가 먼저 알아보고 인사한다.

"이토 기자님? 전화 드렸던 고바야십니다."
"아, 네. 처음 뵙겠습니다. 이토 미킵니다. 그렇지 않아도 오하라 검사님께 한 번 연락을 드리려고 했는데 잘 됐네요."
"저, 여기…."

작은 봉투를 내민다. 그 봉투에는 인터넷 사이트 주소, 그리고 아이디와 비밀번호가 적힌 메모지 한 장이 들어있다.

"이게 뭐죠?"
"보신 것처럼 클라우드 사이트의 아이디와 비밀번호입니다."
"그런데 왜 오하라 검사님께서 이것을 제게 전달하라고 부탁하셨을까? 직접 전화해서 말씀하셔도 될 것을요?"
"그게…. 지금 선배님이 직접 전달할 상황이 안 돼서요."
"어디 출장이라도 가셨나요?"
"아니오. 지금 병원에 계십니다. 사고가 났습니다."
"네? 무슨 사곤데요? 교통사고라도 났나요? 혹시 많이 다치셨나요?"
"그게…. 가스 폭발 사고가 나서 지금 중환자실에 있어요."
"어머나, 어쩐 일이래요? 상태는 어때요? 심각한 건 아니죠?"
"지금 의식이 없어요. 의사 선생들은 앞으로 경과를 봐야 된다고 하대요."
"이를 어쩌나…. 한 번 찾아가 봐야겠네요. 언제쯤이 괜찮을까요?"
"상황을 좀 지켜보시는 게 나을 겁니다."
"근데, 오하라 검사님이 미리 이걸 부탁하신 건가요?"
"네, 미리 제게 말씀하셨어요. 마치 자신의 사고를 예감했던 것처럼."

오하라 검사는 미키에게 K가 어디에 있는지를 알려준 사람이다. 그리고 검찰과 연구단을 오가며 고급 정보를 취급한 인물이다. 미키 직업병이 도진다. 의심한다. 우연한 사고였을까, 아니면 누군가 사고처럼 의도적으로 꾸민 나쁜 짓이었을까. 그렇다면 미키에게도 위험이 언제든 닥칠 수 있다는 생각에 몸서리를 친다.

사무실로 돌아온 미키는 주섬주섬 소지품과 함께 노트북을 챙겨 퇴근한다. 미키는 도쿄대 혼고캠퍼스 근처에 있는 카페로 향한다. 대학생들이 많고 무선 인터넷이 가능한 곳을 일부러 찾았다. 인터넷에서 클라우드 사이트를 찾아 아이디와 비밀번호를 입력한다. 문서와 사진은 물론 동영상까지 다양한 자료가 펼쳐진다. 친절하게도 오하라는 주제별로, 예를 들면 연구단 극비 사항, 다케우치 실장 개인 자료, 보수 극우 전체 네트워크 등으로 나눠서 파일을 정리하는 세심함을 보였다.

가장 관심이 가는 것은 연구단 극비 사항에 대한 내용이다. 전체 개요는 물론 현재 진행되고 있는 내용, 향후 로드맵이 작성돼 있다. 일단 개괄적으로 살핀다. 그런데도 하나씩 열어볼 때마다 미키는 경악한다. 그리고 소름이 끼친다. 학질에 시달리는 사람처럼 오한이 느껴진다. 전율하듯 몸은 떨린다. 거의 경련하는 수준이다. 그 내용이 너무나도 극악하고 치밀하기 때문이다.

다음으로 열어본 항목은 미키의 과거 정혼자였던 다케우치의 개인 자료 파일이다. 차라리 열어보지 않았으면 좋았을 것이다. 미키는 다케우치에 대해 단순히 좋지 않다는 느낌, 조금 독선적이고 심하게 이기적이라는 느낌 이외에 다른 악감정은 없었다. 하지만 개인 자료를 보고 나서 다케우치는 극히 혐오하는 대상으로 굳혀지고 말았다.

자신의 유학시절 살인 교사에 대한 대목은 섬뜩하기까지 하다. 그리고 그의 성장 과정과 정신적 트라우마 대목에서는 연민이, 남자와 여자를 가리지 않는 섹스 중독적인 양성애에 관해서는 염증이 교차한다.

미키는 졸지에 일반 사람들의 눈으로는 볼 수 없는 흉악한 악마를 본 소녀가 돼 버렸다. 남들에게 이 괴물에 대해 이야기를 해주더라도 사람들은 믿지 않을 것이다. 오히려 미키를 정신 나간 사람으로 여길 것만 같다.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라는 사실을 알지만, 두려움에 사람들에게 말 못한다. 그러다 애꿎은 대나무 숲에다가 그 심정을 쏟아 붓는 이발사와 같은 처지다.

하지만 미키의 직업은 이발사가 아닌 기자다. 그래서 더 문제다. 요즘 같은 상황에서 이런 무시무시한 얘기를 보도해 줄 방송사는 물론 신문사도 없을 것이 당연하다. 하지만 궁하면 통한다. 미키는 일본이라는 사회의 속성을, 어쩌면 일본과 일본인들이 태생적으로 가졌을지도 모르는 열등의식을 이용하기로 한다.

수용소의 가을은 이르게 찾아온다. 산골짜기에 숨어 있어 더욱 그렇다. 이슬은 차갑고 하늘은 새파랗다. 불과 일주일 전까지만 해도 열대야와 비슷한 밤으로 잠 못 이뤘다. 하지만 지금은 아침과 저녁 선선하다는 느낌이다.

이렇게 청명한 초가을 날씨를 K는 느끼지 못한다. 어둠 속 독방에 갇혔기 때문이다. 수감자들에게 단식을 선동했다는 이유에서다. 단식은 어쩌면 자연발생적인 것이었다. 방호복도 입지 않은 채 방사능 오염 물질이 묻은 의류나 장비들을 다루는 일은 죽음의 작업이다. 그걸 눈치 챈 사람들은 단식을 통해 작업 거부로 맞선 것이다.

말 많은 '1358'이 사실 주동자였다. K에게 탈출하자고 했던 그는 집요했다.

"이봐, '1901'. 나는 반드시 여기에서 나가서 오사카에 있는 애인하고 결혼해야 돼. 애인도 없나? 없으면 내가 나가서 예쁜 여자 소개해줄게."

"어떻게 나가요? 총을 든 감시원들이 몇 명인데."

"그러니까 제발 방법 좀 생각해 보라고. 나는 형이 1년도 안 남았어. 그런데 이렇게 방사능 범벅인 곳에서 작업을 하면 어떡 하냐고. 심하면 죽든가, 아니면 운이 좋아 나가서라도 암에 걸리는 것 아니냐고? 탈출하자, 응?"

그런 그에게 K가 해줄 수 있는 것은 없다. 설령 이 포로수용소 같은 곳을 탈출한다고 해도 주변이 온통 산이다. 경비견이나 수색견한테 물리고 다시 잡혀올 것이 뻔하다.

"이러다가 내가 여기서 나가기도 전에 속에서 열불 나 죽게 생겼네."

'1358'의 징징거리는 소리는 이곳 수용소 모든 사람들의 마음이다. 그 와중에도 점심 식사 시간을 알리는 벨 소리가 들린다. 수용소에서 그나마 즐거운 시간이다. 하지만 '1358'은 식사를 거부한다.

"생각 없어. 밥 안 먹고 차라리 죽어버려야 여기서 빠져나가지."

어쩌면 좋은 수다. 단식을 하게 되면, 그것도 한꺼번에 집단 단식을 하게 되면, 뭔가 변화를 일으킬 가능성은 있다. 마하트마 간디가 아니라 해도, 그 확률이 적다고 해도 이곳 수용소에서 해볼 수 있는 유일한 항거수단이다.

1980년과 1981년 두 차례에 걸쳐 벌어진 이른바 '아일랜드 단식투쟁(Irish hunger strike)'이 떠오른다. 북아일랜드 분쟁, 즉 영국과 아일랜드 공화주의자들이 극렬하게 싸우던 1980년 10월, 1981년 1월 두 번 연속 일어난 사건이다. 요약하자면 북아일랜드 감옥에 수감되어 있던 아일랜드 공화주의자들이 자신들을 일반 죄수가 아닌 정치범으로 대우해 줄 것을 요구하며 벌인 단식투쟁이다.

수십 명이 참가한 1차 단식투쟁에서 사망자가 나올까 우려한 영국 측은 수감자들의 요구를 들어주는 듯했다. 그러나 그것은 잠시 불만을 잠재우려는 꼼수였다. 그래서 메이즈 교도소에서 2차 단식투쟁이 시작됐고, 당시 주동자였던 아일랜드공화국군(IRA, Irish Republican Army) 전 지휘관 보비 샌즈가 단식 66일 만에 사망하고 말았다. 그 이후로도 9명이 잇따라 숨졌다. 그 열 명의 목숨 값을 밑천 삼아 북아일랜드와 아일랜드공화국 통합을 추구하는 아일랜드 정당인 신페인(Sinn Fein)당은 20여 년에 걸쳐 거대 정당으로 성장하게 됐다.

영국 흑인 감독 스티브 맥퀸은 2008년 영화 <헝거(Hunger)>에서 보비 샌즈(마이클 패스벤더)의 단식투쟁을 그리며, 거장으로 우뚝 섰다. 하지만 결국 이들의 죽음도 북아일랜드의 영국으로부터 독립이나 정치적 지위는 얻지 못했다. 절반의 성공인 우울한 단식투쟁이었던 것이다.

스티브 맥퀸 감독 영화 '헝거'는 1980~1981년 두 차례에 걸친 '아일랜드 단식투쟁'에서 66일간 단식하다 숨진 전 아일랜드공화국군(IRA) 지휘관 보비 샌즈(마이클 패스벤더)의 이야기를 그렸다.
 스티브 맥퀸 감독 영화 '헝거'는 1980~1981년 두 차례에 걸친 '아일랜드 단식투쟁'에서 66일간 단식하다 숨진 전 아일랜드공화국군(IRA) 지휘관 보비 샌즈(마이클 패스벤더)의 이야기를 그렸다.
ⓒ 영화 '헝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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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그:#불온분자, #구악 기자, #영화 '내부자들', #아일랜드 단식투쟁, #영화 '헝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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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a Bella Vita! 인생은 아름답다며, 글쓰기로 먹고 살기 위해 애쓰는 여러분의 이웃입니다. 세계일보, 머니투데이, 한경비즈니스, 이코노미조선 등에서 기자로 일했습니다. 2019년 '아산문학' 공모전에서 '그는 제바닷타였을까'라는 단편소설로 대상을 받고, 전업작가로 살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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