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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웃 학교 박 선생(가명)은 1남 2녀의 아빠다. 사랑하는 부인과 아이들을 위해 가끔 '특별요리'를 즐기는 '상남자(상 차리는 남자)'다. 몇 달 전 순두부를 직접 만들어 장모를 접대했다. 장모 눈이 번쩍 뜨이셨다. 맛나게 잡수시더니 한 번 더 드시고 싶어 하는 눈치를 보이셨다. 평소 서먹했던 관계가 확 풀렸단다.

수제 순두부를 만드는 박 선생에 비할 바 아니지만 나도 나름 '상남자'다. 중학교 2학년 2학기 때부터 자취를 했다. 부엌 일이 자연스럽다. 아내는 나보다 일찍 출근하고 늦게 퇴근한다. 밥상을 준비할 때가 많다. 세 아이 아침 밥상은 완전히 내 차지다.

'주특기' 요리는 된장찌개다. 대개 다시마로 육수를 내 끓인다. 귀찮을 때는 곧장 맹물에 된장을 푼다. 그렇게 끓여도 스스로 맛에 취한다. 듬뿍 다져 넣은 생마늘과 건버섯 등 양념 비법 덕분이다. 묵은지도 자주 볶는다. 들기름으로 볶아 내놓으면 아이들이 무척 좋아한다. 달걀찜은 수준급이라 자부한다. 아내가 하는 달걀찜은 너무 짜거나 싱겁다. 바닥에 눌어붙을 때도 있다.

먹방, 쿡방이 유행이다. 부엌을 기웃거리는 남자들이 늘었다. 유명 남성 요리사들 힘이 크다. 앞치마를 두르고 광고에 나와 남자들을 유혹한다. 가히 '상남자 현상'이라 할 만하다.

상남자 다섯의 좌충우돌 상차림 이야기

(조영학 외 지음 / 메디치 펴냄 / 2015.09. / 1만3500원)
▲ <상(차리는) 남자? 상남자!> (조영학 외 지음 / 메디치 펴냄 / 2015.09. / 1만3500원)
ⓒ 메디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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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차리는) 남자? 상남자!>(아래 '<상남자>')는 상남자 다섯이 썼다. 두 중년 남자(소설번역가 조영학, 전업주부 이충노)의 '구질구질한 궁상'을 보고 감읍한 메디치 출판사 김현종 대표가 제안해 기획했다. 먹방, 쿡방이 유행하는 세상에 진짜 밥상을 차리는 사내들의 진짜 이야기를 듣고 싶어서였다고 한다.

유행에 편승한 삿된 요리책은 아니다. 책에는 가족을 위해 밥상을 차리는 다섯 남자의 따끈따끈하고 푸근한 밥상 이야기가 담겨 있다. 그런 점에서 이 책은 "상남자 5인방의 솔직한 가족사"(8쪽)이자 "(한 끼 식사를) 정성스럽게 차려내는 평범한 사내들의 무용담"(8쪽)이다.

다섯 상남자의 '활약상'을 보자. 거짓말을 하고 밤늦게 친구들을 데리고 집으로 들이닥치는 '사고'를 친 조영학은 아내에게 용서를 구하기 위해 부엌살림을 도맡았다. 그가 용서를 빌며 한 말은 "행복하게 해줄게"가 아니라 "앞으로 부엌일은 내가 알아서 할게"였다.

"누군가 내게 밥상의 의미를 묻는다면, 난 '보은의 밥상'이라고 말하고 싶다. 아내는 어느 모로 보나 부족한 나를 만나고 나를 사랑하고 이해하고 위하고 용서하고…. 무엇보다 생전 처음으로 행복하게 만들어주었다. 그리고 이제 난 그 은혜에 조금이나마 밥상으로 보답하고 있다." - <상남자> 본문 47쪽 중에서

그는 스스로 "아내를 위한, 아내에 의한, 아내의 남자"로 규정한다. 밥상을 차려 아내를 행복하게 해주는 일이 다른 어느 때도 경험하지 못한 최고의 행복이라고 여긴다. 그만의 방식으로 수제 맥주와 막걸리를 만드는 '용기'의 원천이리라.

강성민 글항아리 출판사 대표는 "출판 일이 먼저인지 주방 일이 먼저인지 모를 정도"로 음식에 미쳐 있다. 아내로부터 "내가 좋아 요리가 좋아?"라는 말을 들을 정도다. 유정훈 변호사는 '환대의 식탁'을 바란다. 자신이 만든 맛있는 음식을 먹고 다른 사람이 만족할 때 가장 기쁜 순간이라고 고백한다.

"예수가 베푸는 식탁은 소박한 것이었을 것이다. 들판에 모인 사람은 많은데, 가진 것은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에 불과할 때도 있었다. 하지만 그의 식탁은 세리와 죄인을 구별없이 환대하는 식탁이기에 아름다웠다. 내가 차리는 식탁 또한 나의 즐거움만을 위한 것이 아닌, 언제까지나 '환대의 식탁'이길 바란다." - <상남자> 본문 87쪽 중에서

전업주부 이충노의 이야기는 뭉클하다. 잘 나가는 전략컨설턴트였던 그는 기사가 딸린 고급 승용차를 타고 출퇴근하는 중산층이었다. 그의 가족은 서울 반포에 있는 70평대 유명 아파트에서 가사도우미 아주머니의 돌봄을 받으며 지냈다.

'강남 스타일'의 일진 아들이 사고를 쳐 강제전학을 당하게 되었다. 그날 밤 아들과 의미 없는 말다툼을 이어가다 아들 뺨을 한 대 때렸다. 아들이 거친 말을 내뱉으며 대들었다. 밤을 꼬박 새웠다. 이틀 뒤 옷가지 몇 개를 트렁크에 챙겨 넣고 무작정 경기 양평으로 이사했다. 다세대주택 꼭대기 층에 15평짜리 집을 월세로 얻었다.

"아빠의 힘든 일상이 매일매일 반복되는 동안에도 아들은 제대로 먹지 않았다. 나는 서운했지만 한 번도 아들을 나무라지 않았다. 그저 아들이 남긴 음식을 꾸역꾸역 먹었고 다시 새 반찬으로 아들의 밥상을 차렸다. 삼시 세끼 오첩반상을 고집했다." - <상남자> 본문 146쪽 중에서

이충노는 아들을 위한 오첩반상을 '간절한 기도'에 빗댔다. 그만큼 간절했고, 또 그만큼 밀려드는 자괴감을 물리칠 수 없었다. 크고 작은 집안일을 혼자 서툴게 하는 초보 전업주부로 지내면서 자신이 "누군가의 도움이 없이는 무엇 하나도 제대로 할 수 없는 불량시민"(147쪽)임을 처음 알았다.

그렇게 묵묵히 전업주부로 살았다. 아들을 뒷바라지하면서 "4년 동안 밥상을 마주하고 이야기를 나누었더니 다섯 뼘 밥상만큼 가까워졌다"(160쪽). 얼굴에 상처를 입고, 깊게 눌러쓴 모자챙 아래로 번뜩이는 눈빛과 무섭도록 차가운 표정을 내보이며 냉소적으로 말하던 아들 '은규'는 '은소밥'(은규를 위한 소박한 밥상)을 먹으며 해맑은 청년으로 바뀌었다. 밥상이 "훌륭한 소통의 매개"(160쪽)였다.

음식을 먹으며, 우리는 삶의 층을 쌓는다

고3 여름방학이었다. 유난히 뜨거웠던 그날, 보충수업을 마치고 자취방을 향하는 발걸음이 무거웠다. 종일 무더위와 씨름한 몸이 물먹은 솜 같았다. 저녁을 때우고 다시 학교로 가 야간자율학습을 해야 했다. 군내 나는 열무김치와 눅눅해진 멸치볶음이 떠올랐다. 배가 고팠는데도 도무지 입맛이 생기지 않았다.

어깨를 늘어뜨리고 자취방이 있는 2층으로 올라갔다. 어머니가 계셨다. 방에는 밥상이 차려져 있었다. 노릿하게 잘 익은 호박 부침개와 꼬막 무침과 갓 담근 열무김치가 따뜻한 밥 한 그릇과 함께 놓여 있었다. 모두 내가 좋아하는 반찬들이었다.

어머니가 반찬거리를 챙겨들고 왕복 2시간이 넘는 거리를 온 이유는 하나였다. 자취하며 고생하는 귀한 아들에게 따뜻한 밥 한 끼 차려 주기 위해서였다. 모든 끼니는 항상 최초이자 최후의 '사건'이다. 이 책에는 "다시는 돌아오지 않는 한 끼의 식사"라는 표현이 몇 군데에 등장한다. 내게는 그날 어머니가 차려준 밥상이 "다시는 돌아오지 않는 한 끼의 식사"였다.

밥상을 차려내고 거기 놓인 음식을 먹으며 삶의 층층을 쌓는다. 밥을 챙겨 먹는 일은 그저 생물학적인 식욕을 채우는 게 아니다. 관계이고 소통이며 사랑이다. 누군가에게 "다시는 돌아오지 않는 한 끼의 식사"를 챙겨준 적이 있는가. <상남자>를 보고 시도해보기를 권한다. 당신이 누군가로부터 밥상을 받기만 해온 남자라면 더욱.

○ 편집ㅣ곽우신 기자

덧붙이는 글 | <상(차리는) 남자? 상남자!>(조영학 외 지음 / 메디치 펴냄 / 2015.09. / 1만3500원)

이 기사는 정은균 시민기자의 오마이뉴스 블로그(blog.ohmynews.com/saesil)에도 함께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상(차리는)남자? 상남자! - 삶이 따뜻해지는 다섯 남자의 밥상 이야기

조영학.유정훈.강성민.이충노.황석희 지음, 메디치미디어(2015)


태그:#<상(차리는) 남자? 상남자!>, #집밥, #가족, #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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