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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의 국가장은 현직 대통령보다는 전직 대통령의 장례식이 되기 쉽다. 하지만, 왕조시대의 국장은 전직 임금인 상왕보다는 현직 임금의 장례식이 되기 쉬웠다. 국장은 현직 임금을 떠나보내는 의식이었던 것이다.

참고로, 임금이 죽은 뒤의 절차는 크게 셋으로 나뉜다. 처음에는 궁궐에 빈소를 차려두다가, 5개월 뒤에 왕릉에 장사지내고, 삼년상이 끝나면 국가 사당인 종묘에 신주(위패)를 모셨다. 

어느 조직에서나 다 마찬가지겠지만, 남아 있는 사람들은 떠나는 전임자가 서운한 마음을 갖지 않도록 애쓰기 마련이다. 속마음은 어떻든 간에 상대방이 가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을 겉으로나마 표시하기 마련이다.

옛날 국장에서도 그런 의식이 있었다. 죽은 임금이 떠나가지 않고 되돌아와 주기를 바라는 의례가 있었던 것이다. 이것은 사극에도 종종 나오는 장면이다. 왕이 죽으면 내시가 왕의 옷을 들고 지붕 꼭대기에 올라가 구부정한 자세로 눈물을 지으며 "상위복" 하고 외치는 장면이 바로 그것이다.

상위복은 한자로 上位復으로 표기된다. 上位는 윗분 즉 임금이란 뜻이고 復은 돌아온다는 뜻이다. 그러니까 상위복은 '임금이여 돌아오소서'라는 뜻이다. 임금의 영혼에게 육신으로 되돌아오라는 외침이었던 것이다. 죽은 왕이 떠나가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을 그렇게 표현했던 것이다.

물론 상위복이란 외침은 형식적이고 의례적인 것이었다. 그래서 그것은 사실은 빈말이었다. 하지만, 옛날 사람들은 그것이 빈말이 아님을 보여주고자 했다. 빈말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고 싶은 마음을 국장 절차에도 반영했다.

죽은 왕의 상여를 왕릉으로 옮기는 모습. 서울시 노원구 공릉동의 태릉 내부에 있는 조선왕릉전시관에서 찍은 사진.
 죽은 왕의 상여를 왕릉으로 옮기는 모습. 서울시 노원구 공릉동의 태릉 내부에 있는 조선왕릉전시관에서 찍은 사진.
ⓒ 김종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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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은 왕의 부활을 기다리는 시간들

오늘날 미합중국 수정헌법 제20조는 신·구 대통령의 임기가 교대되는 시점을 1월 20일 정오 12시로 규정했다. 이에 따라 미국에서는 새 대통령이 취임선서를 하는 정오 12시에 신·구 대통령이 교체된다. 이렇게 규정해 놓았기 때문에, 대통령 자리가 공석이 되는 시간은 이론적으로 존재하지 않는다.

대한민국도 마찬가지다. 미국처럼 헌법에 규정해놓지는 않았지만, '대통령직 인수에 관한 법률' 부칙 제3조에 관련 규정을 두었다. 이에 따르면, 신·구 대통령이 교대하는 날의 새벽 0시에 새로운 대통령의 임기가 시작한다. 2월 25일 새벽 0시에 새 대통령의 임기가 시작하는 것이다. 이처럼 대한민국의 경우에도, 대통령 자리가 공석이 되는 시간은 이론상 존재하지 않는다.

그런데 옛날 왕조의 경우는 달랐다. 임금이 공식적으로 부존재하는 시간이 있었던 것이다. 조선왕조의 경우, 내관이 지붕에 올라가 상위복을 외친 지 5일 뒤에, 임금의 시신을 입관하고 사람들이 상복을 입은 상태에서 새로운 임금이 등극하는 게 관행이었다.

상위복을 외치고 곧바로 입관하고 상복을 입으면, 상위복이란 말이 빈말이 될 수밖에 없었다. 그런 상태에서 새로운 왕이 등극하면, 새로운 왕이 전직 왕의 죽음을 내심 기뻐하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었다. 그것은 선왕에 대한 예의가 아니라는 판단에서, 5일간 왕위를 비워두었던 것이다.  

그 닷새 동안에는 대비 즉 죽은 왕의 부인이나 어머니가 공식적인 최고 권력을 장악했다. 이 기간에 대비는 임금 못지않은 비상대권을 행사했다. 만약 임금이 세자를 정해놓지 않고 죽었다면, 다음 임금을 결정하는 것도 대비의 몫이었다.

국민주권시대인 오늘날과 달리 옛날에는 주권이 왕실에 있다고 인식됐기 때문에, 왕이 공석이 된 비상시에 왕실의 최고 어른인 대비가 비상대권을 행사하는 게 당연하게 인식됐다. 개인 기업에서 사장이 갑자기 죽으면 임원진이 아니라 사장 가족이 기업을 책임지는 것과 같은 이치였다.

이처럼 조선시대에는 상위복을 외치고 닷새 동안에는 대비가 통치권을 갖고 있다가, 죽은 왕이 돌아오지 않으면 다음 왕에게 정권을 넘겨주는 게 관행이었다. 물론 죽은 왕이 실제로 돌아올 리는 없지만, 닷새 동안은 기다려줘야 한다는 게 그 시대 사람들의 생각이었다. 그래서 왕이 죽은 뒤 5일 동안에는 온 나라 사람들이 죽은 왕의 부활을 기다리는 시간을 갖게 되었다.

종묘의 내부 모습. 태릉 조선왕릉전시관에서 찍은 사진.
 종묘의 내부 모습. 태릉 조선왕릉전시관에서 찍은 사진.
ⓒ 김종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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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은 왕이 돌아오지 않길 바랐던 왕후

그런데 그런 분위기 속에서 남들과는 전혀 다른 마음을 품은 사람들이 있었다. 대다수의 사람들은 내시가 외치는 상위복이라는 말을 형식적으로 들으면서도 왕의 부활을 기다려주었다. 하지만, 극소수의 사람들은 상위복이란 외침을 곱씹으면서 '정말로 돌아오시면 안 되지'라고 속으로 되뇌었다. 그래서 이들은 왕이 죽은 지 5일이 안 됐는데도 새로운 왕의 등극 절차를 서둘렀다. 정상적인 절차를 따랐다가는 닷새 안에 무슨 참변을 당할지도 모른다는 우려에서 그렇게 서둘렀던 것이다. 

그런 사람들 중 하나가 조선 제9대 주상인 성종을 옹립한 정희왕후다. 그는 제7대 세조(수양대군)의 부인이자 제8대 예종의 어머니이고 제9대 성종의 할머니였다. 그는 남편인 수양대군이 쿠데타를 일으키고 왕이 된 뒤에 참담한 슬픔을 겪었다.

정희왕후는 장남인 의경세자가 스무 살 나이로 세상을 떠나는 것을 지켜봤다. 아버지 수양대군이  단종을 포함한 많은 사람들을 죽인 것으로 인해 양심의 가책을 느낀 의경세자는 시름시름 병을 앓다가 나이 스물에 세상을 떠났다. 이 의경세자가 지난 4월 미국에서 돌아온 덕종어보의 주인공인 덕종이다. 의경세자는 사후에 덕종으로 추존됐다.

그러자 의경세자의 동생인 해양대군(훗날 예종)이 세자가 되었다. 해양대군은 아버지가 죽은 뒤에 제8대 주상이 되었다. 하지만, 그는 왕이 된 지 15개월 만에 네 살짜리 아들 제안대군을 남겨두고 세상을 떠났다. 예종도 의경세자처럼 스무 살에 죽었다. 수양대군의 두 아들이 똑같은 나이에 죽은 것이다.

제안대군이 너무 어렸기 때문에 제9대 주상직은 의경세자의 두 아들한테 넘어가게 되었다. 이때 대비인 정희왕후는 좀 비상식적인 결정을 했다. 자신이 가진 닷새간의 비상대권을 활용해서 이치에 맞지 않는 결정을 내렸던 것이다. 정희왕후는 의경세자의 장남인 월산대군(당시 16세)을 제치고 차남인 잘산군(자을산군, 당시 13세)을 왕으로 옹립했다. 이 잘산군이 연산군의 아버지인 제9대 성종이다.

정희왕후는 월산대군이 병약해서 잘산군에게 왕권을 준다는 명분을 내세웠지만, 진짜 이유는 다른 데 있었다. 잘산군의 장인이 권력자 한명회라는 게 진짜 이유였다. 한명회와 연대할 목적으로 장손을 제치고 잘산군을 왕으로 만들었던 것이다. 정희왕후는 성종을 왕으로 세운 뒤에는 성종이 어리다는 것을 명분으로 7년간 수렴청정을 통해 통치권을 행사했다. 이때 정희왕후를 보좌한 사람이 성종의 어머니인 인수대비다.

정희왕후가 성종을 후임자로 정한 것은 상식에 어긋난 것이었다. 그래서 이것은 정치적 반대를 불러올 수 있는 것이었다. 이런 위험성을 차단하기 위해서였는지, 정희왕후는 예종이 죽은 지 5일 뒤가 아닌, 죽은 당일에 성종을 즉위시켰다. 닷새를 기다렸다가 무슨 일이 날지 알 수 없다고 판단했을 수 있다. 그래서 죽은 예종이 살아 돌아오기 전에 성종을 얼른 등극시켰던 것이다. 정희왕후도 '상위복은 무슨!' 하는 생각을 했을지 모른다.

왕의 어좌. 경복궁 근정전에서 찍은 사진.
 왕의 어좌. 경복궁 근정전에서 찍은 사진.
ⓒ 김종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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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행 어기고 왕이 된 광해군

유사한 일은 선조의 국장 때도 있었다. 선조가 죽은 직후에 광해군은 마음속으로는 슬펐겠지만, 마냥 슬퍼만 하고 있을 수는 없었다. 슬픔에만 빠져 지낸다면, 왕권을 잡지 못하는 것은 물론이고 경우에 따라 목숨까지 빼앗길 수 있었다. 그래서 광해군은 아버지가 죽은 뒤에 초조감과 불안감을 겪을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광해군도 관행을 어기고 왕이 됐다. 닷새가 지나지도 않은 상태에서 즉위식을 거행했던 것이다.

광해군은 이미 16년 전에 세자가 되었기 때문에 그렇게 조급해 할 필요가 없었다. 하지만 선조가 죽기 직전에 변덕을 부렸던지라, 광해군 측은 마음을 놓을 수 없었다. 선조는 젊은 부인인 인목왕비한테서 낳은 영창대군한테 왕권을 넘겨주려 했다. 선조가 죽기 전에 그런 태도를 보였기 때문에, 그것을 명분으로 한 정변이 발생할 수도 있었다. 그래서 광해군 측은 불안해 할 수밖에 없었다.

광해군의 측근들은 왕위를 한 시도 비워둘 수 없다면서 신속히 즉위할 것을 요청했다. 그래서 광해군은 마지못해 하는 태도를 보이다가, 아버지가 죽은 다음 날 왕위에 오르는 파격을 범했다. 혹시라도 상황이 급변하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이 작용했던 것이다.

광해군 쪽은 '임금이여 돌아오소서'라는 그 말이 기분 좋게 들리지 않았을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상위복 소리를 들은 선조가 돌아갈까 말까 망설일 시간도 없이 즉위 절차를 신속히 진행했다. 그만큼 광해군의 처지가 좋지 않았던 것이다.

물론 광해군보다 성종의 경우가 더 심했다. 성종은 예종이 죽은 당일에 왕이 됐다. 적어도, 광해군은 당일에는 즉위하지 않았다. 하지만 후대 사람들은 성종이 일찍 즉위한 것은 별로 기억하지 않고, 광해군이 일찍 즉위한 것만 기억한다.

이것은 광해군의 정치적 기반이 그만큼 좋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광해군은 아버지가 죽은 상황에서도 슬퍼할 여유가 없었다. 그는 살아남기 위해서라도 하루빨리 왕이 되어야 했다. 이렇게 국장이 진행되는 동안에, 통곡하는 수많은 사람들 틈 속에서 일부 사람들은 '상위복' 소리에 반발심을 느끼며 다음을 대비해야 했다. 

○ 편집ㅣ장지혜 기자


○ 편집ㅣ장지혜 기자



태그:#국가장, #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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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imjongsung.com.일제청산연구소 연구위원,제15회 임종국상.유튜브 시사와역사 채널.저서:대논쟁 한국사,반일종족주의 무엇이 문제인가,조선상고사,나는 세종이다,역사추리 조선사,당쟁의 한국사,왜 미국은 북한을 이기지못하나,발해고(4권본),패권쟁탈의 한국사,한국 중국 일본 그들의 교과서가 가르치지 않는 역사,조선노비들,왕의여자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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