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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운동가 우당(友堂) 이회영(李會榮)의 손자이자 대한민국 임시정부 기념관건립추진위원장인 이종찬 전 국정원장과 임정기념관 건립과 임정 법통에 대해 나눈 역사 인터뷰를 2차례에 나눠 싣는다. - 기자 말

우당기념관에 걸린 사진들. 독립운동에 목숨과 재산을 바친 우당을 비롯한 여섯 형제가 나와 있다.
 우당기념관에 걸린 사진들. 독립운동에 목숨과 재산을 바친 우당을 비롯한 여섯 형제가 나와 있다.
ⓒ 조호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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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게 나라인가!"

2015년 12월. 세월호 희생자 부모의 피눈물은 동거차도에 유폐됐고, 생존의 벼랑에 몰린 노동자와 농민의 분노는 테러행위로 규정됐고, 그 울부짖음은 소요죄로 뒤집어씌울 기세다.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법통과 4.19 민주이념을 계승한 헌법이 친일·반민족 권력에 유린당하는데도 제1 야당은 권력다툼으로 암울한 시대를 부채질하고 있다. 일제 치하, 독재 시절이나 지금이나 친일·반민족 세력은 승승장구다.

그래도 자학하진 말자. 민족의 힘으로 해방을 맞지 못한 원죄다. 나라가 분단된 지 70년. 친일·반민족 세력이 역사의 물줄기를 거꾸로 돌리고, 공동체 사회는 파괴되어 무한경쟁과 승자독식의 비인간화로 메말라가는 땅이지만 희망이 없는 것처럼 절망하진 말아야 한다. 망국의 시대에도 목숨과 재산을 바치며 조국과 민족을 위해 싸운 애국선열의 피가 역사에 서려 있으니 식어버린 심장에 다시 불을 붙여야 한다.

독립운동의 큰 빛, 우당 가문이 있었다

앞줄 왼쪽부터 조완구, 이동녕, 이시영 뒷줄 송병조, 김구, 조성환, 차리석
 앞줄 왼쪽부터 조완구, 이동녕, 이시영 뒷줄 송병조, 김구, 조성환, 차리석
ⓒ 우당기념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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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리대신 이완용을 비롯한 매국노 가문들은 일제에 부역했다. 반면 우당(友堂) 이회영(1867년~1932년) 가문은 항일투쟁의 길을 선택했다. 우당은 조선조 이항복의 10대손이자 10명의 정승을 배출한 명문 가문의 자손으로 이조판서와 우찬성(부총리급)을 지낸 이유승(1835~1906)의 넷째 아들이다. 이완용을 비롯한 매국노들의 부귀영화가 우당의 눈에는 짐승의 삶으로 보였다.

"지금 한일 강제병합의 괴변으로 인하여 한반도 산하가 왜적의 것이 되고 말았다. 우리 형제가 당당한 명문 호족으로서 차라리 대의가 있는 곳에 죽을지언정 왜적 치하에서 노예가 되어 생명을 구차히 도모한다면 어찌 짐승과 다르겠는가? (항일 투쟁하는 것이) 대한 민족 된 신분이요, 또 왜적과 혈투하시던 백사(白沙, 이항복) 공의 후손된 도리라고 생각한다."

우당은 위로 세 분의 형과 아래로 두 명의 동생 등 모두 다섯 형제에게 항일투쟁의 대의를 이렇게 밝혔다. 만주로 망명하자는 우당의 제안에 흔쾌히 찬동하면서 여섯 형제 모두가 항일투쟁을 전개했다. 가문에겐 고통의 역사였지만 민족에게 자랑스러운 역사다. 세계 민족해방운동사에서 우당 가문의 투쟁과 헌신은 유래를 찾기 힘들다. 월남 이상재는 우당 일가의 망명 소식에 이처럼 말하면서 해방이 되면 우당 가문에 빚을 갚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6형제의 절의는 참으로 백세청풍(百世淸風)이 될 것이니 우리 동포의 가장 좋은 모범이 되리라."
"우리 민족은 우당 가문에 큰 빚을 졌다. 해방이 되면 반드시 보상해야 한다."

이종찬 전 국정원장이 할아버지인 우당을 가리키고 있다.
 이종찬 전 국정원장이 할아버지인 우당을 가리키고 있다.
ⓒ 조호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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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당 형제는 구차한 목숨을 도모하지 않았다. 밀정의 밀고로 체포돼 일본 경찰에게 혹독한 고문을 당한 우당은 1932년 11월 17일 66세의 일기로 순국했다. 우당뿐 아니라 첫째 형 건영(1853~1940), 둘째 형 석영(1855~1934), 셋째 형 철영(1863~1925), 여섯째 동생 호영(?~1933)도 망명지에서 눈을 감았다. 유일하게 환국한 형제는 우당의 바로 아래 동생으로 초대 부통령을 지낸 성재 이시영(1869~1953)뿐이다.

항일투쟁에 목숨 바친 이는 다섯 형제뿐이 아니다. 첫째 이건영의 둘째 아들 이규면(1893~1930)은 신흥무관학교를 졸업한 뒤 상해에서 독립운동하다 병사했고, 이건영의 셋째 아들 이규훈(1896~1950)은 만주에서 독립운동하다 귀국한 뒤 공군 대위로 한국전쟁에 참전했다가 실종됐다. 둘째 이석영의 장남 이규준(1899~1927)은 밀정 김달하와 박용만을 암살하는 등 독립운동하다 병사했다. 우당의 둘째 아들 이규학(1896~1973)은 밀정 암살에 가담했고, 셋째 아들 이규창은 친일파 암살 사건으로 일본 경찰에 체포돼 13년간 감옥살이를 했다.

우당 가문은 목숨만 바친 게 아니다. 가산 전부를 처분해 독립운동 자금으로 사용했다. 급히 처분한 탓에 600억 원 밖에 못 받았지만 제값을 받았다면 2조 원가량의 재산이었다고 한다. 우당이 설립한 신흥무관학교는 8년간 3500여 명의 독립군을 양성하면서 항일무장투쟁의 혁혁한 전과를 올렸다. 1920년 김좌진 장군이 대승을 거둔 청산리 전투는 신흥무관학교 출신이 주축이었다. 우당은 60세를 넘긴 노령에도 비밀결사대에게 일본군 수송선과 천진 주재 영사관 폭파 등을 폭파하도록 지휘한 아나키스트였다.

"항일투쟁은 당연한 의무, 조국에 묻히는 것만으로도 영광"

환국을 앞두고 상해공항에서. 앞줄 가운데 소년이 이종찬 전 국정원장.
 환국을 앞두고 상해공항에서. 앞줄 가운데 소년이 이종찬 전 국정원장.
ⓒ 조호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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압록강을 건넌 우당의 일가권속 60명 중에 고국 땅을 다시 밟은 이들은 20여 명에 불과하다. 우당의 둘째 아들 이규학과 우당의 손자이자 이규학의 넷째로 상해에서 태어난 이종찬(80·우당장학회 이사장) 전 국정원장은 열 살이던 1946년 5월 환국했다. 2조 원 대의 재산을 독립운동 자금으로 쓰고 형제들의 목숨도 독립의 제단에 바쳤지만 우당의 자손들을 반기는 이도 없고 갈 곳도 없었다. 이종찬의 부모를 비롯한 일곱 명의 가족은 여관에다 여장을 풀어야 했다.

해방된 조국은 친일·반민족 세력이 차지했다. 우당의 후손들은 애국자의 가문으로 환대받기는커녕 독립운동을 했다는 이유로 불온 딱지가 붙었다. 이종찬의 아버지 이규학은 일본 경찰의 고문으로 청력을 잃었지만 가난 때문에 보청기도 쓰지 못했다. 이종찬이 육군사관학교(아래 육사)에 진학한 가장 큰 이유는 가난 때문이었다.

이종찬은 육사 입학 과정에서 구술시험 면접관인 일본군 출신 장군(이용)에게 독립운동가 집안 출신이란 이유로 모욕을 당했다. '천황폐하 만세'를 외치며 독립 운동가에게 총구를 겨누던 일본군 출신들이 해방 조국에선 독립 운동가와 가족들을 위협하고 조롱한 것이다. 친일파 세상에 울분을 삭여야 했던 애국지사 소거(素居) 이규학은 이런 유언을 남긴 뒤 1973년 눈을 감았다.

"나라를 잃은 피맺힌 한(恨) 속에서 분연히 일어선 이가 어디 나 하나뿐이겠는가. 일터에서, 배움터에서, 나라 안과 밖에서 우리 모두 한마음 되어 목숨을 걸고 싸웠노라. 항일독립투쟁은 민족의 성원(成員)으로서 당연한 의무이니 이를 자랑하지도 말고, 상(賞)을 바라지도 말고, 조국 산하에 묻히는 것만으로도 분에 넘친 영광으로 알지어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환국 70주년 기념전시회에 걸린 환국 사진에서 소년시절의 자신을 가리키는 이종찬 전 국정원장. 어느덧 팔순 노인이 됐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환국 70주년 기념전시회에 걸린 환국 사진에서 소년시절의 자신을 가리키는 이종찬 전 국정원장. 어느덧 팔순 노인이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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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찬 전 원장은 부친의 유언을 가문의 자랑으로 삼았다. 또한 "우리 가문만이 아니라 일제와의 간고한 투쟁에 나선 독립운동 가문이 많이 있다"면서 "친일파를 청산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항일 독립 운동가의 자랑스러운 삶을 널리 알려야 한다. 독립운동의 역사가 전설처럼 들리는 것은 부끄러운 것"이라고 지적했다. 과거 망명지에서의 어린 시절을 물었더니 이런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중국 사람에게 듣는 욕설 중에 가장 큰 욕은 쌍욕이 아니라 '왕궈누(亡國奴)'라는 욕이었다. 이 말은 '나라를 빼앗겨 종살이하는 놈'이란 경멸 어린 욕이다. 중국 아이를 때리면 그 아이 엄마가 나타나 '왕궈누'라고 했다. 나는 그 말을 듣고 참을 수 없어 중국 애들을 더 팼다. 해방되자 어머님이 하시는 말씀이 '이제는 왕궈누란 말을 안 듣는 것만 해도 얼마나 좋으냐'고 하셨다. 나는 어린 시절에 나라를 빼앗긴 민족의 비참함을 몸으로 배웠다."

'만약 백범 김구가 현실 정치에 참여했다면'

이종찬 전 국정원장이 김구 주석과 작은 할아버지 이시영 초대 부통령의 사진을 보여주고 있다.
 이종찬 전 국정원장이 김구 주석과 작은 할아버지 이시영 초대 부통령의 사진을 보여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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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임시정부 환국 70주년 기념전시회가 지난 1일부터 9일까지 광화문광장에서 열렸다. 석오 이동녕과 할아버지 우당, 동암 차리석 등 임시정부 원로들과 찍은 사진 속의 백범 김구는 젊었다. 한 소년이 눈에 띄었다. 백범과 함께 찍은 소년은 이종찬 전 원장이었다. 백범에 대한 기억을 물었더니 "큰 산 같은 어르신이었고, 카리스마가 넘치는 지사였다"고 말했다. 4선 국회의원을 지낸 이종찬은 백범에 대해 이렇게 평가했다.

"베트남의 호찌민, 중국의 모택동, 한국의 김구를 비교해보면 호찌민이 가장 뛰어났다고 생각한다. 호찌민은 민족해방 운동가였지만 노련한 외교가였고 전략가였다. 백범은 정치가보다는 이상을 꿈꾸는 지사였다. 성재 이시영은 임시정부 경무부장으로 시작한 백범을 주석으로 만든 정치적 멘토였다. 성재는 백범을 아우로 여겼고, 백범은 성재를 형님으로 모셨는데 해방 정국에서 현실 정치 참여 문제로 입장이 갈렸다.

백범이 북한 정권에 참여한 항일운동 동지 김두봉에게 편지를 쓰는 등 북한과 협상하자 성재는 소련 때문에 협상이 안 된다고 말렸고, 백범은 실패해도 가야 한다고 했다. 김대중 대통령과 백범의 현실 정치 참여 문제에 관해 토론했는데 '백범이 현실 정치에 참여했어야 했다'고 했다. 백범을 비롯한 임시정부 세력의 몰락은 현실 정치를 외면한 데서 비롯됐다. 역사에 만일은 없지만 만일에 임정 세력이 현실 정치에 참여했다면 친일파 청산이 어느 정도는 이루어졌을 것이다."

정치인 출신답게 이종찬 전 원장은 고도의 전략가였던 이승만의 현실 정치를 높이 평가했다. 그의 말처럼 백범이 현실을 직시하고 선거에 참여했다면 역사는 달라졌을 것이란 말에 공감이 갔다.

"임정 인사들이 5.10 남한 단독 선거를 거부할 때, 이승만은 여든 살 되는 이시영을 설득해 부통령에, 이범석을 국무총리에, 신익희를 국회의장에, 김병로를 대법원장에 앉혔다. 이승만 대통령이 독립 운동가들을 초대 내각에 앉힌 것은 정권의 정통성을 확보하기 위해서였다. 이승만의 정치적 감각과 전략을 예사로이 보면 안 된다. 정치는 현실이다. 민족세력은 이승만의 현실 정치와 전략을 배워야 한다."

이종찬 전 원장에게서 회고록 <숲은 고요하지 않다 1.2>를 선물 받았다. 우당의 가문 역사를 비롯해 상해 임정부터 굴곡의 정치 한복판에서 써내려간 현대사가 흥미진진하다. 이 중에 가장 인상에 남는 것은 전두환 정권에 참여한 이종찬이 운동권 출신의 조영래를 변호사가 되도록 도운 대목이다.

조영래는 사법연수원 재학 중에 발생한 '서울대생 내란음모사건'에 연루돼 구속됐다. 사법고시에 합격하고도 사업연수원을 졸업하지 못해 변호사 자격을 취득하지 못한 조영래는 1980년 8월 중앙정보부 간부인 이종찬을 찾아와 사법연수원에 복교할 수 있도록 도움을 청했고, 이종찬은 법원행정처와 중앙정보부에 신원보증을 서면서 조영래가 변호사가 되도록 길을 열어준 것이다.

(관련 기사 :  "이승만-김구 화해하는 임정기념관 만들겠다")

○ 편집ㅣ김준수 기자



태그:#우당 이회영, #이종찬 전 국정원장, #백범 김구, #이승만, #대한민국임시정부기념관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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