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맥베스>의 한 장면

영화 <맥베스>의 초반만 하더라도, 이 둘은 어두운 녹색의 옷을 입고 등장한다. ⓒ 판씨네마㈜


셰익스피어의 비극 <맥베스>가 영화로 새롭게 태어났다. 미국과 영국, 프랑스 합작영화다. 저스틴 커젤 감독이 메가폰을 잡았다. 잘 만든 연극을 스크린에 옮긴 듯 깔끔하다. 감독의 연출과 배우들의 연기도 뛰어나다.

<맥베스>는 일단 원작이 탄탄하다. 1606년에 집필되었다고 추정되는 <맥베스>를 읽어보면 셰익스피어가 왜 "인도와도 바꾸지 않겠다"는 정도의 대문호인가를 단번에 알 수 있다. 셰익스피어는 단순한 소설가가 아니다. 그는 인간의 내면에 대한 탁월한 통찰력을 가진 천재적인 심리학자를 방불케 한다.

세 마녀의 예언, 파멸이 시작됐다

스코틀랜드 덩컨 왕의 사촌이자 글래미스의 영주인 맥베스(마이클 파스벤더 분)와 그의 아내 레이디 맥베스(마리옹 꼬띠아르 분)가 주인공이다. 맥베스는 코오더 영주인 맥돈월드의 반란을 진압하고 돌아오던 길에 3명의 마녀를 만난다.

"맥베스! 그대는 장차 코오더의 영주가 되고, 이 나라의 왕이 될 것이요!"

마녀들이 그에게 들려준 예언은 평온했던 맥베스의 심리를 사정없이 흔들어 놓는다. 종국에는 탄탄대로를 걷던 충신 맥베스의 모든 것을 송두리째 앗아가 버린다.

맥베스는 원래 충직하고 용맹하여 덩컨 왕의 신뢰를 한몸에 받던 인물이다. 사회적인 평판과 명예를 매우 중요하게 생각하며, 자신의 분수를 잘 알고 처신하던 사람이다. 분석심리학자 칼 융의 용어를 빌어 말하자면 사회적 외적 인격인 페르조나(persona)에 집착하는 유형이다. 페르조나는 사람들이 조직이나 집단생활을 하는 과정에서 자연적으로 터득해 나가는 사회적인 역할을 말한다.

그랬던 맥베스가 마녀의 예언을 듣고부터 과분하게도 왕이 되겠다고 결심한다. 마음의 무게중심을 잡아야 할 맥베스의 자아(ego)가 마녀에게 홀려 심리적 카오스 상태가 되어버렸다. 자아가 지나치게 팽창되고 통제력을 잃었는데 설상가상으로 그림자, 즉 마음 깊숙이 똬리를 틀고 있던 '악'이 고개를 쳐들었다. 사촌 덩컨을 죽여서라도 왕위를 빼앗겠다는 그릇된 욕망이 맥베스의 마음 한구석에 짙은 그림자를 드리웠다. 맥베스는 실제로 덩컨 왕을 암살하여 왕위를 찬탈하기에 이른다.

 영화 <맥베스>의 한 장면

권력에 집착했던 이들. 이들의 마음 속에는 선과 악이 모두 공존하고 있었다. ⓒ 판씨네마㈜


물론 맥베스가 이렇게 된 것은 숲 속에서 만난 세 마녀의 탓이 크다. 어떤 면에서는 마녀보다 냉혹하고 잔인한 아내 레이디 맥베스의 공로가 더 크다고 할 수도 있다. 레이디 맥베스는 이렇게 말한다.

"나는 내 맹세를 지키기 위해서 방긋 웃으며 젖꼭지를 빠는 갓난애를 집어 던져 머리통을 부숴버릴 수도 있다오!"

그렇다고 맥베스가 면죄부를 받을 수 있을까? 맥베스의 마음에 악한 요소가 전혀 없었을까? 아니다. 마녀나 아내의 패륜적인 말에 솔깃해지는 심리적인 요소가 이미 맥베스의 마음에 잠복해 있었다. 그런 맥락에서 3명의 마녀나 레이디 맥베스는 제3자가 아니다. 그녀들은 맥베스가 수용하지 못하고 억압하여 무의식의 한쪽 구석으로 깊이 밀어 넣었던 자신의 사악한 욕망을 의인화했다고 볼 수도 있다. 융 심리학에서 말하는 아니마(anima)의 나쁜 측면이다.

아니마는 남성성 속의 여성적인 측면이다. 영화에서 맥베스의 아니마는 덩컨 왕을 살해하고 난 뒤에 끊임없이 불안해하고, 분노하며 죄의식을 느끼는 것으로 표현된다. 문제는 맥베스의 아니마가 레이디 맥베스에 억압을 당한다는 점이다. 정상적인 사람이라면 자연스럽게 표출하고 해소해야 할 불안과 분노, 죄의식을 레이디 맥베스는 맥베스의 남자답지 못한 유약함으로만 몰아간다. 결국 맥베스는 자신의 아니마와 적절하게 대면하지 못하고 아니마와의 관계도 회복하지 못했다.

융 심리학은 사람의 마음에 선과 악이 공존한다고 본다. 선과 악이라는 두 축은 한 인간의 마음에서 시계추처럼 작용하면서 균형을 유지한다. 또한 융 심리학은 의식과 무의식의 조화와 균형도 특별히 중시한다. 맥베스처럼 사회적인 외적 인격에만 치우쳐서 내적 인격이나 무의식을 잘 돌보지 않으면 문제가 생긴다. 내적인 평정심을 유지하고 있을 때는 문제가 없다. 그러나 자아는 분수를 모르고 과도하게 팽창되었지, 외적 인격인 페르조나는 기존의 충신이 아니라 왕의 페르조나에 지나치게 집착하지, 무의식 속의 그림자나 아니마와 대면하려는 시도는커녕 아니마와 그림자의 존재조차도 잘 모른다. 사달이 날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결과적으로 맥베스의 마음에 짙게 드리운 그림자와 아니마의 사악한 측면이 합세하여 맥베스의 의식의 중심인 자아를 사정없이 공격한다. 충신 맥베스가 덩컨 왕에게 반란을 일으킨 것처럼, 맥베스 내부의 다른 심리 요소가 의식의 중심인 자아에게 반란을 일으킨 것이다. 맥베스 부부의 요란한 반란은 얼마 못 가서 레이디 맥베스의 자살과 맥베스의 죽음으로 허망하게 끝나고 만다.

두 사람의 주도로 시작된 스코틀랜드 왕국의 반란은 근본적으로 맥베스 부부가 자신들의 내면에서 일어난 반란에 근본적으로 허물어져 내리면서 이미 주저앉았다고 볼 수 있다. 물론 외면적으로는 맥베스의 폭정에 못 이긴 민중의 민심이반과 덩컨 왕의 아들 말콤 왕자를 위시한 왕권 복위세력의 반격에 의해 맥베스 정권이 무너지는 형태를 취하지만 말이다. 

색채의 활용, 선과 악의 이미지를 모두 안다

 영화 <맥베스>의 한 장면

맥베스 부부의 의상이 초록색에서 흰색으로 바뀐다. 초록색의 의미가 이중적이듯, 흰색도 이중적인 의미의 색채이다. ⓒ 판씨네마㈜


한편 셰익스피어의 <맥베스>는 영화나 연극, 오페라, 그림 등의 장르에서 다양하게 표현됐다. 그런데 저스틴 커젤 감독의 영화에서 맥베스 부부의 드레스는 왜 초록색이었을까?

예전에 네덜란드 출신의 세계적인 무대 의상 디자이너인 리언 베커르는 자신이 관여한 한 연극에서 레이디 맥베스의 옷을 빨간색으로 디자인한 적이 있다. 당시 리언 베커르는 이렇게 말했다.

"연극 <레이디 맥베스>는 셰익스피어의 <맥베스>를 맥베스 아내의 죄의식에 천착해 재해석한 작품이죠. 맥베스 장군의 아내는 권력욕에 불타 맥베스를 사주하는 인물입니다. 극 자체가 드라마틱한 구조이고, 내용 중 피가 나오기 때문에 최대한 강렬한 명도와 채도의 빨강을 택했습니다."

그런데 저스틴 커젤 감독의 영화에서는 맥베스 부부의 옷이 모두 초록색으로 나온다. 원래 초록색은 신록의 나무처럼 생명, 자연, 희망 등 긍정적인 메시지를 나타낸다. 반면 미숙, 방종, 불행, 부패 등의 부정적인 이미지도 갖고 있다. 레이디 맥베스가 처음에는 남편인 맥베스보다 더 사악하고 강렬한 인상을 풍기며 맥베스의 살인과 왕위 찬탈을 배후에서 조종한다는 측면에서, 또 권력에 대한 욕망과 그 실현을 위해 남편의 손에 피를 묻히게 사주한다는 점에서 빨간색이 더 적절할 수도 있다. 물론 덩컨 왕을 살해하며 손에 피를 묻힌 맥베스도 당연히 빨간색 옷을 입어야할 것이다. 

그러나 영화 후반부에서 레이디 맥베스는 초반부의 맥베스 이상으로 양심의 가책과 불안, 공포에 떨며 몽유병에 걸려 잠을 못 이룬다. 또 손에 묻은 피를 닦아내지 않으면 안 된다는 강박증에 걸려 고생하다가 끝내 자살했다. 셰익스피어의 원작과는 달리 영화에서는 레이디 맥베스의 구체적인 죽음의 원인과 과정을 과감하게 생략하고 다소 암시적으로 처리한다. 이런 사실을 고려하면 선과 악이라는 긍정과 부정의 상반된 이미지를 포괄하는 초록색 옷을 두 사람 모두에게 입힌 것은 적절한 선택이었다고 본다. 

1976년에 클라우디오 아바도가 지휘하고 피에로 카푸칠리(맥베스 역), 셜리 버렛(레이디 맥베스), 맥더프(플라시도 도밍고) 등이 출연한 오페라에서도 맥베스 부부는 초록색 드레스에 빨간 망토를 걸치고 있다. 또한 1889년 화가 존 싱어 사전트가 그린 '맥베스 부인으로 분한 엘렌 테리'라는 그림에는 레이디 맥베스가 초록색 옷을 입고 있다.

하지만 저스틴 커젤의 영화에서는 맥베스 부부가 덩컨 왕을 시해하기까지 입고 있었던 옷과, 왕위찬탈에 성공하여 왕과 왕비의 직위를 얻었을 때의 옷을 뚜렷하게 구분하고 있다. 즉 왕위찬탈 전, 맥베스 부부는 초록색 옷을 입고 있다. 그러나 왕위찬탈 후에는 둘 다 하얀색 옷을 입고 있다. 왜 그랬을까?

초록색과 마찬가지로 하얀색에도 이중적인 의미가 있다. 하얀색은 긍정적으로는 순결함, 순수함과 희망을 상징한다. 부정적으로는 검은색처럼 죽음을 상징할 때도 있다. 생명의 상징인 빨간 피가 모두 빠져나간 죽은 사람의 얼굴이 창백한 것처럼 말이다. 레이디 맥베스는 왕비가 된 후 줄곧 하얀색 옷을 입는다. 마녀가 없는 자리를 메우며, 마녀보다 더 사악한 역할을 자임했던 레이디 멕베스는 살아있지만 이미 살아있는 목숨이 아니라는 의미를 부각시키려는 의도로 읽힌다.

 영화 <맥베스>의 한 장면

영화 <맥베스>의 한 장면. 레이디 맥베스의 눈 화장에서도 그녀의 불안정한 심리 상태를 엿볼 수 있다. ⓒ 판씨네마㈜


색채의 상징성에 대한 활용은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색채를 배합하면 심리적인 의미가 달라지거나 깊어질 수 있다. 왕비가 된 후의 레이디 맥베스의 눈 화장을 보라. 두 눈의 중심선을 잇는 직선을 중심으로 양쪽 측면 귓가 쪽으로 두꺼운 초록색의 눈 화장을 하고 있다. 하얀색의 단일한 색채상징만으로는 레이디 맥베스의 이중성과 심리적인 혼란을 그려내기가 쉽지 않았다는 것을 보여준다.   

맥베스도 마찬가지다. 그는 하얀 옷 위에 빨간 망토를 걸친다. 극도의 불안과 의심으로 거의 광기를 드러내고 있으므로 하얀색 단일 색상만의 옷을 입는 것으로는 그의 복합적인 심리를 그려내기에는 충분치 않다고 본 것 같다. 맥베스도 자신의 부인처럼 살아 있어도 살아있는 게 아니라는 점에서 하얀색 옷은 적절하다. 저스틴 커젤 감독은 아내가 죽고 나서도 마녀의 예언에 사로잡혀 광기 어린 분노와 핏빛 살의를 끝내 버리지 못하는 맥베스의 모습을 빨간색 망토의 상징성을 통해 보여준다.     
   
이것은 1957년 구로사와 아키라 감독이 맥베스를 번안하여 만든 영화 <거미집의 성>의 분장과 뚜렷이 구별된다. 구로사와 아키라 감독은 영화에서 시종일관 하얀색 상징을 밀고 나간다. 레이디 맥베스에 해당하는 영주의 아내 야마다 이스즈는 창백할 정도로 하얀 분칠을 하고 하얀 옷을 입고 나온다. 구로사와 아키라의 번안 영화와 상대적으로 원작에 충실한 저스틴 커젤 감독의 영화를 동일선상에 놓고 비교할 필요는 없겠지만, 그래도 굳이 점수를 매기라면 나는 후자의 손을 들어주고 싶다.    

○ 편집ㅣ이언혁 기자


덧붙이는 글 이 기사는 김진국 시민기자의 페이스북에도 함께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맥베스 저스틴 커젤 마이클 파스벤더 마리옹 꼬띠아르 심리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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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평론가 (심리학자. 의학자) 고려대 인문 예술과정 주임교수 역임. 융합심리학연구소장(현). 고려대 민족문화연구원 교수(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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