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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둑질해놓고 도둑 잡는 일보다 교통단속이 먼저라는 꼴 아닌가? 민생이 뭔지나 알고 떠드는 거야. 허구한날 재벌 뒤치다꺼리나 하면서. 요새 같으면 진짜 확 뒤집혔으면 좋겠어."

인터넷과 대형 서점에 손님을 빼앗겨 하루 마수걸이도 어렵다는 서점 주인은, 켜놓은 TV 앞에서 거친 말을 쏟아 놓는다. 교과서 국정화는 이제 전문가들에게 맡기고, 이제는 민생을 챙겨야 할 때라며 야당의 투쟁을 비판하는 새누리당. 뉴스를 보면서 드는 생각은 서점 주인의 말과 별반 다르지 않다. 참 뻔뻔하다. 민생이 아니라, 국정화 밀어 붙이기를 끝낸 뒤 퇴로가 필요한 것이다.

역사교과서의 국정화 확정 고시가 있은 다음날부터 정부와 새누리당은 다시 민생 카드를 꺼내 들었다. 지난 4일 청와대 정연국 대변인은 올바른 교과서 만드는 일에 국민들의 힘을 모아야 할 때라며 국정화를 기정 사실화하고 경제 활성화에 총력을 기울여야 할 때라는 입장을 피력했다. 새누리당 김무성 대표는 여기에 더해 국회의원이 직장인 국회에 출근하지 않는 것은 국민이 용서하지 않을 것이라며 농성에 들어간 야당을 비판했다.

민생 타령은 정권과 여당의 해묵은 출구 전략

박근혜 대통령이 6일 청와대에서 열린 제4차 규제개혁장관회의 및 민관합동규제개혁 점검회의에서 모두발언하고 있다.
 박근혜 대통령이 6일 청와대에서 열린 제4차 규제개혁장관회의 및 민관합동규제개혁 점검회의에서 모두발언하고 있다.
ⓒ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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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일 TV에 비치던 '이념 편향의 역사를 국민통합의 역사로'라는 백보드는 하루아침에 '이제는 민생입니다'라는 백보드로 교체됐다. 6일에는 규제개혁점검회의에 참석한 대통령이 국민과 민생을 위한다는 말이 허언이 되지 않기를 바란다며, 농성중인 야당에게 야유에 가까운 비난을 퍼부었다. 교과서 국정화라는 정쟁을 만든 장본인들이, 확정 고시가 끝나자마자 민생을 외면 말라며 야당을 몰아붙이는 책략. 구태의연하고 비열하다. 진정성은 어디에도 찾아볼 수 없다.

처음 있는 일이 아니다. 정권이 위기에 몰리거나, 여야의 대립이 첨예화 될 때는 어김없이 민생 카드를 꺼내 들었다. 국정원 대선개입 사건. 국민의 규탄의 소리가 높아지고 야당이 진상규명을 위한 투쟁의 수위를 높이자, 정쟁을 그만두고 민생을 돌보자고 대통령이 직접 나섰다. 국무총리는 담화문으로 경제 회복의 불씨가 꺼진다고 야당을 압박했다. 새누리당도 다르지 않았다. 먹고 사는 문제와 아무런 상관도 없는 문제로 경제의 발목을 잡고 있다며 국회 복귀를 다그쳤다.

진상규명과 사과 요구로 시작된 야당의 투쟁은 정부와 여당의 거부로 이어진다. 야당은 거리로 나서지만 민생카드 압박에 투쟁을 접고 국회로 복귀한다. 국정원 대선 개입은 올바로 규명되지 않았고 책임자 처벌은 물론 재발 방지 조치도 이어지지 않았다. 정부와 여당의 비열한 프레임은 번번이 이겼고 국민들의 열망은 좌초되었다. 야당의 무능이 한몫했음은 물론이다.

세월호 대참사도 놀랍도록 똑같은 길을 걸었다. 특별법 요구를 둘러싼 지루한 공방에 새누리당은 정치영역에 들어오지 말고 순수성을 지키라며 유가족을 몰아 세웠다. 7.30 재보선에 승리한 새누리당은 본격적인 출구전략을 택했다. 8월 5일, 이완구 전 원내대표의 세월호 특별법이 국회를 마비시키고 있다는 발언을 필두로, 세월호를 볼모로 민생경제를 막아선 안 된다는 김무성 대표의 압박이 이어졌다. 8월 26일에는 최경환 부총리와 경제 장관들이 경제 회복의 불씨가 꺼진다고 특별 담화문을 발표했다.

말로는 민생 국회, 내용은 정권 떠받치기와 재벌 몰아주기 

새누리당 김무성 대표가 5일 오전 국회 대표최고위원실에서 최고위원회의를 주재하던 도중 원유철 원내대표의 이야기를 듣고 있다. 새누리 지도부가 앉는 자리 뒤편에는 "이제는 민생입니다"라고 적은 문구가 내걸렸다.
▲ 머리 맞댄 새누리 "이제는 민생입니다" 새누리당 김무성 대표가 5일 오전 국회 대표최고위원실에서 최고위원회의를 주재하던 도중 원유철 원내대표의 이야기를 듣고 있다. 새누리 지도부가 앉는 자리 뒤편에는 "이제는 민생입니다"라고 적은 문구가 내걸렸다.
ⓒ 남소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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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경제의 불씨가 꺼질 줄 모른다며 국정원 대선 개입 진상 규명과 세월호 특별법을 무마시키고 정상화(?)시킨 국회는 민생 국회와는 거리가 멀었다. 담뱃값 인상안을 통과시키고 서민 증세, 재벌 감세 등 박근혜 정부의 친재벌 정책을 합리화시켜준 것도 새누리당이었다.

민생이 국회의 중심이 되기보다 성장과 수출, 기업이 중심이었다. 국회에서 경제 관련 법안이 논의되고 통과 될 때마다 서민과 노동자의 한숨과 규탄이 이어졌고, 기업에서는 촉구와 환영 성명이 이어졌다.

국민의 삶, 민생을 위기의 도피처나 출구전략 정도로 생각하는 박근혜 정부와 새누리당 때문에 국민의 생활은 오히려 뒷걸음쳤다. 내수경기가 갈수록 얼어붙은 것도 원인에 충실한 필연적 결과다.

정부는 각종 내리막길 지표가 쏟아질 때마다 세계 경기 둔화를 탓하지만, 그 주장이 신뢰를 얻으려면 불황에도 막대한 부를 쌓아가는 대기업과 재벌들에 대한 해명이 있어야 한다. '3분기 소비심리-경제전망 세계 최악' '건강 만족도, 삶의 질 OECD서 또 꼴찌' 등은 이제 그리 낯설지 않은 뉴스다. 박근혜 정부에서 민생은 없었다. 민생 장사만 있었을 뿐이다.

국정화 확정 고시가 있고 나서 대통령은 규제 완화를, 여당은 노동, 경제 관련 법안 처리를 촉구하고 나섰다. 그러나 규제가 경제의 걸림돌이라는 대통령의 인식은 틀렸다. 없애고 고쳐야 할 규제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대부분의 규제는 약자와 공공의 이익에 대한 보호 장치다. 무차별한 규제 철폐 주장은 동물원에 온갖 창살을 없애고 사자와 사슴, 토끼를 같이 살아가도록 하는 것과 같다.

여당이 추진하는 노동 관련 법안들도 국민의 삶의 질을 높이기보다는 손쉬운 해고, 값싼 노동력 공급에 중심이 맞추어져 있다. 정부와 여당은 또다시 민생이라는 간판을 내걸고 재벌 몰아주기에 나선 건 아닌지 심히 우려스럽다.

안보 장사, 민생 장사로 유지되는 정권

 새누리당 권성동 의원(맨 앞 가운데 오른쪽), 역사교과서개선특위 간사 강은희 의원(맨 앞 가운데 왼쪽)이 5일 오후 서울역 광장에서 열린 재향군인회 등 보수단체들의 역사교과서 국정화 지지 집회에 참석해 손피켓을 들고 구호를 외치고 있다.
 새누리당 권성동 의원(맨 앞 가운데 오른쪽), 역사교과서개선특위 간사 강은희 의원(맨 앞 가운데 왼쪽)이 5일 오후 서울역 광장에서 열린 재향군인회 등 보수단체들의 역사교과서 국정화 지지 집회에 참석해 손피켓을 들고 구호를 외치고 있다.
ⓒ 이희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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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생과 정치가 대척점에 서야 할 이유는 없다. 정치 현안보다 민생이 먼저라는 주장은 정부와 여당이 일차원적인 사고에 갇혀 있다는 걸 자인하는 셈이다. 또 매번 민생과 정치 현안을 두고 저울질하는 야당도 사고의 한계가 있기는 마찬가지다.

국정원 진상규명을 내팽개친 정권이 민생을 살리겠다는 것, 세월호 진실규명보다 민생이 먼저라는 것 역시 전형적인 민생장사다. 그리고 국정화 확정 고시도 끝났으니 교과서 편찬은 전문가에게 맡기고 민생으로 돌아가자는 주장 또한 민생 장사꾼의 입에 발린 소리일 뿐이다.

민생이 파탄난 건, 민생을 외면하고 정치 투쟁에 집착했기 때문이 아니라 정치 현안을 외면하려고 민생을 방패막이·도피처로 삼아왔기 때문이다. 국민. 행복. 중산층 70% 육성. 경제 민주화. 희망을 기약하던 대한민국은 지옥 같은 나라, '헬조선'으로 조롱받고 있다. 이 모든 것이 대통령 때문이라고 할 수는 없지만 대통령의 치명적인 공약 건망증과 진부한 국정철학에 원인이 있음은 부인하기 어렵다.

'이명박이 그리워 질 것이다.'

조국 교수가 박근혜 정부의 출현을 두고 한 말이다. 물론 이명박 정권은 절대 그립지 않다. 다만 최악의 대통령으로 회자되는 이명박 대통령과 비교해도 박근혜 대통령이 별반 낫다는 생각이 들지 않는다. 안보 장사, 민생 장사로 정권의 안녕을 구가하는 나쁜 정치를 반복하는 박근혜 정부. 비뚤어진 역사를 바로잡겠다고 말하지만, 우리의 후세들은 이 시기를 대한민국의 암흑기로 평가할 수도 있겠다는 '그런 기운'이 온다.

○ 편집ㅣ장지혜 기자



태그:#민생, #국정교과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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