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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썰(說) 하나] "하늘이 왜 감동을?"

가끔 '어른들'의 정신적 균열을 발견할 때가 있습니다. 어른들은 일찍부터 저희 청년들을 훈육했고, 공을 들여 청년들의 세계관을 조립했습니다. 또한 이 땅은 자유(?)로운 시장경제 사회이며, 그 룰에 따라야 한다고 가르쳤습니다. 자유시장경제는 '효율적 경쟁'을 요구합니다. 연대·사랑·사회적 정의감은 경쟁을 발목 잡는 감성적 낭만일 뿐이라며 배제되고, 개인주의·냉소·경쟁력을 대신 이식합니다.

또한 '도구적 합리성'을 체득시킵니다. 도구적 합리성이란, '효율성을 잣대로 자신/타인 또는 환경을 도구처럼 장악하는 능력'입니다. 이 능력을 체득해야, 인적·물적 자원의 투입량(Input) 대비 산출량(Output)을 높여 '노동생산성'을 극대화할 수 있다는 겁니다. 어른들이 세운 논리의 성곽은 촘촘해 보였습니다.

하지만 균열은 있습니다. 지난 21일 자 <동아일보> 기사 "하늘이 감동할 만큼 노력해봤나요?... 흙수저 탓만 하는 세대에 일침"이 대표적입니다. 새삼 '감동'이라니, 그것도 '하늘'이 말입니다. 애니미즘(무생물계에도 영혼이 있다고 믿는 세계관)은, 선사 시대에 유행한 세계관이라고 역사 시간에 배우지들 않았나요(미아리 점집에는 기복 신앙으로 남아있지만요).

한 번 생각해보자. 고려대 영문학사-펜실베이니아대 와튼스쿨 경영학 석사(MBA) 엘리트 코스를 거친 뒤, "잘나가는 삼성맨"이었다가 미국 대기업의 수석부사장까지 될 정도로 도구적 합리성을 충실히 체득한 사람. 그런 사람이 매우 진지한 표정으로 두 주먹을 불끈쥐고 '하늘 타령'을 하는 장면을. 이 결합이 수상하게 느껴지지 않는가.
▲ 피터 황씨 한 번 생각해보자. 고려대 영문학사-펜실베이니아대 와튼스쿨 경영학 석사(MBA) 엘리트 코스를 거친 뒤, "잘나가는 삼성맨"이었다가 미국 대기업의 수석부사장까지 될 정도로 도구적 합리성을 충실히 체득한 사람. 그런 사람이 매우 진지한 표정으로 두 주먹을 불끈쥐고 '하늘 타령'을 하는 장면을. 이 결합이 수상하게 느껴지지 않는가.
ⓒ 페이스북 갈무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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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일보>는 이 '미국 취업 멘토링 워크숍'(청년드림 캠프 주최) 멘토가 "뱅크오브아메리카 메릴린치 자산관리 부문 수석부사장"이라고 했습니다. 그 자리에 앉으려면 얼마나 도구적 합리성을 체득해야 할까요. 그런데 흥미롭게도, 이 멘토는 또 "월스트리트 진출을 꿈꾸는 한국 유학생들 사이에선 '성공 신화의 주인공'이자 대표적 롤모델"이라고 합니다.

신화(神話)는 신들의 이야기입니다. CEO와 신(神)이라니. 경제적 기호와 종교적 기호가 '부지불식 간에' 교차하는 이 지점. 저는 여기서 멘토 담론의 실체, 즉 '정신적 균열'을 발견합니다. "합리성을 강요하는 모든 조직은 비합리성에 기생한다"는 웹툰 <송곳>의 명제는, 조직을 사회 단위로 확장해봐도 참입니다. 종교의 정신은 이성보다는 감성에 가깝기 때문입니다(경외, 죽음에 대한 두려움 등).

그랬던 겁니다. 결국 합리를 표방하는, 자유시장경제도 감성에 호소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감성은 사람을 노동의욕과 동기로 채워주는 에너지니까요. <동아일보>는 '헬조선 담론' 중 하나인 '흙수저론'을 콕 집어 반박하는 만큼, 대안도 하늘이 감동할 수준의 '열정'으로 취사선택합니다. 하지만 하늘은 우리가 노력하든 말든 감동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그것은 과연 누구의 감동인지가 수상합니다.

얼마나 노오오오력해야 감동할지도 미지수인 게 요즘 현실이므로, 확률적으로도 무모하죠(아르스프락시아 연구원 김학준씨는 이 오자를 헛되다는 의미에서, '오'(誤)라고도 풀이합니다). 그런데 왜 '어른들'은 이렇게까지 구차하게, 청년들을 기복 신앙적 감성으로 획일화시키려 할까요. 그 자리를 이제 좀 연대·사랑·사회적 정의감이 대신하면 안 될까요.

[썰(說) 둘] 부디 헬조선을 '노잼' 만들지 마세요

언어가 도구라면, '헬조선' 담론은 2015년 청년들이 생산한 도구입니다. 어른들의 '노력→성취'라는 속 편한 해결책이 청년들을 배반하면서, 어른들이 애써 감춰왔던 계급과 구조적 모순이 폭로됐습니다. 물론 진보 진영의 기대를 배반한 지점도 있습니다. 가령 '죽창'은 꼭 구조적 모순에 대한 분노뿐 아니라, 운동권에 대한 희화화의 맥락에서도 쓰입니다.

헬조선의 "진정한 멘탈리티"(관련 기사: 김학준 "아, 숨막혀" <월간 틀> 12월호)란 존재하지 않고, 해야 하는 것도 아닙니다. 헬조선을 외치는 '청년'은 동질한 집단이 아니며, 동질해야 하는 것도 아니기 때문이죠. 저는 헬조선 담론으로 기존 청년세대론에 좀 '균열'을 내고 싶은 '청년'이었습니다. '달관 세대', 'N포 세대' 등. 어른의 관점을 투과한 '무기력한 청년' 상이 얼마나 많습니까. 표현만 그때그때 바꿔 등장했을 뿐입니다.

정말 청년들이 죄다 무기력한 게 아니라, 어른들이 자꾸 이미지를 취사선택하고 재생산함으로써 더 그렇게 만드는 건 아닐까요. 저는 저처럼 분노하는 청년도 있다고 '생존신고'를 하고 싶었고, 비슷한 처지인 청년들의 생사도 확인하고 싶었습니다. 그리고 실제로 확인했습니다. 트위터에서 '급성' 울화병 증세를 보이는 청년들, 이들은 부조리에 분노하지만 일상 정치에는 '답답한 장애물'에 발목 잡혀 진출하지 못 했습니다(관련 기사: '헬조선' 최후의 탈출구, 죽창은 분풀이에 불과할까).

헤븐조선으로 가는 다리는 누가 끊었을까.
 헤븐조선으로 가는 다리는 누가 끊었을까.
ⓒ pixab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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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애물이란 무엇일까요. 현재 교육과 정치는 청년들이 '자신의' 꿈을 못 꾸게 막습니다. 오히려 '엘리트와 노인들'의 꿈을 대리 실현하도록 하죠. 정치란 상호의사소통을 전제로 합니다. 참여자가 목소리를 제대로 내려면, 비판적 사고력과 창의성·표현능력이 필요합니다. 참여자가 지닌 정치철학이 '관념'에만 머물지 않고, 실천으로 이어지려면 또 작은 성취부터 이뤄나갈 '공간'도 필요합니다.

하지만 한국의 중등교육에는 여전히 철학·작문 교과조차도 보편화되지 못 했고, 정치권에는 연공서열식 습속이 남아 있습니다. 거대 양당의 '청년' 기준은 아직도 만 45세라지요? '최소한의 조건은 만들어 놓고 보자' '청년들이 멘토나 쫓아다니며 남의 꿈을 자기에게 대입하게 할 게 아니라, 자기 꿈을 탐색할 객관적 조건에 대해서 더 많이 말하자' 이거 상식적인 주장 아닙니까. 경제 의제와 교육 의제는 충돌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후자의 해소는 전자의 해소를 돕습니다. 다수의 참여와 격려를 이끌어내기 때문입니다. 이런 문제를 더 많이 말 하셔야 할 분들은 지식인들이지요. 하지만 지난 6월 '헬조선'이 처음 언론에 등장한 이후, 386 지식인들이 보여준 모습은 실망스러웠습니다. 헬조선 담론을 '노잼'(재미없음)으로 만들뿐이었습니다. 무언가 '청년스러운' 신조어들의 등장에, 어른들은 호기심 어린 곁눈질을 했습니다. 그러다 슬그머니 다가와 품평 한마디씩 했고, 결국 바글바글 몰려와 이 도구 하나씩을 집어 어색하게 휘둘렀습니다.

그러면서 자신이 얼마나 이 도구를 능숙히 다루는지, 즉 얼마나 '청년스러운' 맥락을 잘 이해하는지 경쟁적으로 과시하는 게 아니겠습니까. 언론의 오피니언 칸을 가득 채운, 기존 청년세대론과 비슷비슷한 주장들. 또 다시 '20대 개새끼론'의 완곡한 반복이었습니다(말만 헬조선을 떠들지, 행동은 안 하고 징징댄다). 언론 지면을 빌려 섣부른 훈계, 단순한 인과관계의 대입... 이제는 사양합니다.

어른이란 말은, 어른과 '어른이 아닌 사람'을 구별 짓는 데서 자주 쓰입니다. 어른은 무언가 성숙한 존재고, '어른이 아닌 사람'(어린이, 청소년, 청년)은 미숙하므로 어른이 좌지우지해도 좋다는 우월감으로 변질하기 십상입니다. 하지만 근거 없는 우월감을 지닌 '어른들'은, 실은 오히려 청년들에게 현실 인식을 배워야 할 때가 많다는 점.

이러한 점을 이제 보여드리고자 합니다. 물론, 청년이 동질적이지 않은 만큼 어른들도 동질적이지 않습니다. 그래서 여기서 말하는 '어른들'이란, 아직 '꼰대'로 머무르는 분들만을 말합니다. 이 연재는 '탈 꼰대'로 인도하는 여정입니다. 함께하시지 않겠습니까.


태그:#헤븐조선, #헬조선, #꼰대, #노오력, #노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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