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인터넷 커뮤니티 '메갈리아'는 꾸준한 논란의 대상이다. 지난 6월 메갈리아가 여성 혐오(아래 여혐) 풍조에 맞대응하는 '미러링'(상대방의 행동을 거울처럼 비추며 패러디) 전략을 앞세워 등장할 때부터 쭉 그랬다. 다만 대중의 관심 대비, 언론의 기사 공급은 부족했다.

최근 1개월간 메갈리아가 언급된 기사를 검색하면 딱 13건이 뜨며(DAUM), 트위터에서 메갈리아가 언급된 트윗은 8039건이 뜬다(TOPSY). 그런데 같은 기간 '헬조선' 기사는 1090건이고, 트위터에서 헬조선이 언급된 트윗도 4만1071건이다.

메갈리아는 트윗 약 618건당 기사 1건, 헬조선은 트윗 약 38건당 기사 1건인 셈. 결국 SNS에서의 관심 정도가 그에 상응하는 기사 공급으로 이어진 건 아니다. 최근 역사교과서 국정화나 임금피크제처럼 '헬조선스러운' 굵직한 이슈들이 더 몰린 까닭으로 보인다. 그래서 늦은 감도 있지만, 대중의 관심에 부응해 다시 메갈리아 이야기를 꺼내본다.

메갈리아 아이콘
 메갈리아 아이콘
ⓒ 메갈리아 갈무리

관련사진보기


메갈리아가 여성주의 철학을 전부 대변하는 건 결코 아닐망정,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성 평등 이슈를 대중화시키는 데 '큰 몫'을 하고 있다는 걸 부정할 순 없다. 문제는 그녀들의 바람과 달리 이슈는 자꾸 '미러링'에만 초점이 맞춰진다는 거다.

예를 들면, 최근 1개월간 '유리천장'(성·인종 등에 대한 차별로 고위직을 맡지 못하는 현상)이 언급된 트윗은 1674건에 그쳤다. 그런데 '미러링'이 언급된 트윗은 1만2067건으로 약 7배다. 그래서 아쉽지만 이 글도 일단은 미러링에 대한 이야기로 출발한다.

[주장1] 우리는 '원래' 서로를 미러링하며 살아간다

미러링이 논란인 건, 여혐 진영의 '김치녀' '삼일한'(여성은 삼일에 한 번씩 맞아야 한다) '탈김치녀'(남성의 잣대로 볼 때 각성된 여성) 등의 혐오 발언들을 '의도적으로' 패러디하기 때문이다. '김치남' '숨쉴한'(남성은 숨 쉴 때마다 한 번씩 맞아야 한다) '코르셋'(전통 의상으로 상징되는 여성에 대한 가부장적 억압) 등.

메갈리아 등장 초기에 미러링은 제법 효과가 있었다. 평소에 생각 없이 여혐 발언을 일삼던 일부 남성들에게 '충격요법'이 됐던 셈이다. 그런데 사이버 공간이란, 콘텐츠를 올리면 불특정 다수에게 퍼져 맥락 없이 접하는 경우가 생긴다. 메갈리안들의 계산은 여혐 진영 최전선에 서 있는 '일베'를 겨냥한 패러디였지만, 이 점이 오히려 독이 됐다.

즉각적으로 '왜 일베 따라 하느냐, 여자 일베냐?' '혐오를 혐오로 돌려주는 방법은 도덕적으로 옳지 않다'로 요약되는 비판이 나왔다. 심지어 '메갈리안은 '정통 페미니즘'이 아니다'라는 말도 나왔다. 그런데 이 주장들은 미러링을 오해한다. 미러링은 옳다 혹은 그르다 같은 '가치'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가 '존재'하는 방식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가치≠존재).

<EBS> 다큐 '동과 서' 스틸컷.
▲ 인드라망 <EBS> 다큐 '동과 서' 스틸컷.
ⓒ EBS

관련사진보기


한 번 생각해보자. 가정과 학교, 직장 등에서 마주치는 사람들에게 나 자신은 어떤 존재로 비칠까? 그리고 또 그들은 나에게 어떤 모습으로 비칠까? 만약 사회 구조가 불평등하고 경쟁을 부추긴다면, 바로 옆 직장 동료조차도 경계하며 대하진 않을까?

결국 의식하지 않아도 우리는 서로서로를 늘 미러링하며, 그 심상이 행동에서 배어 나온다. 이 관계를 불교는 '인드라망'이라는 유리구슬 망에 빗댄다. 수많은 유리구슬들처럼 서로가 연결돼 거울처럼 끝없이 비춘다는 거다. 유리구슬 중 어느 하나에 더러운 '티끌'이 낀다면, 순식간에 유리구슬들 전체가 탁하게 비춰진다.

만약 그 티끌이 '혐오'라면, 구슬들은 순식간에 혐오로 뒤덮인다. 파급력을 결정하는 건, 단순히 구슬 하나 즉 개인이나 특정 집단만이 아니다. 구슬들이 맺고 있는 '관계와 구조'가 먼저다. 즉 '왜 '당신'은 혐오를 혐오로 비추는 거야?'라는 비판부터 하는 건, 핀트가 엇나간 정의감이다.

관계와 구조의 문제를 개인과 특정 집단의 문제로 축소하는 데, 의식적으로든 무의식적으로든 기여하기 때문이다. 오히려 한국의 '시대정서'가 혐오로 변질된 지경에 이르렀기에, 앵 톨레랑스(무관용)에 앵 톨레랑스로 맞대응하는 사람들도 생겼다는 사태 파악부터 해도 늦지 않는다.

우리가 공유하는 맥락을 공동체라고 부른다면, "공동체 구성원으로서 '나'는 관계와 구조의 모순을 해결하기 위해, 무슨 일을 하면 좋을까?"라는 책임 의식이야말로 이미 고민됐어야 할 문제다. 그런 점에서, 여성주의 연구가 김홍미리가 "여혐은 별문제 아니고, 메갈리아는 문제"로 취급하는 사람들은 "이제야 '혐오'를 걱정"하는 사람들이라고 비판한 건 정확하다(<일다> 2015.9.1).

[주장2] 흘러야 강이듯, 리드미컬해야 '갓치'이다

하지만 메갈리아 내부에서도, 미러링이 '지나치게 의식적'일 때 과연 전략적으로 유효할지 주기적으로 논란이 있다. 미러링하는 쪽에서나 당하는 쪽에서나, 난이도가 높기 때문이다. 특히 미러링을 하는 쪽은, 여혐 문법을 간파한 뒤 자신들 맥락으로 가져와 자유자재로 가지고 놀면서 과하지 않게 완급조절까지 해내야 한다.

점차 이용자 교체가 일어나, 초기 정신이 퇴색된다면 패러디가 주는 쾌감 자체에만 함몰될 가능성도 충분히 있다. 우리는 그런 사례를 이미 안다. 일베가 정확히 이러한 노선을 밟았다. 메갈리아만은 그렇지 않을 거라고 함부로 장담하기 어렵다(관련 기사: 2010년 이미 예견된 '일베'의 탄생).

급부상 초기부터 '메갈리아→미러링'이라는 인식이 강화됐고, 앞으로도 계속 이렇다면, 실질적인 성 평등 담론들이 큰 진전을 못 보고 발목이 잡혀버릴 위험도 있다(앞선 데이터가 보여주듯). '의식적인' 미러링은 여혐 남성들이 망각할 수 있는, '관계와 구조'의 중요성을 충격요법으로 각인시켜줄 수 있다. 하지만 계속 충격만 가하면, 패턴이 단조로워지고 다음 단계로 넘어가는 데 오히려 방해가 될 수도 있는 셈.

흐르는 물.
 흐르는 물.
ⓒ pixabay

관련사진보기


대안은 메갈리안들에게 이미 있다. 메갈리안들이 자주 쓰는 말 중에 '갓치'라는 말에 주목하자. 갓치는 가부장적 억압의 상징인 코르셋을 벗어던지고(脫), 성 평등의 깨달음을 얻은 여성을 이르는 말로 자주 쓰인다. 흥미로운 건 이 '벗어던진다'는 코드와 '깨달음'의 코드가, 불교에서 '해탈'(解脫)의 경지에 이르렀다는 '부처'의 경지와 매우 닮았다는 점.

앞선 인드라망이 마음을 '정지 상태'로 사진 찍은 장면과 가깝다면, 해탈은 강물이 집착 없이 흘러가는 동영상의 '재생 상태'와 닮았다. 마음을 정지와 재생의 관점에서 다 볼 수 있고 자유자재로 완급조절할 수 있을 때, 불교는 '부처'가 됐다고 말한다(견성성불 見性成佛).

에피소드도 있다. 불교의 종파 중 하나인 선종에는, 큰 스승 격인 조사들이 자신이 쓰던 옷과 밥그릇을 전수해 후계자를 지목하는 전통이 있었다. 5대조 홍인은 후계자를 지목할 때, 제자들에게 '게송'이라는 시를 적어 얼마나 깨달음을 얻었는지 증명하도록 했다.

가장 게송을 잘 지은 제자를 후계자에 지목하겠다는 거였다. 홍인의 제자 중에는 가장 뛰어나다는 신수가 있었고, 제자들은 모두 신수가 당연히 6대조가 될 거라 생각했다. 그래서 아무도 게송을 짓지 않고 있을 때, 신수는 이렇게 벽에 게송을 붙였다고 한다.

신수의 게송
몸은 보리수요 마음은 맑은 거울 부지런히 털고 닦아서 때 묻지 않도록 하라

신수는 마음을 '거울'처럼 생각하며, 세상을 잘 비출 수 있게끔 부지런히 닦아야 한다는 생각에 머무른다. 현재 반복적인 미러링과 비슷한 대처가 아닌가? 하지만 홍인은 신수의 게송을 보더니 "(깨달음의) 문밖에 이르렀을 따름이요, 아직 문 안에는 들지 못하였다"고 아쉬워했다. 그러던 차에, 또 다른 제자 혜능이 그 옆에 이러한 게송을 붙였다고 전한다.

혜능의 게송
보리는 본래 나무가 아니며 맑은 거울에는 틀이 없다. 본래 한 물건 없는데, 어디에 때가 모이겠는가!

혜능은 진정한 거울은 '틀에 묶인' 거울이 아니라고 말한다. 오히려 흐르는 강물처럼 언제든 변화의 여지를 받아들이며, 한 군데 얽매임이 없어 때도 묻지 않는 거울보다 더 깨끗한 천연의 거울이라는 거다. 이를 본 홍인은 혜능을 후계자로 지목했다. 부처가 된 거다.

흐르는 강물은 '리듬감'이 있다. 때로는 빠르게, 때로는 천천히 한곳에 머무를 줄 안다. 그러나 구속되진 않으며, 마침내 물줄기들이 모여 거대한 연대의 바다로 성장한다. 메갈리아는 등장한 지 불과 반년도 되지 않았고, 여전히 다양한 가능성이 있으므로, 현재 세간의 가혹한 잣대들은 다소 부당하다.

다만 필자가 조심스레 제안해보고 싶은 건, 메갈리안들이 미러링에 발목 잡혀 상처받지 않으려면 '물길' 하나 정도는 터놓는 지혜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의식적인 미러링은 결국 미워하는 상대일 망정, 남을 비추는 방식이므로 늘 '남'의 존재에 의존적이다.

이런 전략도 때때로 필요하지만, 가끔은 메갈리안들 스스로 원하는 요구 조건을 직접적으로 속 시원하게 사회에 질러버려도 괜찮지 않을까. '플로잉'(flowing)이란 게 결국 변화를 말한다면, 메갈리안들이 함께 연대해 '갓치'로 성장해나가는 과정을 실컷 자랑할 수도 있겠다. 결국 흘러야 강이다, 리드미컬해야 '갓치'다.

세상이 '나'에게 코르셋을 씌우려 할 때, '나'는 더 이상 '과거의 내'가 아니라는 존재 선언을 남의 문법을 빌리지 않고 자신의 문법으로 던지는 것도 중요하다. 메갈리안들이 진정으로 '갓치'로 거듭나길 응원한다. 요즘 세 줄 요약이 대세라고 한다. 불교철학도 요약을 좋아한다. 이상의 내용을 한 글자로 요약해본다.

"공(空)"

참고한 글
<六祖短經>(慧能), <華嚴金師子章>(法藏)
<달마와 그 제자들>(우봉규 / 살림 / 2008 / 4800원)
<불교사상의 이해>(동국대 불교문화대학 불교교재 편찬위원회 / 불교시대사 / 2012 / 1만8000원)
<중국철학사: 한당편>(노사광 / 탐구당 / 1991 / 절판)
<이제야 혐오를 걱정하는 당신에게>(김홍미리 / 일다 / 2015년 9월 1일)
<'메갈리안' … 여성혐오에 단련된 '무서운 언니들'>(천관율 / 시사IN / 2015년 9월 17일)
<여자를 혐오한 남자들의 '탄생'>(천관율/ 시사IN / 2015년 9월 17일)
<여자를 혐오한 남자들의 '습관'>(하지율/ 오마이뉴스 / 2015년 10월 1일)
<공무원 문턱에서 탈락, '일게이' 청년은 왜 그랬을까>(하지율 / 오마이뉴스/ 2015년 8월 2일)
<2010년 이미 예견된 '일베'의 탄생>(하지율 / 오마이뉴스 / 2015년 8월 30일)



태그:#空
댓글10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