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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육룡이 나르샤>.
 <육룡이 나르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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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교과서에는 주로 인간의 의지와 활동에 의해 역사가 전개되는 것처럼 기술되어 있다. 하지만 인간의 의지나 활동보다 역사에 더 많은 영향을 미치는 것은 기후다.

기후는 대기의 상태를 가리킨다. 인간을 포함한 지구 상의 모든 생명체는 대기에 둘러싸여 있다. 그래서 어느 생명체도 기후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 인류가 농업을 통해 자연을 개발할 수 있게 된 것도 약 1만 년 전에 지구가 빙하기를 지나 간빙기에 접어들었기 때문이다. 그런 기후변화가 없었다면, 지금만큼의 번영을 이룰 수 없었을 것이다.

드라마 <육룡이 나르샤>(SBS, 월화)에는 고려가 망하고 새로운 나라가 세워지기를 염원하는 육룡, 즉 여섯 주인공이 등장한다. 고려가 제발 멸망하기를 바라는 이들은 마치 고려 멸망을 위해 고사라도 지내는 사람들처럼 보인다.

그 육룡 중 다섯 명은 자신들의 브레인인 정도전(김명민 분)이 새로운 나라의 건설을 위한 계책을 내리라 기대하고 있다. 의외의 아이디어와 과감한 행동력으로 주변을 놀라게 하는 드라마 속 이방원(유아인 분)도 기본적으로 정도전의 책략에 의존하고 있다.

기후변화, 조선의 건국 가능케 했다?

물론 조선 건국의 아이디어가 정도전의 머리에서 나온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어떻게 보면 정도전의 머리가 아니라 '기후의 머리'가 그런 일을 가능케 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왜냐하면, 14세기의 기후변화가 없었다면 고려가 그렇게 허무하게 무너지는 일도 없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보면, 기후변화는 조선 건국의 특등 공신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 

<기후의 반역>의 저자인 대만 기상학자 류자오민(유소민)의 연구에 따르면, 몽골 즉 원나라가 세계 패권을 장악한 뒤인 13세기 중후반부터 동아시아는 이전보다 훨씬 더 추운 한랭기 기후로 접어들었다. 그러다가 14세기 중후반부터는 추운 것에 대해 건조하기까지 한 기후로 접어들었다. 한랭건조기로 진입한 것이다. 그래서 14세기는 기상 상태가 점점 더 악화되는 시기였다.

중국 남부에 타이후(태호)라는 거대한 호수가 있다. 일본 최남단과 위도가 비슷한 상하이의 서쪽에 있으며, 넓이는 서울의 네 배나 된다. 이런 따뜻한 곳에서 1329년에 기상 이변이 발생했다. 이 거대한 호수가 얼어붙은 것이다.

얼음의 두께가 '수척'(1척은 약 30cm)이라고 했으니, 남쪽 지방 호수가 꽤 두껍게 얼었음을 알 수 있다. 같은 해에 태호보다 남쪽인 동정호에서는 감귤이 어는 사건이 발생했다. 따스한 지방에서 성장하는 감귤이 얼 정도로 기상상태가 안 좋아졌던 것이다. 

이런 이변이 일회성으로 그친 게 아니다. 기상이변은 계속되었다. 1333년에는 중국 남부에서 10일간의 폭설로 240cm의 눈이 쌓였다. 이런 기상이변이 누적되고 기후변화가 굳어지다가 14세기 중후반에 한랭건조기가 찾아온 것이다.

기후변화는 농업생산에 영향을 끼쳤다. 이것은 동아시아 최대의 농업지대이자 몽골의 점령지인 중국 경제에 타격을 주었다. 살기 힘들어진 중국 한족 농민들은 몽골 통치에 저항하기 시작했다. 이로 인해 대륙이 혼란해진 틈을 타서 고려 공민왕이 반몽골 정책을 펴고 중국 농민들이 홍건적의 반란이라는 반체제 운동을 벌인 것이다. 

몽골의 본거지로 중국대륙으로 옮겨진 상태에서 벌어진 이런 변화는 이 제국에 치명적인 타격을 주었다. 본거지인 중국대륙에서 반란이 심해지고 근처에 있는 고려에서도 반몽골 운동이 벌어졌기 때문이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주원장·장사성·진우량 같은 중국 영웅들이 등장하고 이들 중에서 두각을 보인 주원장이 1368년 명나라를 건국했다. 이로써 몽골은 북쪽 초원으로 밀려나게 되었다.

이 같은 정세변화는 전체 동아시아에 영향을 주었다. 한반도에서는 1392년에 고려가 조선으로 교체됐다. 같은 해에 일본에서는 일왕(이른바 천황)이 두 명이나 공존하던 상태가 끝나고 남북조 통일이라 불리는 정치적 통합이 발생했다. 오키나와에서는 1406년에 삼국통일이 일어났다. 참고로, 1879년까지 오키나와는 독립국이었다.

이렇게 고려 멸망과 조선 건국은, 기후변화가 동아시아 농업생산에 영향을 주고 이것이 반몽골 투쟁과 동아시아의 혼란으로 연결되는 과정에서 발생한 사건이다. 정도전·이성계·이방원 같은 인물들은 기후변화가 만들어놓은 링 위에서 활약했을 뿐이다. 그래서 기후변화가 조선 건국의 주역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것이다.

이성계, 정도전, 이방원의 동상이몽

<육룡이 나르샤>의 이성계(천호진 분).
 <육룡이 나르샤>의 이성계(천호진 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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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반도에서 이런 기후변화로부터 외형상 가장 큰 이익을 얻은 사람은 이성계였다. 죽은 뒤에 '태조'라는 묘호를 받고 국가사당인 종묘에 위패가 안치된 이성계는, 자신이 새로운 나라의 건국시조가 됐으므로 14세기에 벌어진 제반 변화의 최대 수혜자는 자기 자신이라고 생각했을지 모른다. 하늘이 자기를 도왔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러나 정도전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태조실록>에 따르면 그는 술에 취할 때마다 "한나라 고조 유방이 장량을 이용한 게 아니라, 장량이 한고조 유방을 이용한 것이다"라고 말하곤 했다. 한나라 건국시조인 유방이 책사 장량을 이용한 게 아니라 장량이 유방을 이용해서 자기 뜻을 펼쳤다는 의미다.

정도전이 이런 말을 한 것은, 자신이 볼 때는 자기가 이성계를 이용하고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자기가 이성계한테 머리를 빌려주는 게 아니라 이성계가 자신한테 군대를 빌려주고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조선의 국가이념과 법률제도 등이 그의 머리에서 나왔으니 취중에 그런 말을 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을 것이다. 정도전의 입장에서는 14세기 제반 변화의 최대 수혜자는 이성계가 아니라 자기 자신이었을 것이다. 정도전 역시 하늘이 자기를 도왔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하지만 이방원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을 것이다. 이방원이 자신을 실질적 건국시조라고 생각했다는 정황이 있다. 이는 그가 제2대 주상이자 둘째 형인 이방과가 죽은 뒤 이방과에게 묘호를 올리지 않은 사실에서 유추된다.

이방과는 1398년에 정권을 잡은 이방원이 추대한 허수아비 임금이다. 이방원은 아버지를 몰아낸 뒤에 자기가 곧바로 왕이 되기가 힘들어 둘째 형을 임시로 왕위에 앉혔다. 1400년에 이방원에게 왕권을 넘겨주고 상왕으로 물러난 이방과는 1419년에 세상을 떠났다. 1418년에 이방원은 셋째아들 충녕대군(세종)에게 왕위를 넘겨주고 상왕으로 물러났다.

이런 상태에서 1419년에 이방과가 세상을 떠났다. 이때 형식상의 임금은 세종이었으나 실권자는 상왕인 이방원이었다. 그래서 이방과의 장례에 관한 최고 결정이 이방원한테서 나올 수밖에 없었다.

이방원은 이방과를 왕릉에 묻은 뒤 이방과의 신주를 종묘에 모셨다. 전직 임금을 종묘에 모실 때는 조(祖)나 종(宗) 같은 묘호를 붙이는 게 당연했다. 조나 종이 붙어야 정식 임금이었다는 것이 최종적으로 확인된다. 연산군과 광해군은 종묘에 모셔지지 못했기에 조나 종이 아닌 군(君)으로 불렸다. 그런데 이방원은 이방과에게 묘호를 부여하지 않았다. 이방과가 정종이란 묘호를 받은 것은 죽은 지 260년 정도가 흐른 조선 후기 숙종 때였다.

형에게서 '태종'이라는 묘호를 빼앗아간 이방원

<육룡이 나르샤>의 이방원.
 <육룡이 나르샤>의 이방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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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방과에게 묘호를 부여하지 않은 이유는 이방원이 죽은 뒤에 드러났다. 아버지 이방원의 뜻을 충실히 따르는 세종은 이방원에게 태종이란 묘호를 올렸다. 그런데 이 두 번째 임금한테 부여하는 게 관행이었다. 두 번째 임금한테 꼭 '태종'이란 묘호를 붙여야 하는 것은 아니지만, 태종이란 묘호를 굳이 쓰고자 한다면 두 번째 임금한테 붙이는 게 관행이었다.

태종은 클 태(太)자가 들어간 데서 알 수 있듯이, 태조에 버금가는 위상을 가진 묘호다. 건국시조는 아니지만 건국시조에 버금가는 위상을 띤 칭호다. 이런 칭호를 제2대 주상인 이방과가 아닌 제3대 주상 이방원에게 부여하는 것은 관행을 깨는 일이었다.

이로써, 이방원이 묘호를 부여하지 않은 동기가 명확히 드러났다. 제2대 주상인 둘째 형한테 태종 묘호를 주기 싫었다는 점이다. 이방원은 태종이란 묘호를 자신이 갖고 싶었던 것이다. 이런 아버지의 뜻을 알기에 세종이 관행을 어기면서까지 태종 묘호를 아버지에게 바쳤던 것이다.

이방원이 이방과에게 태종 묘호를 주기 싫었다면, 다른 묘호라도 주면 되지 않았을까? 아니다. 그렇게 되면 둘째 형이 제2대 주상이라는 점이 공식적으로 확인된다. 이렇게 되면 이방원은 제3대 주상으로 확정되고 이에 따라 태종 묘호를 사용하는 게 부자연스러워진다. 이런 문제점을 피하자면, 이방과에게 아무런 묘호도 주지 않음으로써 그가 제2대 주상이었다는 점을 모호하게 만들어야 했다. 그래서 이방과에게 묘호를 주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태종이란 묘호에 대한 집착에서 드러나듯이 이방원은 자신이 건국시조에 버금가는 위상을 가졌다고 생각했다. 실제로도 고려 멸망 직전에 정몽주가 이성계·정도전을 정치적 벼랑에 몰았을 때 이방원이 정몽주를 암살하지 않았다면, 조선이란 나라가 세워지지 못했을 수도 있다. 이런 점 때문에라도 이방원은 자신이 실질적 건국시조라고 생각했을지 모른다. 이방원의 자손들이 대대로 주상직을 계승했으니, 후손들 입장에서는 이방원이 태(太)자를 사용하는 게 당연했을 수도 있다.

이런 이방원의 관점에서 보면, 14세기에 진행된 기후변화의 최대 수혜자는 이성계도 아니고 정도전도 아니고 바로 자기 자신이었을 것이다. 옛날 사람들은 현대인들보다 훨씬 더 천문이나 기후 현상에 민감했다. 그래서 기후변화로 인한 연쇄 효과를 훨씬 더 잘 이해했을 수도 있다. 이런 점을 고려하면, 이방원도 14세기 기후변화로부터 자신이 가장 큰 정치적 이익을 얻었다고 생각했을 수도 있다. 그는 '하늘이 이 이방원을 도왔다'라고 생각했을지 모른다.

○ 편집ㅣ박정훈 기자



태그:#육룡이 나르샤, #기후변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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