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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여 명의 여행객을 태운 관광버스는 굽이굽이 안데스 산맥을 따라 오른다. 칠레의 수도 산티아고에서 출발한 지 두 시간 남짓, 어느 정도 고지대로 접어든 산맥 중간중간에 구리 광산 시설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가이드의 설명에 따르면 모든 시설과 과정 안의 오염물질 등이 자연에 손상되지 않도록 최대한 엄격하게 설비되었다고 하지만 거대한 안데스의 산맥 아래 위치한 광산 시설들은 역시나 자연과 어울리지 않는 왠지 어색한 풍경을 만들어 내는 것을 피할 수는 없었다.

안데스 산맥 안의 광산시설
 안데스 산맥 안의 광산시설
ⓒ 홍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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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곳은 테니 엔에(El teniente) 구리 광산으로 칠레 북쪽의 노천 구리 광산으로는 세계 최대인 추키카마 구리광산과 함께 최대 지하 광산으로 알려졌다. 그 면적은 무려 2300㎢에 이른다고 한다. 한동안 방치되었던 안데스 산맥의 '검은 산'에 있던 구리광산을, 1905년 미국의 쿠퍼 회사가 인수하면서 새로이 구리 채굴작업이 시작되었다. 현재는 칠레 국영기업인 코델코에 의해 구리 채굴이 계속되고 있다. 칠레 주요 구리 광산 중 하나로 꼽힌다.

광산을 끼고 있는 산맥을 조금 더 오르면 목적지인 해발 2200m에 있는 '수웰'이라는 곳에 도착한다. 지금은 아무도 살지 않는 곳, 파괴된 건물들과 복원된 다채로운 한 건물들이 남아있는 안데스 산맥으로 둘러싸인 이 도시는 과연 어떤 이야기를 담고 있을까?

칠레 5대 세계문화유산 중 하나인 수웰

"대학 때 학교 과제 중에 칠레의 특정 도시를 모델로 해서 도시 디자인을 하는 작업이 있었는데, 그때 자료를 찾다가 발견한 곳이 수웰이야. 그 후 직접 한번 보고 싶었는데 7년이 지나서야 와 보네."

투어에서 만난 현재 디자이너로 일하는 칠레 여성 나탈리(30)는 수웰로 가는 동안 기대감을 감추지 못했다. 스위스에서 칠레까지 와서 공부 중인 세 명의 교환학생 그리고 나를 제외한 나머지 투어 인원은 모두 칠레 사람이었다. 수웰은 칠레사람들에게도 쉽게 방문할 수 있는 곳이 아니고, 많은 사람에게 방문하고 싶은 곳 리스트로 남아있는 곳이기도 한다.

칠레에 세계문화유산이 5개가 있는데 그중 칠레 하면 흔히 생각나는 관광 포인트와는 거리가 먼 곳이 있으니 그곳이 바로 수웰이다. (그 외 4개의 문화유산은 이스트 섬, 칠로에 교회, 발파라이소 구시가지, 소금광산이다.)

나도 우연히 동네 카페에서 발견한 칠레 역사 관련 책을 보다가 이곳의 이름을 접하기 전까지는 수웰에 대한 정보가 전혀 없었다. 개인 방문이 허용되는 곳이 아니어서 이곳에 갈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공식 지정된 투어를 이용하는 것이고, 현재는 주말 투어만 운영되고 있다.

해발 2200m의 고지에 위치한 수웰
 해발 2200m의 고지에 위치한 수웰
ⓒ 홍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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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웰은 테니엔테 광산 최초의 광산촌이었다. 광부들과 미국에서 온 관리인들의 임시숙소와 사무실이 들어서며 건물들을 세우기 시작했다. 광부들의 삶은 고단했고 2000m가 넘는 곳까지 일하러 오는 사람들이 많지 않았다. 대부분 광부들이 몇 달 일 하고 그만두고 떠나는 경우가 비일비재했다. 회사는 안정적인 노동력을 확보할 필요를 느꼈다. 게다가 세계 1차 대전으로 구리 산업이 커지면서 더 많은 인력이 필요하게 됐다. 1915년에 회사는 새로운 시스템을 계획하게 되고, 그것이 수웰을 하나의 '도시'로 만드는 계기가 되었다.

"집, 의료, 교육…. 모든 것이 무료였다."

수웰로 이주를 장려하기 위해 회사가 제시한 파격적 조건이었다. 필요한 모든 것이 무료로 제공되었고, 모든 것이 수웰 안에 있었다. 대신 최소 1년 계약이 되어야 했고, 가족과 함께 이주하는 것이 의무였다. 이런 조건으로 점점 수웰로 이주해 오는 광산 노동자들이 늘어났고 1960년대에는 거의 1만 5000명이 넘는 사람들이 이곳에 살면서 그야말로 도시의 모습을 갖추었다.

"당시 수웰에 살던 사람은 일 년만 일을 해도 다른 지역에 집 하나는 거뜬히 장만할 수 있었다"라며 "그러다 보니 많은 사람에게 수웰은 마치 꿈의 도시와 같았다"고 가이드는 덧붙였다.

수웰의 건물은 목조건물로 당시 필요 목조를 모두 미국에서 들여왔다.
 수웰의 건물은 목조건물로 당시 필요 목조를 모두 미국에서 들여왔다.
ⓒ 홍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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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데스 산맥 안에 존재하던 전혀 다른 삶

투어 중 도시 안에 복원되어 남아있는 볼링장이나 수영장 같은 시설들을 볼 수 있었다. 이처럼 당시 도시 안에는 다양한 편의 시설들이 갖추어져 있었다. 게다가 모든 시설은 미국 시스템을 갖춘, 당시 칠레의 다른 도시에서는 보기 힘든 시설이었다고 한다.

예를 들어 1917년에 만들어진 볼링장은 칠레 최초의 볼링장이었고, 1963년 칠레 최초 국내 볼링 경기가 이곳에서 개최되기도 했다. 병원은 당시뿐 아니라 오랫동안 남미에서 '가장 현대적'이라는 타이틀을 달고 있었다. 6개가 넘는 기초교육시설 그리고 당시 칠레 산티아고에도 없던 영화관까지 있었다고 한다. 수웰 안에는 그 도시 안에서만 누릴 수 있는 것들과 함께 안데스 산맥 안의 전혀 다른 도시의 삶을 갖고 있었다.

수웰 사람들이 여가를 즐겼던 수영장과 볼링장
 수웰 사람들이 여가를 즐겼던 수영장과 볼링장
ⓒ 홍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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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은 편의 시설들이 공유되었지만, 도시 안에 두 개의 문화가 명확히 분리되어 있었다. 주로 관리급이었던 미국인이 거주하던 구역과 칠레 광산 노동자들의 구역은 엄격히 구별되어 있었고, 도시의 규칙들 대부분은 미국인에 의해 관리됐다."

외부인들이 도시를 방문할 때도 15일 동안 한시적으로 밖에 머물 수 없었다고 가이드는 설명했다. 도시를 넘어 하나의 제한구역과 같은 곳이기도 했다.

'꿈의 도시' 하지만 위험하고 고단한 환경

마치 지상낙원처럼 들리는 도시의 삶이지만 그렇다고 열악한 환경과 광산노동의 어려움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었다. 산 아래 있다 보니 집들은 높은 고지대를 따라 지어져 수많은 계단을 오르락내리락해야 해서 이 도시는 '계단의 도시'로 불리기도 했다.

"당시 수웰 여성들의 다리가 가장 튼튼하다는 말도 있었다"며 투어에 참가한 한 할머니가 말해 주었다.

도시는 수백개의 계단으로 오르락 내리락 해야했다.
 도시는 수백개의 계단으로 오르락 내리락 해야했다.
ⓒ 홍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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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데스 산 바로 아래 있던 도시라 눈사태로부터 안전하지 못했는데 1944년 거대 눈사태로 125명의 인명피해가 있었다. 이후 산에 눈사태 방지시설을 만들어 위험을 방지했지만, 여전히 사람들은 겨울이면 크고 작은 눈사태에 항상 노출되어 있었다.

무엇보다 그 다음 해 1945년에 칠레 역사 안에서도 대형 사고로 기록되는 '연기의 비극', 혹은 '검은 죽음'이라 불리는 광산 사고가 있었다. 기름 캔을 녹이기 위해 불 위에 캔을 잠시 올려두었다가 폭파하면서 광산 안이 독가스로 가득 차서 하루 만에 355명의 사망자를 낸 사고였다. 이 사고로 당시 광산 노동의 안전문제에 대한 경각심이 일기도 했다.

사람들이 떠나고 기억으로만 남은 도시 수웰

왜 사람들은 수웰을 떠났을까. 이는 칠레 정부가 구리 산업을 국유화하면서 시작됐다. 1967년, 지분의 절반 이상을 매입한 칠레 정부는 1970년에 전면적으로 광산을 국유화했다. 이와 함께 아랫마을인 랑카구아에 주거지를 만들고 이주 정책이 이루어졌다. 더는 미국 회사가 유지하던 수웰의 시스템이 지속하지 않았다. 수웰에 살 이유가 없어진 노동자들은 산 아래로 내려오기 시작했고, 1986년 완전 철수와 함께 도시는 유령도시로 바뀌었다.

이후 한동안 잊힌 도시에는 예전에 살던 사람들이 몰래 들어가 건물들을 파손하여 자재들을 내다 팔고, 일부는 불태우는 등 오랜 시간 방치되었다. 이로 인해 한때 100여 채에 이르던 건물은 현재 30여 채밖에 남지 않았다.

이 사실을 뒤늦게 인지한 정부는 1998년 국가 유산으로 지정하고 도시 보호 정책을 세웠다. 일부 건물들을 보수 공사하는 등 유지작업을 하였고, 2006년 '20세기 최초 산업도시의 모델'로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어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다.

지금은 문화유산으로 도시의 삶은 사라진 채 그 모습만이 남았다.
 지금은 문화유산으로 도시의 삶은 사라진 채 그 모습만이 남았다.
ⓒ 홍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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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웰의 역사를 들으며 문득 수웰에 살던 사람들은 구리광산이 국유화되기 이전의 삶을 더 그리워하지는 않으냐는 의문이 들었다.

"아직도 많은 사람이 그곳의 기억을 마치 인생의 황금기로 기억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모든 것이 무료였다고 해도 모든 소유는 회사의 것이었고, 더는 일을 할 수 없게 되면 바로 그 도시를 떠나야 했다. 순간의 풍요는 있었지만, 지속적인 안정성은 없는 삶이었다."

수웰에서 태어나 유년시절을 그곳에서 보낸 마리오 가이드는 내 질문에 이렇게 답했다. 그리고 덧붙였다.

"수웰에서 지낸 유년시절을 생각하면 '좋았다'고 말할 수 있겠지만, 그 삶이 지속하였다면 과연 그 삶의 현재 역시 아름답기만 할까? 모든 것에 장·단점은 있기 마련이다."

전기세가 무료였기에 언제나 대낮처럼 불이 밝혀져 있었다는 이 도시의 불빛은 이제 사진 한 장 속에만 남아있다. 고된 노동과 부가 공존했던 한 도시의 기억을 그렇게 살짝 꺼내보는 시간이었다.

1930년대 수웰 모습. 365일 불이 꺼지지 않던 도시였다
 1930년대 수웰 모습. 365일 불이 꺼지지 않던 도시였다
ⓒ VTS Trave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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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편집ㅣ곽우신 기자



태그:#칠레 구리 광산마을, #수웰, #SEWEL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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