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오마이뉴스의 모토는 '모든 시민은 기자다'입니다. 시민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사는 이야기'도 뉴스로 싣고 있습니다. 당신의 살아가는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화이트보드를 바라보았다. 가지튀김. 마음을 단단히 먹어야겠다. 오늘은 전쟁이다. 급식 전쟁.

"선생님, 이게 진짜 맛있어서 먹는 거예요?"
"이것만 남기면 안 돼요?"
"선생님, 저 배 아파서 더는 못 먹겠어요."

먹이려 하는 나와 어떻게든 먹지 않으려고 하는 나의 방울들의 급식 전쟁은 매일같이 계속된다. 본 교사는 아직 1년도 채우지 못한 급식 검사 경력이지만 그 짧은 기간 동안에도 수많은 함정과 트릭을 마주했다. 이제부터 내가 경험한 아이들의 함정들과 트릭들을 만나보자.

급식 (해당 기사와는 관련 없는 이미지입니다.)
 급식 (해당 기사와는 관련 없는 이미지입니다.)
ⓒ PIXABAY

관련사진보기


1. 은폐·엄폐형

양배추브로콜리무침이 나온 날이었다. 평소에도 편식을 하던 친구라 제일 늦게 급식 검사를 받던 아이인데, 오늘은 웬일인지 이른 시간에 나에게 급식판을 내밀었다. 깨끗하게 비워진 식판에 나는 '오케이' 사인을 주었다. 그런데 뭔가 찜찜하다. 다시 불러서 세워 식판을 봤더니 어쩐지 국그릇이 기울어져 있다.

"태희, 국그릇 들어봐."
"아, 네? 그게..."
"태희, 국그릇 밑에 브로콜리 버렸어요!"

고자질 덕분에 국그릇을 들춰보지 않아도 그 밑에 무엇이 숨겨져 있는지 알 수 있었다. 국그릇 밑에 숨기는 것뿐만 아니다. 숟가락으로 교묘하게 감추는 경우도 있고 햄스터마냥 입 안에 잔뜩 숨겼다가 검사가 끝나고 나면 '퉤' 뱉어 버리는 경우도 있다. 태희는 그날 급식을 도와주시는 선생님들께 일일이 죄송하다고 인사를 하고 나서야 올라갈 수 있었다.

2. 꾀병형

매주 화요일은 4교시 체육이 끝나면 급식소로 향한다. 어느 화요일, 그날도 신나게 체육활동을 마치고 땀범벅이 된 우리 반은 급식소로 향했다. 한 여자 아이가 온갖 인상을 쓰며 나에게 다가왔다.

"선생님, 배가 아파서 도저히 못 먹겠어요. 죽 먹으면 안 돼요?"
"어, 진짜? 그래그래. 배가 아프면 어쩔 수 없지. 죽 받아다 먹어!"

그날 경민이는 죽을 받아먹었다. 담임 첫 해였던 나에게 꾀병과 진짜 병을 가릴 수 있는 연륜은 없었기 때문이었다. 죽을 다 먹자마자 친구들과 운동장으로 뛰어나가는 경민이를 보며, 좀 이상하다는 생각만 했을 뿐이었다.

그런데, 다음 주도 그 다음 주도 항상 급식소에 도착하고 나면 경민이가 아프다며 죽을 먹겠다는 이야기를 들어야 했다. 아무리 초짜 선생님이지만, 나도 눈치는 있다. 경민이가 죽을 먹겠다고 하는 날의 급식에는 항상 '생선'이 있었다.

"선생님~ 저 죽 먹으면 안 돼요?"
"너, 생선 나와서 그래? 생선 많이 먹지 않아도 되니까 밥 받아봐."
"아, 진짜 아파서 그래요."
"한 번 받아봐. 받아보고 정 못 먹겠으면 내가 먹을게."

경민이는 그날따라 유난히 맛있는 양념이 곁들여졌던 생선까지 싹 다 먹었다. 자기도 민망했는지 '아, 진짜 아픈데'라고 구시렁대면서 말이다.

3. 협상형

오이무침이 나온 날이었다. 희태는 편식하지 않고 잘 먹는 편이지만 유달리 오이를 싫어한다. 오이가 나오는 날이면, 급식을 다 해결하지 못한 채로 나에게 급식판을 들고 온다. 바로 협상을 위해서이다.

"선생님, 저 김치 더 받아서 먹을 테니까 오이는 그만 먹으면 안 돼요?"
"그래, 그럼 오이 하나만이라도 먹어."
"아, 진짜 못 먹겠어요. 느낌이 너무 싫어요."
"하나만 먹어봐, 하나만."

나와 희태 사이에는 한동안 급식 줄다리기가 계속되었다. 결국, 우리는 오이 반쪽에 김치 두 조각으로 극적 타결이 되었다. 아직도 희태는 오이가 나오는 날이면 담판을 지으러 나에게 온다. 이외에도 협상형에는 인정에 호소하거나 애교를 부리는 경우도 포함되어 있다.

4. 버티기형

12시부터 1시까지가 5, 6학년에 주어진 급식시간. 큰 학교인데 급식실은 협소하다 보니 1시부터는 3, 4학년이 이어서 먹는다. 5학년쯤 이제 고학년이 된 우리 반 방울들은 이 시스템에 대해서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우리가 1시 넘어서까지 밥을 먹을 수 없다는 사실을 말이다.

우리 반에는 세 명의 버티기형 선수들이 있다. 젓가락으로 밥알을 세면서 먹듯이 깨작깨작 먹는다. 물론, 맛있는 음식이 나오면 금방 해치우는 것은 당연하다. 나도 점심을 먹고 이도 닦고 5교시 수업 준비도 하고 휴게실에서 쉬고 싶기도 한데, 녀석들은 도통 제 시간에 먹을 생각이 없어 보인다. 버티기형은 결국 선생님이 지고 만다. 1시까지는 꼭 자리를 비워줘야 하니까 말이다.

"재은아, 이거랑 이거만 먹고 가자. 먹을 수 있지?"
"자, 선생님이 골라 준 것만 먹고 올라가자."

갑자기 숟가락질이 빨라지며 금세 할당량(?)을 해치우는 아이들을 보며 또, '50분까지 버티면 돼~'라며 우리 학교의 급식 시간을 악용하는 아이들을 보며, 언젠가는 한 번 날을 잡아서 끝장을 봐볼까도 생각해 본다. 휴.

오이 반 쪽, 김치 한 조각, 브로콜리 하나 더 먹이는 것이 뭐 그렇게 중요하냐고 물을 수도 있겠지만, 이 세상의 담임선생님들은 우리네 방울들이 건강하고 바르게 자라기를 바라는 엄마 같은 마음에서 급식 전쟁을 치르고 있다.

나도 아이들도 급식 전쟁은 스트레스이지만, 나는 이 전쟁을 끝내고 싶은 마음이 아직 없다. 밥 한 톨도 아낄 줄 아는 소중한 마음을 가지고 튼튼하게 자라난 아이들이 모습을 기대하니까 말이다.

○ 편집ㅣ최은경 기자

덧붙이는 글 | 2015년 3월 2일부터 시작된 신규교사의 생존기를 그리는 이야기입니다.



태그:#초등학교, #선생님
댓글4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