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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일 경찰은 민중총궐기 1차 집회 지도부에 소요죄 적용을 검토 중이라고 밝혔다(☞ 경찰청 보도자료 바로가기). 이 소식을 접한 많은 이들은 어리둥절했다. 소요죄라는 죄명 자체가 낯설기 때문이었다.

그럴만했다. 8일 오후 2시 35분 기준으로 <네이버>에서 '소요죄' 관련 기사를 검색해보면 대부분 경찰 발표와 연관 있거나 11월 19일 국회 청문회에서 "민중총궐기 1차 집회에 소요죄 적용을 검토하라"는 김진태 새누리당의 의원 질문에 김수남 신임 검찰총장이 "점검하겠다"고 답했다는 내용 정도다(관련 기사 : '고집불통' 김진태 "백씨 쓰러진 상황, 수상하다).

이외에는 대부분 군사독재시절 소요죄 유죄판결을 받았던 인물들의 재심 무죄 소식이었다. 소요죄가 형법 115조로 살아있으나 죽은 것과 다름없음을 보여주는 증거다. 하지만 경찰은 이 케케묵은 죄명을 꺼내들었다.

<오마이뉴스>는 수사당국의 시곗바늘 되돌리기가 얼마나 진행 중인지 살펴보기 위해 옛날신문을 들춰 봤다. 소요죄가 마지막으로 주목을 받은 것은 무려 약 30년 전인 1988년이었다. 그런데 '응답하라 1988'만 현실이 아니었다.


[일제강점기]
유관순은 왜 붙잡혔을까


1919년 독립선언에 참여한 민족대표 등 47인이 소요죄 등으로 재판을 받게 됐다는 법원 결정을 전하는 1920년 4월 13일 <동아일보> 기사.
 1919년 독립선언에 참여한 민족대표 등 47인이 소요죄 등으로 재판을 받게 됐다는 법원 결정을 전하는 1920년 4월 13일 <동아일보> 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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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0년 4월 13일자 <동아일보>에는 손병희 등 47명의 예심결정서가 실렸다. 1년 전 3월 1일, 이들이 민족대표 33인의 이름으로 '기미독립선언'을 작성·배포한 일이 내란죄에는 해당하지 않지만 소요죄의 구성요건은 충족한다는 법원 판단을 설명하는 내용이었다.

소요죄는 일제가 치안유지법, 보안법과 함께 독립운동가 탄압에 즐겨 쓴 무기였다. 국사편찬위원회가 일제 경찰이 제작한 신상카드 6264건을 분석한 결과, 죄명을 확인한 5674명 가운데 소요죄 혐의를 받은 사람은 모두 130명에 달했다( ☞ 한국사 데이터베이스 바로가기).

치안유지법과 보안법 위반, 국가총동원법과 출판법 위반 다음으로 많은 숫자다. 고향 천안에서 만세운동을 주도하다 붙잡혀 끝내 옥사한 유관순의 공소사실 중 하나도 소요죄였다.

[이승만 정부] 현행범으로 체포된 국회의원

정부의 탄압에 항의하며 시위를 벌인 야당 의원들이 경찰과 대치하던 중 김선태 의원이 소요죄 혐의로 현장에서 체포됐다는 소식을 보도한 1956년 7월 29일자 <동아일보>.
 정부의 탄압에 항의하며 시위를 벌인 야당 의원들이 경찰과 대치하던 중 김선태 의원이 소요죄 혐의로 현장에서 체포됐다는 소식을 보도한 1956년 7월 29일자 <동아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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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방 후 '소요죄'란 단어가 신문지면에 대거 등장한 것은 대통령 선거가 열린 1956년이었다. 5월 5일, '못 살겠다, 갈아보자!'던 야권 후보 신익희 박사가 갑작스레 뇌출혈로 사망하자 흥분한 지지자들은 경무대(현재 청와대) 앞으로 몰려간다. 경찰은 이들에게 소요죄를 적용, 법원의 구속영장을 발부받았다. 5월 9일 <경향신문>은 이때 구속된 피의자는 모두 110명이라고 전했다.

이승만 대통령이 가까스로 3선에 성공한 뒤 정부는 야권 인사 탄압에 열을 올렸다. 분노한 야당 소속 국회의원들은 7월 27일 행진에 돌입한다. 이 과정에서 김종원 치안국장은 김선태 의원이 소요죄 등을 저지른 현행범이라며 그를 직접 지프차에 태워 연행했다( 1956년 7월 29일자 <동아>). 1960년 4·19 혁명이 번져가던 때 치안당국이 시위 참가자들에게 적용한 주된 혐의도 소요죄였다( 1960년 4월 16일자 <동아>).

[박정희 정부] 청년 MB의 전과 기록

20년 가까이 통치하며 정부를 비판하고 민주화를 열망하는 여론을 잠재웠던 박정희 정부에게는 유신헌법과 대통령 긴급조치라는 막강한 무기가 있었다. 그런데 유신헌법은 1972년, 대통령 긴급조치는 1974년에야 만들어졌다. 정부는 두 무기의 공백을 메우는 데에 소요죄를 요긴하게 썼다.

1963년 10월 18일 <동아>는 5·16 군사쿠데타로 들어선 혁명정부 반대 시위를 벌인 대학생 수십 명이 경찰에 끌려갔고, 그 중 5명은 반공법과 소요죄 등으로 구속됐다고 보도했다. 이듬해 7월 27일자 <동아>에는 고려대생 17명의 내란 및 소요죄 군사재판 첫 기일 기사가 실린다.

'굴욕회담' 논란이 일었던 한일회담 반대 시위를 주도한 피고인들 가운데에는 당시 고려대 상대 학생회장이던 이명박 전 대통령도 있었다. 그와 같은 혐의로 붙잡힌 사람들은 이재오 의원, 손학규 전 민주당 대표 등 348명에 달했다.

[전두환 정부] '군사독재 반대'에는 어김없이...

몇 년 뒤에는 수십 명이 소요죄 혐의로 재판을 받는다. 1986년 시민단체들이 인천에서 전두환 정부의 독재 반대 시위를 벌였기 때문이었다.
 몇 년 뒤에는 수십 명이 소요죄 혐의로 재판을 받는다. 1986년 시민단체들이 인천에서 전두환 정부의 독재 반대 시위를 벌였기 때문이었다.
ⓒ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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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동안 자취를 감췄던 소요죄는 1980년대에 다시 모습을 드러낸다. 광주민주화운동이 계기였다. 1981년 1월 5일 <경향>은 육군계엄 고등군법회의가 심리한 '광주사태' 항소심 소식을 전하며 1심처럼 사형 판결이 나온 피고인은 모두 3명이라고 보도한다. 이 가운데 운전기사 배아무개씨와 인쇄공 박아무개씨의 공소사실에는 소요죄가 들어가 있었다.

몇 년 뒤에는 수십 명이 소요죄 혐의로 재판을 받는다. 1986년 시민단체들이 인천에서 전두환 정부의 독재 반대 시위를 벌였기 때문이었다. 그해 5월 31일 <동아>는 검찰이 '5·3 사태' 구속자 170명 중 57명을 국가보안법 위반죄와 소요죄 등으로 기소했다고 보도한다.

"이번 사태가 폭행·방화가 심하고, 인천 도심 일대의 평온을 현저히 해치는 등 단순 시위 차원을 넘어섰기 때문"이라는 이유였다. 검찰은 비슷한 이유로 문익환 목사 등 재야 인사들에게 소요죄를 적용하기도 했다( 1986년 6월 19일 <경향>).

1987년 6월 항쟁 이후 야당은 '형사소송법의 재심 사유에 관한 특별조치법안(아래 특조법)'을 발의한다. 유신헌법이 선포된 1972년 10월 17일부터 1988년 6월 30일까지 '범죄자'로 몰린 민주화 인사들을 구제하기 위해서였다.

특조법은 긴급조치 1~9호와 국가보안법, 내란죄와 국가모독죄, 계엄포고령 등으로 유죄 확정판결을 받은 사람들을 대상으로 정했다. 물론 소요죄도 재심 청구 사유 중 하나였다( 1988년 8월 9일 <경향>).

○ 편집ㅣ홍현진 기자



태그:#소요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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