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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금씩 마음이 급해지고 있었다. 전세만기일은 다가오는데 마땅한 집은 없고, 강동구의 전세난은 연일 뉴스에서 보도되고 있고. 물론 정 안 되면 지난번 기사(장기전세주택 실패, 아예 재건축 아파트로 들어가?)에 썼듯 재건축 아파트로 들어가는 방법이 있었지만 그것은 최후의 선택이었다.

돌아다니다가 만났던 부동산 주인들은 너무 걱정 말라며, 그래도 희한하게 어쨌든 이사 갈 집은 나온다고 위로를 건넸지만 우리 부부는 당장 집을 구해야 하는 당사자로서 그 위로를 받아들일 여유조차 없었다.

그러던 어느 주말, 스마트폰으로 인터넷 검색을 하던 아내가 갑자기 호들갑을 떨며 내게로 달려왔다. 선사마을에 마땅한 집이 하나 나왔다는 것이었다. 아내는 처음 강동구에 와서도 늘 아파트를 떠나 마당 있는 집에 가고 싶다며 시간만 나면 강동구 외진 곳에 있는 오래된 전원주택단지를 돌아다녔는데 선사마을은 바로 그중의 하나였다.

낡지만 정겨운 20년 넘은 주택의 위용.
 낡지만 정겨운 20년 넘은 주택의 위용.
ⓒ 이희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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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장 부동산에 전화를 하는 아내. 부동산 사장은 1년여 전부터 요즘 젊은 사람들답지 않게 아파트보다 일반주택을 찾고 다녔다며 이내 아내를 알아보았고, 그 집에 대한 정보를 주었다. 만약 아내의 그런 시도가 없었더라면 선사마을 주택은 보여주지도 않았을 거라는 말을 덧붙이면서. 대부분의 젊은 사람들은 일반 주택의 경우 구경만 하지 실제 거래는 하지 않기 때문이라나.

부동산에서는 집을 다음 주 월요일에나 볼 수 있다고 했지만, 아내는 부동산 주인에게 우리가 보기 전 다른 사람들에게 보여주지 말라고 신신당부를 했다. 아내는 그만큼 간절했고, 사진만으로도 그 집을 마음에 들어 했다. 부동산 사장은 아내의 절박함에 감응했는지 그리하겠다고 약속했고 아내는 그제야 한숨 돌리는 듯했다.

과연 진짜 아내의 소원대로 그 집이 우리 집이 될 수 있을까?

가자, '마당 있는 집'으로... 아내의 선사마을 사랑

아내가 그리 가고싶어 하던 선사마을.
 아내가 그리 가고싶어 하던 선사마을.
ⓒ 강동구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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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요일, 아내와 함께 부동산 사장을 만나 선사마을을 찾았다. 집주인은 이 집에서 오래 살 줄 알았다며 집 떠나기를 무척이나 아쉬워했다. 그래서일까? 집은 1990년 초에 지어져 20년이 훌쩍 넘었음에도 불구하고 깨끗한 편이었다.

그동안 집주인들이 오래 살 생각으로 이곳저곳 손을 많이 봐왔기 때문인 것 같았는데, 그 전에 아내와 보고 다녔던 주공아파트들과 비교하면 천지 차이였다. 곧 재개발이 시작될 거라며 방치하는 집과 오랫동안 살 거라고 살피는 집의 차이였다.

아내는 집을 한 바퀴 둘러보더니 자기는 좋다며 내 의향을 물었다. 나만 괜찮다고 하면 당장이라도 가계약을 할 기세였지만 난 선뜻 결정할 수 없었다. 전세로 나온 공간이 너무 큰 까닭이었다. 1층과 2층을 통틀어 방 6개에 화장실 3개. 이렇게나 되는 공간을 관리한다는 것이 어디 쉬운 일인가.

주택의 2층 내부. 어떻게 써야 할지 모르겠는 공간.
 주택의 2층 내부. 어떻게 써야 할지 모르겠는 공간.
ⓒ 이희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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낡은 집의 빈 공간. 효율적이지 못한 공간 활용.
 낡은 집의 빈 공간. 효율적이지 못한 공간 활용.
ⓒ 이희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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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장 어렸을 때 단독주택에서 살던 당시 집을 관리하시느라 고생하시던 어머니, 아버지 모습이 떠올랐다. 비가 오면 지붕에서 물이 새는 탓에 그 밑에 세숫대야를 갖다 대어야 했고, 눈이 오면 서둘러 마당에 나가 층계부터 쓸어야 했으며, 주말에는 집안 곳곳을 돌아다니며 뭔가를 끊임없이 해야 했던 두 분. 그런데 그 고생을 바로 내가 해야 한다니 망설일 수밖에.

게다가 더욱 고민되는 것은 주택의 구조가 한 가족이 사용하기에 효율적이지 않다는 점이었다. 집이 20여 년 전 지어질 때부터 한 지붕 세 가족 이상을 염두에 뒀던 터라 내부 구조가 기형적이었다. 현재의 기준으로 어떤 방은 너무 커서, 또 어떤 방은 너무 작아서 사용하기 애매했다. 우리 가족만 쓴다면 일부 공간은 창고가 되거나 어설프게 방치될 가능성이 높았다.

그러나 그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 나는 아내에게 긍정의 사인을 보냈다. 잔디가 깔려 있는 너른 마당 때문이었다. 서울에서 이런 마당이 있는 집에서 살 수 있다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다. 아이들은 마당을 보더니 벌써부터 흥분해서 뛰어다니기 시작했다. 아파트에서는 조금만 뛰어도 밑의 사람들 시끄러울까봐 눈치를 봐야했는데, 이렇게 우리만의 마당이 생긴다면 아이들이 마음껏 뛰어놀 수 있지 않을까?

아이들이 마당에서 뛰어놀 수 있다면 고생 정도야...

아내가 바라던 햇볕이 들어 이불을 말릴 수 있는 마당.
 아내가 바라던 햇볕이 들어 이불을 말릴 수 있는 마당.
ⓒ 정가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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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들에게 마당이란 마음 놓고 놀 수 있는 곳.
 아이들에게 마당이란 마음 놓고 놀 수 있는 곳.
ⓒ 정가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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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이켜보면 나도 역시 어렸을 때 마당에서 뛰어 놀았던 것이 가장 기억에 남았다. 잔디밭에서 강아지랑 뛰어놀고 그네도 탔던 그때. 봄이 되면 라일락 향기를 맡았고 여름에는 우리 담 너머 뻗어있는 옆집 앵두나무 열매를 따먹었으며, 가을에는 대추를 따고, 겨울에는 눈사람을 만들어서 놀던 그 공간.

물론 아버지와 어머니는 매일 잔디밭의 잡초를 뽑으셔야 했고, 쥐를 잡아야 했으며, 나무 가지치기 등 온갖 잡무를 하셔야 했지만 어디 어린 눈에 그런 고생이 보였던가. 마냥 그 마당이 좋을 뿐이었다. 그래, 내 아이들도 마찬가지겠지. 내가 좀 고생하더라도 나의 자식들이 그 마당에서 많을 걸 누리며 살 수 있다면 나도 내 부모가 그랬던 것처럼 나의 수고를 감내할 수밖에. 시골 더 큰 마당에서 뛰어 놀았던 아내 역시 나와 같은 마음이겠지.

내가 알겠다고 하자 아내는 뛸 듯이 기뻐하며 그 자리에서 당장 집을 계약했다. 장장 3개월 넘게 걸린 전셋집 구하기가 끝나는 순간이었다. 드디어 이렇게 이사 갈 곳이 생기는구나.

집에 오는 길 아내에게 마당이 있으니 개를 키우는 건 어떻겠냐며 은근히 물었더니 아내가 싫다며 웃었다. 계약 전까지 그리 망설이더니 벌써 개 키울 생각이냐는 핀잔 아닌 핀잔과 함께. 그러면 어떠한가. 이제 곧 마당 있는 집에서 살게 된 걸.

막상 계약을 하고 돌아왔지만 그것은 또 다른 고민의 시작이었다. 바로 돈이었다. 선사마을 집의 전셋값은 우리가 살고 있는 전셋값보다 비쌌는데, 비자금을 탈탈 털어도 좀 부족할 정도였다. 아파트 전셋값이 2년 만에 1억 3천만 원 오른 걸 감안한다면 그래도 양호한 편이었지만 어쨌든 현재 우리의 전셋값 이상이었다. 결국 집 문제가 돈 문제로 치환된 것이다.

그럼 이 모자란 돈을 어떻게 구한다? 우리는 우선 전전세를 떠올렸다. 집을 봤을 때부터 전전세를 생각했기에 가능한 계약이었다. 집이 워낙 크고, 구조 자체가 다가구였기에 충분히 고려해 볼 만한 조건이었다. 전전세를 놓고 우리가 부족한 돈만큼 보증금을 받는다면 어쨌든 그 모든 것이 깨끗이 해결되지 않을까? 전전세를 들은 집주인은 썩 내켜하지 않았지만 다행히 그렇다고 완강하게 반대하지도 않았다. 구조만 바꾸지 않는 선에서 알아서 하라고 했다.

뛰어!! 이제 눈치보지 말고 뛰어라!!!
 뛰어!! 이제 눈치보지 말고 뛰어라!!!
ⓒ 이희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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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여기저기 전전세 이야기를 하고 다니기 시작했다. 양가에 아직 미혼인 친척들, 특히 고시원에서 지내고 있는 이들부터 시작해서 동네 이웃들에게까지 우리의 사정을 이야기했다. 많은 이들이 우리의 이야기에 관심을 보였는데 특히 그중에서도 어린 아이들을 기르는 부부들이 솔깃해 했다. 보증금도 비싼 편이 아니었지만, 무엇보다 마당이 매력적이었기 때문이었다.

또한 아내는 아예 그 공간에 방과후학교 어린이집을 만드는 건 어떠냐고 이야기했다. 어차피 까꿍이가 내년이면 초등학생이고 방과후학교를 다녀야 하는데 그동안 우리가 배운 사회적경제 방식으로 우리 집에서 이 문제를 해결하자고 했다. 아내의 아이디어를 들은 주위 사람들의 반응 역시 나쁘지 않은 편이었다.

결국, 우리가 기댄 곳은 양가의 부모님

그러나 며칠 후 우리는 그 모든 생각을 접어야 했다. 집주인의 이사 후 다시 가서 보니 집은 생각했던 것 보다 많이 낡았었고, 특히 그동안 세를 놓았던 공간이 엉망이었다. 우리가 전전세를 놓기 위해서는 화장실부터 해서 싱크대까지 대대적으로 손을 봐야 할 정도였는데 이는 배꼽이 배보다 큰 경우였다. 또한 방과후학교로 사용하기에는 공간이 너무 좁다는 것이 전문가의 의견이었다.

페인트칠 하는 아내. 오래된 집은 손이 많이 간다.
 페인트칠 하는 아내. 오래된 집은 손이 많이 간다.
ⓒ 이희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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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절할 수밖에 없었다. 전전세를 놓을 수 없다니. 물론 부족한 돈이 아주 많은 액수가 아닌 만큼 예전이라면 5년 정도 아끼고 살면 모두 갚을 수 있었겠지만, 연봉의 절반을 포기하고 사회적경제 분야에서 일하고 있는 현재로선 거의 불가능한 일이었다.

자, 그럼 이제 어찌한다? 당장 현재 하는 일을 그만두고 다시 영리기업으로 가야 하나? 아님 은행에 손을 벌려야 하나? 집을 사는 것도 아니고 전셋값을 올리기 위해 은행 대출을 한다는 것이 맞는 걸까?

그렇게 고민이 깊어갈 무렵, 구원의 손길이 다가왔으니, 바로 양가의 부모님이었다. 안 그래도 강동구 전셋값 소식 때문에 걱정이었는데 그렇게라도 갈 만한 곳을 찾았으니 다행이라시며, 양가에서 보태 모자란 부분을 채워주시겠노라고 선뜻 말씀하셨다.

부끄러웠다. 얼추 마흔에 가까워 가는 나이에 부모님의 도움을 받는다는 것 자체가 낯 뜨거운 일이었다. 다른 집 자식들은 오히려 용돈을 드리는데 우리는 드리기는커녕 오히려 목돈을 받고 있으니 어찌 그렇지 않겠는가.

게다가 그 돈이 어떤 돈인가. 당신들이 노후보장을 위해 먹을 거 덜 먹고, 입을 거 덜 입어서 저축하신 돈 아니던가. 혹자들이야 부모 잘 둬서 전셋값 걱정도 없겠다고 푸념하겠지만, 바로 옆에서 그 돈을 어떻게 모아 왔는지, 그리고 결코 당신들의 생활이 넉넉하지 않음을 지켜봤던 나로서는 그 돈을 냉큼 받는다는 게 무척이나 어려운 일이었다.

그러나 어찌하겠는가. 지금은 부모님들의 배려를 거절할 만한 상황이 아니었다. 이사 날짜는 다가오고 있었고, 우리는 어떻게든 돈을 구해야만 했었다. 결국 우리는 부끄럽고 미안한 감정은 차치하고, 오롯이 고마워하며 그 돈을 받기로 했다. 훗날 당신들이 연세가 더 들어 생활이 힘드실 때는 내가 모셔야 된다는 각오를 다지면서. 그게 지금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이었다.

여기가 이제 우리 집이야. 아파트보다 찾기 쉽지?
 여기가 이제 우리 집이야. 아파트보다 찾기 쉽지?
ⓒ 이희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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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우리는 우여곡절 끝에 집을 얻게 되었고, 이제 이사 날짜만 기다리게 되었다. 아내는 자신이 평생 꿈 꿔오던 집을 얻게 되었다며, 될 수 있으면 이곳에서 오래 살고 싶다고 했다.

비록 20년이 넘은 낡은 주택이지만 넓은 마당이 있고, 아이들의 초등학교가 도보로 10분이며, 주위를 둘러보면 회색빛 보다 녹색이 많아 좋은 선사마을 집. 그때까지는 모든 게 해결된 줄로만 알았다. 그때까지는.

○ 편집ㅣ박혜경 기자



태그:#육아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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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와 사회학, 북한학을 전공한 사회학도입니다. 물류와 사회적경제 분야에서 일을 했었고, 2022년 강동구의회 의원이 되었습니다. 일상의 정치, 정치의 일상화를 꿈꾸는 17년차 오마이뉴스 시민기자로서, 더 나은 사회를 위하여 제가 선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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