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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월의 마지막 주말(28일), 초겨울 가슴 속까지 파고드는 시원한 아침 공기가 옷깃을 따라 올라 손발과 머리까지 차가워지는 것을 느끼면서 친구들과 예산 가는 버스에 올랐다. 벌써 첫눈이 내린다는 소설(小雪)이 지나 본격적인 추위가 시작되는 계절이다.

당장이라도 눈이 펑펑 쏟아질 것 같은 흐린 날씨. 차에 앉아 펄펄 날리는 눈을 맞으면서 수덕사에 오르는 꿈을 꾸다가 일어나니, 와우! 창밖에 눈이 조금씩 오고 있다. 예산 '수덕사(修德寺)', 백제의 고찰이다.

대웅전 배흘림기둥
▲ 수덕사 대웅전 배흘림기둥
ⓒ 김수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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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시대 건축기법인 배흘림기둥이 좋은 대웅전과 망해버린 백제의 기억을 천년 넘게 마음 한 켠에 품고 있는 석축, 절 뒤편의 산세와 노송(老松)이 절묘하게 아름다운 사찰이다. 여기에 하얀 운동화에 청바지와 단발머리가 고왔던 첫사랑 연인의 눈(目)을 닮은 가녀린 첫눈(雪)까지 내리고 있으니, 어젯밤 꿈자리도 좋았나 보다.

오늘 수덕사에 온 이유는 사실은 절보다는 절 초입에 있는 '수덕여관'을 둘러보기 위해서다. 이곳은 지난 1935년 서양화가이며, 작가였던 나혜석이 승려가 되기 위해 수덕사에 왔다가 뜻을 이루지 못하고, 근동의 청년, 학생들을 모아 유화와 조각 등을 가르치며 생활하던 곳이다.

충남 예산시
▲ 수덕여관 충남 예산시
ⓒ 김수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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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유학까지 마친 우리나라 최초의 여성 서양화가였던 나혜석은 이혼, 전시회 실패와 경제적 궁핍, 그리고 아들 김선이 폐렴으로 죽은 후 충격을 받고 방황하다가 수덕사로 찾아든다.

당시 수덕사에는 속세의 질긴 삶을 접고 서른두 살 때부터 여승으로 수도생활을 하고 있던 친구이며 문인이었던 김일엽 스님이 있었기 때문이다. 나혜석은 비구니가 되고자 했지만 조실스님(만공)의 허락을 얻지 못했다. 그러나 이곳에 남아 그림을 가르치면서 3년간 생활하게 된다.

여기서 한국과 프랑스에서 활동하며, 화단의 큰 별이 된 이응노 화백을 잠시 제자로 만나게 된다. 이응노는 나혜석의 그림과 별처럼 바람처럼 살아온 날들을 동경했고, 훗날 스스로 파리로 훌쩍 떠났던 것도 나혜석의 영향이 컸다고 한다.

수덕여관은 이후 1945년 이응노 화백이 사들였고, 동생 흥노에게 경영을 맡겼다. 서울에서 홍익대 미대 교수 등으로 활동하던 이응노는 한국전 당시에 잠시 이곳으로 피난을 오기도 했지만, 이내 본부인에게 여관 경영을 맡기고는 1958년 프랑스로 떠났다.

어렵고 힘들게 파리에서 겨우 자리를 잡고 명성을 얻고 있던 이응노는 1967년 동백림 간첩단 사건으로 중앙정보부로 잡혀와 잠시 영어의 몸이 되었다가 풀려났다. 감옥에서 나온 이응노는 요양을 위해 본부인이 있는 수덕여관으로 와서 삼라만상의 영고성쇠를 문자적 추상화로 표현한 암각화 작업에 몰두했다.

예산시
▲ 수덕여관 이응노화백 암각화 예산시
ⓒ 김수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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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덕여관에서 참 오랜만에 한가하게 지냈지. 산책하고 그림 그리고 산을 오르내리기도 하고, 그러던 어느 날 우물 근처 너럭바위에 앉아 넋 놓고 계곡 물소리를 듣는데 좋은 생각이 떠올랐어. 바위에 그림을 그리는 거 말이야. 나는 곧 지필묵을 갖추고 바위 옆면을 따라가며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지."

이응노는 수감생활을 옥고를 풀어내듯 작품을 완성하고는 지금까지 정성껏 옥바라지 한 본부인과 암각화를 남겨두고는 다시 홀연히 파리로 출국했다. 그리고 본부인 박귀희씨는 사망하기 직전인 2000년까지 수덕여관을 경영했다.

이후 수덕여관은 문을 닫았다가, 최근에 오랫동안 리모델링 공사를 마치고 새롭게 재개장을 했다. 원형에 가깝게 개조를 했다고는 하지만, 너무 공사를 잘해서 긴 시간의 흔적이 별로 남아있지 않아 아쉬움이 있었다. 여관으로도 사용하지 않고 있어 숙박을 할 수 없다는 점도 그랬다.

나는 언젠가 다시 숙박을 담당할 임자가 나타나면 가족과 함께 하룻밤을 유하면서 나혜석의 작품집과 이응노의 암각화를 천천히 감상을 하면서 계곡물 소리를 반주로 육자배기를 한가락하면서 탁주를 한 잔 하고 싶다.

본부인 박귀희 여사에게는 비정한(?) 남편이었던 이응노를 안주삼고 조금 씹고도 싶다. 이어 눈이 오는 수덕사에 올랐다. 나는 대웅전의 오래된 기둥을 잠시 어루만지다가, 우측 입구에 서서 잠시 기도를 하고서는 바로 내려왔다. 눈비가 와서 그런지 처마 곳곳에 고드름이 가득하다.

대웅전 앞에서
▲ 수덕사 대웅전 앞에서
ⓒ 김수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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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차하면 낙하하여 지나는 사람이 다칠 수도 있지만, 그래도 겨울왕국 날랜 전사의 얼음 칼처럼 멋져 보이는 고드름을 눈으로 보는 것만으로도 즐거웠다. 마지막 떨어진 단풍잎을 한 아름 품어 안은 새하얀 첫눈에게도 감사인사를 했다. 첫눈에 소원을 빌며 작은 눈사람을 만들어 본다.

자! 이제는 점심을 먹기 위해 공주로 가자. 보통의 크기가 어린아이 주먹만 하다고 자랑하는 사람들이 많은 밤의 고장 공주. 나는 이곳에서 우선 '밥보다 술'이라고 밤 막걸리를 한잔했다. 달고 맛있는 밤의 향기와 텁텁한 쌀과 누룩의 냄새가 미묘하게 어울리는 맛난 술이다. 서울에서도 가끔 맛을 본 적이 있지만, 현지에 와서 한 잔 하니 풋풋함이 더 좋다.

밤의 고장 공주의 특산
▲ 공주 밤막걸리 밤의 고장 공주의 특산
ⓒ 김수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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쇠갈비와 국밥으로 한 끼를 해결했다. 그리고 금강 변에 자리하고 있는 백제시대의 성인 '공산성(公山城)'으로 갔다. 원래 '웅진성(熊津城)'이라고 불리던 이 산성은 웅진백제시대의 중심이었다. 당초 토성이었던 것을 조선시대 임진왜란 직후 충청감영이 공주로 옮겨오면서 새롭게 석축을 쌓아 현재의 모습을 하고 있는 역사가 오래된 성이다.

당연히 백제의 멸망을 함께 하기도 했고, 나당연합군과 백제군이 결전을 치른 현장이기도 하다. 의자왕이 마지막 항복을 한 곳이기도 하다. 당시의 말안장과 깃대 꽂이 등이 발견되었고 옻칠이 된 장신구 등이 출토되기도 했다.

공산성, 웅진성이다
▲ 공주시 공산성, 웅진성이다
ⓒ 김수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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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성안에는 백제의 왕궁지로 추정되는 터와 빗물을 담은 큰 웅덩이, 땅 밑에서 발견된 목곽고에서는 복숭아씨, 조개껍데기, 곡식 씨앗, 밤, 토기 등 생활도구 등이 나오기도 했다. 현재도 성 내부에서 발굴 작업이 계속되고 있다.

또한 조선의 인조임금이 즉위 직후 이괄의 난으로 공주까지 피난을 왔던 시절 맛본 '인절미'에 대한 추억과 '메기 매운탕' 벼슬을 내린 '정3품 나무'와 나무가 죽자 자손 목을 새로 심고 옆에 쌍수정(雙樹亭)이라는 정자를 세운 이야기 등 수많은 것들을 담고 있었다.

쌍수정과 벼슬을 받은 나무의 자손목
▲ 공산성 쌍수정과 벼슬을 받은 나무의 자손목
ⓒ 김수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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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히 인절미를 처음 맛본 인조가 "그 맛이 절미로다"라고 하면서 떡 이름을 물어보자 아무도 떡 이름을 모른다고 하니, 이름은 절미라고 하고, 만들어 가져온 사람이 임씨라고 하니 "그럼 임절미라고 하라"라고 하여 임절미가 되었다. 이후 발음상의 편의로 차츰 인절미가 되었다는 이야기는 다시 생각해봐도 맛깔나게 재미있는 내용이다.

나는 성안을 크게 한번 둘러보았다. 정교하게 쌓은 석성은 보기에도 좋았지만 웅장했다. 아래에서 보는 것도 멋있었다. 내부를 천천히 둘러보니 작은 규모의 산성이라고 해도 전망은 장대했다. 멀리 남쪽으로 관군과 싸워 동학 농민군 10만여 명이 전사한 역사적 장소로 잘 알려져 있는 우금치 마루가 보인다.

북쪽에는 금강이 도도히 흐른다. 지금은 다리가 여러 개 가설되어 있어 교통에 불편은 없어 보이고 강 건너에 신도시가 넓게 형성되어 있다. 서쪽에는 '천주교황새바위순례성지'도 자그만하게 보인다.

나는 금강이 바라보이는 동문루에 올라 성 전체를 조망했다. 찬바람이 정신을 번쩍 들게 했다. 조금은 건방진 말이지만, 의자왕이 이 바람을 매일 맞았다면 어쩌면 백제가 더 버틸 수도 있었을 것 같았다.

의자왕과 계백장군 등을 생각하며 잠시 기도를 한 다음 천천히 산을 내려왔다. 이제 백제는 갔다. 하지만 그들의 후손인 박찬호, 박세리가 스포츠로 세상을 빛내고 있어 다행이라는 생각도 든다. 아울러 늦은 감이 있기는 해도 백제문화유산이 유네스코에 등재되어 기쁘기도 하다.

약간의 아쉬움도 있고, 슬픔도 있고 기쁨도 있는 공산성을 둘러 본 우리들은 마지막으로 저녁 식사도 하고 산책도 하고 새우젓도 사려고 논산의 강경포구로 이동했다. 한때는 평양, 대구 시장과 함께 전국의 3대 시장이라고 할 정도로 큰 시장이었던 강경은 이제는 새우젓 종류를 주로 파는 작은 포구로 바뀌었다.

전국 최고의 젓갈 시장이 있는 곳
▲ 강경의 새우젓 전국 최고의 젓갈 시장이 있는 곳
ⓒ 김수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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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지금도 김장철이면 전국 젓갈 물동량의 60%를 점유하면서 200년 역사를 자랑할 정도로 젓갈이 유명한 곳이다. 일제 강점기 이전부터 중국과 일본의 상인 및 어민들의 내왕이 많았고, 화교학교, 일본은행, 부두노동조합, 우리나라 최초의 개신교인 옥녀봉 공원의 침례교 최초 예배초가 등이 있다.

논산시
▲ 강경읍 초가 침례교회 논산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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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울러 명문 강경상고와 함께 수많은 지역 출신의 경제인들, 문인들, 일제가 만든 신사의 옛터, 관문, 연수당건재한약방, 학교건물, 관사, 상가, 적산가옥 등 여러 개의 근대문화유산이 남아있는 곳이다.

2년 전에 방문했을 때는 너무 늦은 시간이라 잠시 산책만 하고 왔었는데, 이번에는 천천히 곳곳을 둘러 볼 시간이 되어 많은 곳을 보았다. 100년이 다 된 일본식 가옥의 안팎을 주인의 허락을 받고 잠시 살펴보기도 했다. 오래된 교회 및 성당, 학교도 둘러보았다.

특히 관심이 많았던 연수당건재한약방의 경우에는 때 마침 주말에 가끔 이곳을 찾는다는 주인장을 만났다. 본인의 어린 시절 사진과 글을 쓰는 이야기며, 지역 출신의 문인들에 관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꿈에도 상상을 못했던 2층 서재에 올라 책과 사진을 보기도 하고, 짧은 대화를 나눌 수 있어 좋았다. 소위(?) 그림이 잘 나오는 한약방의 오래된 목조건물 앞에서 화보 촬영을 하면 좋을 것 같다는 생각에 같이 갔던 동료들 사진을 몇 장 찍어주었다. 이어 젓갈을 반찬으로 저녁식사를 하기 위해 식당으로 갔다.

충남 논산시 강경읍의 가장 오래된 건물 중에 하나
▲ 연수당건재한약방 충남 논산시 강경읍의 가장 오래된 건물 중에 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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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여 종의 젓갈이 정갈한 반찬으로 나온 식사를 했다. 나는 청어알이 너무 싱싱하고 맛이 좋아 밥에 조금씩 비벼서 천천히 향과 맛을 음미하며 먹었다. 톡톡 터지며 부서지는 알과 코끝을 타고 오르는 곰삭은 비릿함이 매운맛과 어울려 특히 눈과 혀끝에 타고 올라 강하게 자극해 오는 것을 느꼈다.

맛있게 저녁까지 마친 우리들은 젓갈을 조금씩 구매한 다음, 비가 오기 시작한다는 소식을 들으며 버스에 올라 서울로 향했다. 정말 재미있는 이야기가 많이 숨어있지만 이제는 세상 사람들에게 기억조차 가물하고 아련한 백제의 연한 숨결, 충남 여행이었다.


태그:#충남의 이야기, #강경 젓갈, #수덕사, #공산성, #수덕여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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