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아버지는 어울리지 않은 양복을 입고 또 길을 나섭니다. 장남이 입김 호호 불어가며 닦아놓은 구두를 신으며, 엄한 표정으로 아내와 자식을 재빠르게 훑습니다. 싸우지 말고, 공부 열심히 하라는 말을 빼놓지 않습니다. 텃밭에 김장 배추도 얼지 않게 뽑으라는 분부도 내립니다. 아이들은 눈도 마주치지 못하며 얼른 대답을 하고. 아내는 헤진 고무신 걸음으로 대문 밖까지 배웅을 합니다.

<중앙일보> 배명복 논설위원은 '이 나라의 주인은 누구입니까'라는 칼럼에서 박근혜 대통령을 곱게 차려입고 외출하는 어머니에 비유했습니다. 하지만 저는 선뜻 고개가 끄덕여지지 않았습니다.

곱게 차려입고 외출하는 어머니 같다고요?

박근혜 대통령이 지난달 29일 오후 성남 서울공항 출국장에서 새누리당 김무성 대표(왼쪽) 등 환송객들에게 손을 흔들고 있다.
 박근혜 대통령이 지난달 29일 오후 성남 서울공항 출국장에서 새누리당 김무성 대표(왼쪽) 등 환송객들에게 손을 흔들고 있다.
ⓒ 연합뉴스

관련사진보기


박 대통령은 이번 순방길에서도 수모를 겪었습니다. 유엔 기후협약 당사국총회 정상회의 참석차 '청정에너지 미션' 행사에 참석했으나 준비한 기념축사조차 못하는 외교적 수모를 당했습니다. 주최국인 미국·프랑스·인도 정상들의 지각 사태가 원인이라고 하지만, 어떠한 항의조차 하지 못한 한국 외교팀 소식에 국민의 한사람으로서 자존심이 상합니다.

빡빡한 일정이라고 하지만 거기에 걸맞은 외교적 성과는 보이지 않습니다. 지난달 14일 주요 20개국 정상회의 참석을 생각한다면 한 달여 기간 동안 반 이상의 순방길입니다. 11월 23일 입국, 11월 30일 다시 출국. 7박 10일을 외국에서 보내고 일주일 만에 5일간 여정의 순방길. 대통령이 재미교포 같다는 시중의 우스갯소리에 쓴 웃음이 납니다.

지난달 14일 민중총궐기. 서울에서 13만이 모이는 집회를 대통령은 불법 폭력 집회라고 했고, 집회 참가자들을 'IS(이슬람국가)'에 비유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복기해 보면 집회 원인을 제공한 사람은 대통령이었습니다. 지난 달 10일 대통령은 국무회의에서 역사를 배우지 못하면 혼이 비정상이라며 국정화 교과서 반대 진영에 날을 세웠습니다. 야당에게는 국민의 삶과 경제를 볼모로 잡고 있다고 했습니다. 갈등을 수습하기는커녕 불만과 분열만 키워놓고 정상회의 참석을 이유로 순방길에 나섰습니다.

돌아온 대통령은 한층 더 무서웠습니다. 립 서비스, 위선, 직무유기, 국민에 대한 도전이라는 표현을 써가며 폭력 집회 엄단을 강조했습니다. 검찰과 경찰이 나서고 여당이 대통령 거들기에 나섭니다. 언론조차도 대통령의 눈 밖에 나서는 안 된다는 듯 폭력 시위만 집중부각하고 있습니다. 집회·시위의 자유, 국민이 주인이라는 민주주의의 운영 원리는 대통령의 단호한 말 한마디에 사문화된 법이 되고 말았습니다.

격한 비난을 쏟아내던 대통령. 출국장에서 배웅 나온 여당대표와 일행에게 환한 미소를 지으며 또다시 순방길에 올랐습니다. 실시간으로 전해지는 대통령의 순방 일정. 국민들은 어리둥절합니다. 국내에서는 기업과 경제 성장을 위해 규제 개혁의 목소리를 높이던 대통령이, 2030년까지 온실가스 37%를 줄이겠다고 한 약속이 그렇습니다. 획일적인 교과서 국정화를 추진하면서 유네스코 특별연설에서 교육 다양성을 주 내용으로 하는 '인천선언'을 강조한 것도 이해되지 않습니다.

대통령의 귀국이 두렵습니다

전국농민회총연맹 부산경남연맹과 전국여성농민회 경남연합, 가톨릭농민회 마산교구연합회는 2일 오후 경남도청 정문 앞에서 “살기 위해 거리로 나선 농민에게 살인진압하는 박근혜 정권 규탄 기자회견”을 열었다.
 전국농민회총연맹 부산경남연맹과 전국여성농민회 경남연합, 가톨릭농민회 마산교구연합회는 2일 오후 경남도청 정문 앞에서 “살기 위해 거리로 나선 농민에게 살인진압하는 박근혜 정권 규탄 기자회견”을 열었다.
ⓒ 윤성효

관련사진보기


12월 5일 2차 민중총궐기가 열립니다. 이 또한 대통령과 정부의 진부한 국정 철학이 원인입니다. 경찰은 물대포 직사로 69세 농민을 사지로 몰아넣고도 일말의 반성은커녕 집회 참가자를 색출하느라 혈안이 되어 있습니다. 신임 검찰총장은 취임 일성이 공안 역량 재정비입니다. 경찰과 검찰. 대통령의 당부(?)를 충실히 이행하는 것이겠지만 또 한번 대립과 충돌이 예상됩니다. 

'행복한 대한민국', '중산층 70%'는 대통령이 국민에게 한 약속입니다. 나라의 먹거리를 책임지면서 정작 밥 굶을 처지에 몰린 농민들, 손쉬운 해고에 내몰리는 노동자의 절규는 대통령의 약속과 맞닿아 있습니다. 역사 교과서의 국정화에 반대하는 국민들을 IS 테러리스트로 치부하는 대통령은, 박근혜 대통령 후보가 국민들에게 약속한 대통령 모습이 아닙니다.

민중총궐기가 있는 5일, 대통령은 귀국할 것입니다. 언론의 온갖 찬사도 이어지겠지요. 그러나 두렵습니다. 대통령의 웃음은 외국인들의 것이 된 지 오래입니다. 또다시 짜증이 묻어나는 얼굴을 하고 혼이 비정상이라고 국민을 몰아세울지 걱정이 앞섭니다.

대통령의 순방과 귀국. 선물 보따리를 기다리는 아이들의 마음일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 편집ㅣ장지혜 기자





태그:#대통령 순방
댓글50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역사의 진보는 냉철한 시민의식을 필요로 합니다. 찌라시 보다 못한 언론이 훗날 역사가 되지 않으려면 모두가 스스로의 기록자가 되어야 합니다. 글은 내가 할 수 있는 저항입니다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