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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근혜 대통령이 지난 23일부터 추석을 맞이해 부사관 이하 국군장병들에게 선물한 특별 간식이 논란을 일으켰다. 대통령의 하사 형식으로 제공된 특식이, 특식이라고 하기에 너무나 형편없는 수준이었기 때문이다(관련 기사 : 멸치 7마리, 대통령 특식 받고보니 '황당').

언론 보도에 따르면 장병 1명에게 실제 배급된 양은 멸치 스낵 2.5g, 김 가루 7.5g, 500원 동전 크기 약과 2.5개였다. 멸치 스낵과 김 가루와 약과를 합한 무게는 얼마나 될까? 시장에서 파는 송편 한 개가 25g 정도 나간다. 세 개를 합친 무게가 송편으로 치면 얼마나 될까? '간에 기별도 안 간다'는 속담은 이런 경우를 위해 준비된 것인지도 모르다.

국군장병이 56만 대군이라는 점을 고려해도, 이번 특식은 너무나 소량이다. 특식에 배정된 예산이 1인당 1554원이라고 하니, 이 금액으로 보나 위의 무게로 보나 부실한 특식임에는 의문의 여지가 없다.

물론, 주는 사람은 좋은 마음으로 줬을 것이다. 하지만 박 대통령이 사비로 주는 것도 아니고 국민의 돈으로 국민을 대신해서 국민을 위해 제공한 특식이라면, 국민의 위신과 대통령 자신의 체면을 봐서라도 좀 제대로 줬어야 하지 않나 하는 느낌을 감출 수 없다.

만약 대통령 지지율(여론조사 전문업체 '리얼미터'가 25일 발표한 9월 넷째 주 주간 정례조사 결과 46.6%가 긍정 답변. 박 대통령 국정 지지율은 9월 3주간 50%대였다)이 나쁜 상황에서 이런 엉터리 특식이 제공됐다면 박 대통령은 정치적 곤경을 겪었을 수도 있을 것이다. 먹는 것만큼 민감한 것도 없는데, 먹는 것으로 국민을 불쾌하게 만들면 자칫 정권의 명운을 걸 만한 상황이 생길 수도 있다.

음식으로 '장난'치다 혼쭐이 난 임금, 고종

 고종 임금.
 고종 임금.
ⓒ 위키피디어 백과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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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식이 정권의 명운을 가를 수도 있다는 말은 결코 과장이 아니다. 우리 역사에서도 실제 이런 일이 있었다. 먹을 것을 잘못 제공했다가 혼쭐이 난 임금이 있었다. 바로 구한말의 고종 임금이다. 1882년 임오군란은 고종과 조선 정부가 잘못 제공한 곡물로 인해 촉발된 사건이었다.

고종은 외국 자본에 맞서 조선 시장을 지키고자 한 아버지 흥선대원군에 대해 경쟁심을 갖고 있었다. 부인인 명성황후의 친정 사람들을 앞세워 대원군을 몰아낸 고종은, 아버지 시대를 청산할 목적으로 이른바 개화정책이라 불리는 시장개방정책을 시행했다.

이런 가운데 고종은 새로운 군사적 기반을 확충하고자, 1881년에 일본 정부의 제안에 따라 별기군이라 불리는 신식 군대를 창설했다. 이 부대에 입대한 사람들은 주로 상류층 자제들이었다. 부대 훈련장은 한양 남산 밑에 있었고 교관은 일본인 호리모토 레이조였다. 일본의 제안 때문에 창설되고 일본인 교관에 의해 훈련됐다고 해서 당시 사람들은 별기군을 왜(倭)별기라고도 불렀다.

별기군은 급료와 의복 면에서 기존 군대보다 훨씬 더 나은 대우를 받았다. 이 부대를 바라보는 백성들의 시선은 곱지 않았다. 안 그래도 일본에 대한 감정이 좋지 않은 상태에서, 일본과 관련이 있는 신식 부대가 고종 임금의 각별한 대우를 받게 됐으니 말이다. 구한말의 정치 비화집인 황현의 <매천야록>에서는, 별기군 때문에 당황하고 분개하는 한양 사람들의 분위기를 엿볼 수 있다.

고종의 개화정책은 서민층의 이익을 배려하지 않는 정책이었다. 서민층에 대한 고종의 무시는 별기군에 대한 편애와 구식 군대에 대한 차별로 나타났다. 별기군과 달리 구식 군대는 주로 서민층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구식 군대에 대한 차별은 장기간의 임금 체납으로 이어졌다. 당시의 군인 봉급은 쌀로 제공됐다. 대다수 사병이 미혼자인 지금의 군대와 달리, 당시의 군대에는 기혼자들이 많았다. 장기간의 임금 체불은 병사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서민 경제의 문제로 이어질 수밖에 없었다. 당시 임금 체불은 고종에 대한 지지율을 한층 더 떨어뜨리는 요인으로 작용했다.

그렇게 나라님에 원망이 쌓여가는 상태에서, 별기군이 창설된 이듬해인 1882년에는 가뭄도 심하고 쌀값 폭등도 심했다. 쌀값은 평소의 2, 3배로 폭등했다. 고종의 사돈이라는 지위를 이용해서 정권을 장악한 민씨 가문의 부정부패도 매우 심했다. 이래저래 군인들의 불만은 쌓여갔다.

이런 상태에서 음력으로는 고종 19년 6월 4일, 양력으로는 1882년 7월 18일에 갑자기 군인 봉급이 지급되었다. 무려 13개월 만에 나오는 봉급이었다. 나라 재정의 최종 책임자는 고종 임금이고 오랫동안 안 나오던 봉급이 갑자기 나왔으므로, 어찌 보면 이것은 고종이 하사하는 특별 봉급이었다고도 볼 수 있다.

그런데 13개월 만에 나오는 봉급이지만, 13개월 치가 아니라 한 달 치였다. 그렇더라도, 봉급을 받는 입장에서는 조금은 다행스러운 마음이 들었을 것이다. 당시 군인들에게, 봉급이 나온다는 소식은 7월의 무더운 날씨를 잠시나마 잊게 해주는 반가운 뉴스였을 것이다.

그런 사람 중 하나가 김춘영이라는 하급 군인이었다. 그는 서민층에 속하는 사람이었다. 아마 봉급 문제 때문에 속을 많이 태웠을 테다. 남대문 근처에서 봉급이 지급되었으므로, 그는 반가운 마음에 남대문 쪽으로 내달려갔을 것이다. 그런데 주목해야 할 사람은 김춘영 본인보다는 그의 아버지인 김장손이다. 당시 63세인 김장손은 왕십리에서 태어나 신촌에 거주하는 사람이었다. 잠시 뒤, 김장손의 활약상이 소개된다.

배급소에 도착한 김춘영은 줄을 선 채 기다렸을 것이다. 그런데 기대감에 찼을 그의 얼굴은 앞서 쌀을 받고 나오는 군인들을 보며 조금씩 변하지 않았을까. 쌀을 갖고 나오는 군인들의 표정은 좋지 않았을 테다. 13개월 만에 나온 한 달 치 봉급에 겨와 모래가 절반이나 섞여 있었으니 말이다.

그뿐 아니었다. 절반밖에 안 되는 쌀의 상당 부분도 썩은 상태였다. 실제로 먹을 게 별로 없었다. 이런 쌀로 송편을 몇 개나 만들 수 있었을지 모르겠지만, 사실상 거의 쓸모없는 봉급이었다.

오랜만에 받는 봉급을 마치 특식을 받는 기분으로 받았을 군인들은 완전히 농락당한 기분이 들었다. 간에 기별도 가지 않을 쌀을 받고 "이걸 누구 먹으라고 준 건가?"하며 분개했다. 김춘영도 역시 그랬다. 참을 수 없었다. 그래서 그는 동료 군인들과 함께 배급소 공무원들을 구타한 후 돌아갔다.

'임금의 특식'을 감사히 받지 않고 배급소 직원들을 구타한 군인들. 정부는 이들을 가만두지 않았다. 4일 뒤인 7월 22일, 정부는 폭행 가담자들을 잡아들였다. 김춘영도 당연히 포함됐다.

끌려간 김춘영 등이 곤장 몇십 대 맞고 귀가했다면 이 사건은 역사 교과서에 등장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정부가 사건을 키우고 말았다. 김춘영 등을 참수형에 처할 움직임을 보였다. 한양 시내에는 이들이 참수형에 처할 거라는 소문이 퍼져나갔다.

참수형을 포함한 사형은 임금만이 선고할 수 있었다. 참수형 추진 움직임이 나타났다는 것은, 고종 임금이 그런 마음을 품었음을 반영한다. 고종은 자신이 내린 특식에 불만을 품은 군인들을 괘씸하게 여겼다.

김춘영 등이 참수형을 당할 거라는 소문이 퍼지자, 구명운동을 주도한 이가 바로 아버지 김장손이다. 김장손은 군인과 그 가족들을 모아 7월 23일 평화적 시위를 열고 구속자 석방을 정부에 요구했다.

하지만 정부가 요구를 무시하고 해산 명령을 내리자, 김장손이 이끄는 사람들은 순식간에 무장봉기 세력으로 돌변했다. 이들은 집권층 인사들은 물론이고 별기군 교관인 호리모토 레이조를 포함한 일본인들에게도 위해를 가했다.

폭발한 서민의 불만, 정권 위기까지 불러오다

 운현궁. 서울시 종로구 운니동 소재.
 운현궁. 서울시 종로구 운니동 소재.
ⓒ 김종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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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순식간에 무장봉기가 발생할 수 있었던 것은, 고종의 개화정책에 대한 서민층의 불만이 많이 쌓여 있었기 때문이다. 이런 상태에서 임금과 정부가 먹는 것을 갖고 '장난'을 쳤기 때문에 대규모 무장봉기가 손쉽게 폭발할 수 있었다.

시위대는 한양의 치안을 장악한 뒤, 7월 24일 운현궁으로 달려가 대원군과 면담했다. 고종과 명성황후에 밀려 9년째 칩거 중인 대원군을 옹립하여 궁궐을 점령할 생각이었다. 대원군의 지지를 확보한 시위대는 고종이 있는 창덕궁을 장악하고 정국 주도권을 확보했다. 이로써 시민과 군인들이 이끄는 혁신정부가 등장하게 되었다.

사태가 이렇게까지 악화한 건 무분별한 개화정책으로 서민층의 불만을 샀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부실하고 무성의한 특식 제공으로 서민층의 불만에 불을 지폈기 때문이기도 하다. 만약 고종에 대한 지지율이 높은 상태에서 이런 일이 벌어졌다면 군란이 벌어지지 않았을 수도 있다. 하지만 지지율이 낮은 상태에서 지급된 엉터리 특식은, 정권을 위협하는 사태까지 초래했다.

고종이 은밀히 불러들인 청나라 군대가 한 달 뒤에 사건 가담자들을 진압하지 않았다면, 조선의 역사는 김장손이 이끄는 서민층에 의해 전혀 다른 방향으로 흘러갔을지도 모른다. 이런 역사적 선례를 보더라도, 최고 통치자는 군인에게 제공하는 것이건 일반 국민에게 제공하는 것이건 음식을 함부로 제공해서는 안 된다. 음식을 제공할 때만큼은 경건하고 조심스러운 태도를 갖지 않으면 안 된다.

○ 편집ㅣ곽우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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