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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젠가 동네 술집에서 목격했던 일이다. 한 친구와 어울려 막걸리 잔을 기울이고 있는데, 옆자리의 두 사람이 말싸움을 벌였다. 60대로 보이는 사람과 30대로 보이는 청년이었다. 나이 차가 많이 남에도 그들은 친숙한 사이인 것 같았다. 그런데 그들의 말싸움 내용이 재미있었다.

'모로 가도 서울만 가면 된다'는 재래 속담이 싸움의 발단이었다. 나이 먹은 사람은 모로 가도 서울만 가면 된다는 쪽이었고, 젊은이는 그 속담이 그르다는 쪽이었다.

"서울을 가려면 제대로 가야지 왜 모로 갑니까? 모로 가면 그게 제대로 가는 겁니까? 그런 속담에 속지 마세요. 서울을 가려면 제대로 똑바로 가야지요. 목적을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태도는 옳지 못합니다. 정정당당하게 살아야지요."

역사교과서 국정화반대 청소년 2차 거리행동에 참여한 초등고생들이 17일 오후 종로구 인사동거리에서 평화행진을 하는 가운데, 한 50대로 보이는 남성이 행사에 불만을 표시하며 갑자기 현수막에 발길질을 하고 있다.
▲ '부끄러운 어른' 역사교과서 국정화반대 청소년 2차 거리행동에 참여한 초등고생들이 17일 오후 종로구 인사동거리에서 평화행진을 하는 가운데, 한 50대로 보이는 남성이 행사에 불만을 표시하며 갑자기 현수막에 발길질을 하고 있다.
ⓒ 권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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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년이 목에 핏대를 세우고 열변을 토했지만 나이 든 사람은 막무가내였다. 무릇 세상일에는 이런 경우도 있고 저런 경우도 있다며, 모로 가도 서울만 가면 된다는 태도에서 한 치도 물러서지 않았다. 급기야는 너무 융통성이 없다고 젊은이를 나무라기도 했다. 게다가 어른이 말하면 다소곳이 받아들일 줄도 알아야지 그게 무슨 못된 버릇이냐는 일갈까지 나왔다.

화가 난 젊은이는 내게로 와서 "선생님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라고 물었다. "글쎄요." 내가 잠시 난감해 하자 그 청년은 재차 물었다. "모로 가도 서울만 가면 된다는 그 속담이 옳다고 생각하십니까?" 나는 도리 없이 싸움에 휘말린 꼴이 되어 한마디 하지 않을 수 없었다.

"두 분의 전도 현상이 안타깝게 느껴집니다."
"무슨 말인지…?"
"나이 드신 분은 모로 가도 서울만 가면 된다는 것은 옳지 않다는 쪽이고, 젊은이는 모로 가도 서울만 가면 된다는 쪽이라면 그런대로 모양새가 됩니다. 세상을 많이 살아서 옳고 그름을 좀 더 잘 분별할 수 있는 어른이 그 속담은 옳지 않다고 하고, 자기 앞가림을 위해 앞을 보고 정신없이 뛰어야 하는 젊은이는 그 속담이 옳다고 해야 뭔가 앞뒤가 맞을 것 같은데, 두 분의 위치가 바뀌었습니다. 그래서 전도 현상이라는 거고, 저는 그 전도 현상이 매우 안타깝습니다."

젊은이는 내 말뜻을 얼른 알아차리고 고개를 끄덕이며 자기 자리로 돌아갔지만, 나이 든 사람은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기색이었다. 나를 바라보는 눈빛에 적의도 느껴졌다. 좀 더 술이 들어가면 내게 시비를 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서, 나와 친구는 곧 술집을 나와 버렸다.

막무가내 노인을 보던 그때가 떠오르는 요즘

오래전 일인데, 요즘 다시 그때 일이 선연히 떠오른다. 여전히 그런 이상한 전도 현상은 우리 사회에 팽배하여 있다. 기성세대들이 젊은 세대들을 제대로 가르치지 못하거나 옳은 가치관을 제시하지 못하는 현상은 여러 가지 양태로 나타난다. 모로 가도 서울만 가면 된다는 속담은 옳지 않다고 항변하는 젊은이에게 한사코 모로 가도 서울만 가면 된다고 박박 우기는 노년층이 사회 전반에 널려 있다.

나도 나이 먹어가는 축이지만, 내 또래 나이 든 사람들은 과거의 일방적 교육으로부터 연유한 관성 탓인지 국가적 중대 사안 앞에서 사리 분별력을 제대로 세우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모로 가도 서울만 가면 된다는 식의 태도는 아니더라도, 세상을 너무 모나지 않게 둥글둥글 사는 게 현명하다고, 자신의 무지와 방관을 합리화하기도 한다.

요즘 온 나라에 폭풍처럼 몰아친 역사교과서 국정화 논란 속에서 자꾸만 그 60대 노인의 모습이 어른거린다. 젊은이 앞에서 모로 가도 서울만 가면 된다는 태도를 계속 고수하며, 그것을 반박하는 젊은이를 버릇없다고 일갈하던 억지가 오늘도 쓴웃음을 짓게 한다. 그 노인이 살아 있다면 지금도 그런 막무가내 태도를 고집할지 궁금하다.  

박근혜 정부의 역사교과서 국정화 방침은 40여 년 전 유신 시절로 되돌아가겠다는 선언으로 보인다. 아버지의 명예 회복이 목적인 듯한 박 대통령의 사적인 의도가 원인인 것 같지만, 그 뒤에는 '박정희 향수'를 자극하고 색깔론을 발동시켜 보수층을 결집하려는 목적도 있는 것 같다. 50대 이상 노년층이 다수를 이루는 보수층을 결집해 정권을 재창출하려는 목적으로 보인다. 더 나아가 연속적인 정권 창출의 토대를 마련하려는 것은 아닐까.

그런 목적을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아야 할지도 모른다. 그 방법이 온전히 통할 리는 만무하지만(일시적으로는 효과가 있을지 몰라도), 모로 가도 서울만 가면 된다는 식의 형국일 수밖에 없다.

그런데 왜 거기에 이념 문제를 끌어들이는가. 왜 해묵은 종북 타령을 동원하는가. 친일파들의 친일 사실을 기록하는 것과 북한 주체사상이 무슨 관계가 있는가. 진실을 가르치는 것이 왜 좌편향이며, 친일을 미화하고 독재를 옹호하고 은폐하는 것이 올바른 역사관인가.

한마디로 억지며 난센스다. 철저히 몰상식적이고 비이성적이다. (역사교과서 국정화 강행은) 시대의 흐름을 거스르려는 무모한 행동이며, 5년의 권력을 너무 과신하는 오만이며 폭거다. 국민과 헌법 가치를 무시하고 민주주의를 마음대로 재단하려는 시도는 인식 수준의 천박성을 노출하는 것일 수밖에 없다.

모로 가도 서울만 가면 된다는 속담을 부정하고 반박하는 젊은이를 나무라고 일갈하던 노인을 보던 때처럼 민망하다. 그러지 마시라. 불순한 목적을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태도를 버리시라. 일시적으로 효과가 있을지 몰라도, 계속 그런 태도를 고집한다면 넘어지는 수가 있음을 명심하시라.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충남 태안의 <태안신문>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태그:#역사교과서, #국정화, #박근혜, #역주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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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남 태안 출생. 1982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중편「추상의 늪」이, <소설문학>지 신인상에 단편 「정려문」이 당선되어 문단에 나옴. 지금까지 120여 편의 중.단편소설을 발표했고, 주요 작품집으로 장편 『신화 잠들다』,『인간의 늪』,『회색정글』, 『검은 미로의 하얀 날개』(전3권), 『죄와 사랑』, 『향수』가 있고, 2012년 목적시집 『불씨』를 펴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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