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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 안에 딱 들어오는 문고판 사이즈, 106페이지의 단출한 내용, 가격도 4800원이니 큰 공을 들인 책이 아니라는 선입견이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천만에다. 대학에선 미학을 공부했고, 일간지와 경제지 기자를 거쳐 프리랜서 작가로 활동 중인 이지형의 신작 <소주 이야기>(살림)는 '허술해 뵈는' 하드웨어와는 전혀 다른 '흥미로운' 소프트웨어로 꽉 채워져 있다.

이지형의 <소주 이야기>
 이지형의 <소주 이야기>
ⓒ 살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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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림지식총서 533'이라는 이름을 달고 출간된 <소주 이야기>는 제목에서 느껴지는 그대로 서민과 대중의 술이라 불리는 소주에 관해 궁금했고 알고 싶었던 '모든 이야기'가 대부분 담겼다. 공력을 들인 흔적이 곳곳에 역력하다.

'우리가 마시는 소주는 가짜 소주다'라는 도발적인 문제 제기로 시작하는 책은 '그렇다면 진짜 소주는 뭔가'라는 물음에 답하며, 이와 동시에 소주의 역사와 소주가 지닌 물질적․정서적 정체성까지 줄줄이 읊어나간다.

또 하나 눈에 띄는 부분은 '소주'와 관련된 풍부한 인용이다. 황석영과 김승옥의 소설에서부터 고은과 박노해의 시까지를 종횡무진하고, 화가 르네 마그리트의 그림을 해석하며, 자칭 '국보' 양주동의 탁월한 저작 <문주반생기>와 잭 웨더포드의 <칭기스칸, 잠든 유럽을 깨우다>라는 역사서까지 사통팔달하는 걸 보면 이지형의 문학․철학․예술․역사서 독서편력이 어렵지 않게 감지된다.

'좋은 글을 쓰는 것은 좋을 글을 많이 읽는 것에서 시작된다'는 옛이야기가 틀리지 않았음의 증거로 삼아도 좋을 책 중 하나인 <소주 이야기>. 그 안에 담긴 문장이 가진 미덕도 빼놓을 수 없다. 마치 술자리에서 20년 지기 친구로부터 전해 듣는 구수한 민담 같은 친근하고 편안한 문장은 독서의 즐거움을 배가시킨다.

정보와 동시에 소주에 얽힌 각종 에피소드까지 풍부하게 담아

슬쩍슬쩍 내비치는 저자 자신의 음주편력과 이른바 '조폐공사 파업유도 발언'으로 검찰조직을 떠나야 했던 진형구 전 대검찰청 공안부장의 '대낮 폭탄주 사건'을 둘러싼 이야기, 왜 몽골군이 주둔했던 안동과 진도 등지에서 '좋은 소주'가 발달했는지를 서술한 부분은 읽는 재미와 함께 소주에 관한 새로운 지식도 제공한다.

일찍이 시인 묵객들은 다른 어떤 이들보다 소주를 포함한 술을 즐겼다. 소설가 최인호는 '여섯 살 술꾼'의 이야기를 통해 '취한 자의 가없는 낙관'을 작품 속에 은유적으로 담아냈고, 시인 오세영은 소주에게 '존재의 결빙을 녹이는 묘약'이란 월계관을 씌웠다. '한국문단의 주선(酒仙)'이라 불러도 좋을 천상병 역시 "몽롱하다는 것은 장엄하다"란 말로 술이 지닌 강위력한 힘(?)에 찬사를 보냈다.

시절이 하수상하다. 대한민국 정치와 경제, 사회와 문화 전 분야에서 희망과 낙관의 소식은 전해 듣기가 쉽지 않고, 어둡고 습한 뉴스들만이 매일같이 들려온다. 이럴 때면 이지형이 책을 통해 부르는 권주가 <소주 이야기>를 들으며 술 한 잔 마시고 싶어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아내야 할 또 다른 날들을 위해. 취한 자 특유의 낙관과 백일몽을 위해.


소주 이야기 - 이슬과 불과 땀의 술

이지형 지음, 살림(2015)


태그:#소주 이야기, #이지형, #폭탄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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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꽃> <한국문학을 인터뷰하다> <내겐 너무 이쁜 그녀> <처음 흔들렸다> <안철수냐 문재인이냐>(공저) <서라벌 꽃비 내리던 날> <신라 여자> <아름다운 서약 풍류도와 화랑> <천년왕국 신라 서라벌의 보물들>등의 저자. 경북매일 특집기획부장으로 일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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