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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007년 8월 문화관광부가 주최하고 한국방송영상산업진흥원(KBI)이 주관하는 '2007 방송엔터테인먼트 채용박람회'가 서울 대치동 서울무역전시컨벤션센터(SETEC)에서 열려 참가자들이 한 아나운서 아카데미 부스에서 상담을 하고 있다.
 지난 2007년 8월 문화관광부가 주최하고 한국방송영상산업진흥원(KBI)이 주관하는 '2007 방송엔터테인먼트 채용박람회'가 서울 대치동 서울무역전시컨벤션센터(SETEC)에서 열려 참가자들이 한 아나운서 아카데미 부스에서 상담을 하고 있다.
ⓒ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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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 나에게 "무슨 일 하세요?"라고 물으면, 나는 그냥 우물쭈물 거리며 "이것저것 하는 프리랜서예요"라고 답한다. 프리랜서면 백수를 떠올릴 수도 있겠지만, 정말 백수는 아니다.

"일 좀 그만 해"라고 버릇처럼 핀잔주시는 울 엄마는 내 목소리가 들리는 라디오, 내 얼굴이 나오는 TV를 꼭꼭 챙겨 보신다. 그렇다. 나는 무명 프리랜서 방송인(아나운서 겸 작가)이다.

무명이라 나 하나쯤은 이 바닥에 있어도 없어도 티 나지 않을 정도지만, 누가 뭐래도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 없을 만큼 단 하루의 게으름도 없이 꿋꿋하게 제자리를 지키고 있다. 왜냐, 내가 정말 사랑해서 선택한 직업이기 때문이다. 원했던 분야가 애초의 꿈과는 조금 다를 수는 있겠지만, 누군가 등 떠밀어 갖게 된 직업도 아니고, 정말 내가 되고 싶어 선택한 직업이다.

그래, 프리랜서가 되기 전까지는 공채 시험에 합격하는 것이 당연한 줄 알았다. 하지만 공채 인원은 한정되어 있고, 모든 일은 각각의 능력에 따라 주어지기 마련이다. 그릇이 달랐겠지. 아무튼 나는 프리랜서 방송인이다.

프리랜서는 돈 끌어모으면 안 되나요?

나는 입버릇처럼, 나를 불러주는 곳이라면 어디든 기꺼이 가겠다고 말해 왔다. 그렇게 적극적으로 해야 인맥도 넓어지고, 참여하는 방송도 많아진다는 속설(?) 때문이다. 물론 내가 생각한 '어디든'은 '아무데나'도 아니고, '아무렇게나'도 아니었다. 비록 유명하진 않지만, 나름의 신념을 가진 방송인으로서 그 열정을 바치고 싶다는 진심에서 우러난 말이었다. 그러나 나 홀로 생각한 마음의 소리일 뿐이었다. 정말 아무데나, 아무렇게나 부릴 수 있는 사람이 되어 버렸으니까.

"미혼이고 젊은데 뭐 그렇게 돈이 필요해?", "집 좀 살지 않아?", "소문에 돈 끌어 모은다는 얘기가 있던데."

미안하다, 우리 집은 좀 살지도 않고 나는 돈을 끌어 모은 적도 없다. 그런데 내 생계를 위해 돈이 필요한 것과 미혼이고 젊은 것은 무슨 상관인지 잘 모르겠다. 프리랜서 아나운서겸 작가로 활동하며 가장 많이 들은 말이다. 출연료나 원고료가 입금될 시기가 되면 특히 많이 듣게 되는, 나를 벙어리로 만들어 버리는 말이다.

경우에 따라 다르겠지만, 프리랜서는 일반 직장인들에 비해 좋은 벌이 기회가 자주 주어진다. 하지만 안정적이지도 않고, 나를 보호해 줄 수 있는 법이나 제도가 따로 마련되어 있지 않다. 있다 해도 절차가 복잡하거나 어떤 제도가 있는지 알아보기조차 쉽지 않다. 그래서 하고 싶은 말에 만 분의 일도 못하고 사는 경우가 다반사다. 물론, 직장인들도 직장생활에 애환이 많은 것으로 알고 있다. 우선 내 이야기를 풀기로 했으니, 좀 더 풀어 보려 한다. 

지난 2014년 9월 30일 오전 서울 압구정CGV에서 열린 영화 <카트>제작보고회에서 박혜진 아나운서가 사회를 보고 있다. <카트>는 주류영화계에서 처음 시도되는 '비정규직 노동자' 이야기로, 한국사회에서 심화되고 있는 노동현실의 문제를 다룬 작품이다.
▲ 박혜진 아나운서, '카트'에 공감 지난 2014년 9월 30일 오전 서울 압구정CGV에서 열린 영화 <카트>제작보고회에서 박혜진 아나운서가 사회를 보고 있다. <카트>는 주류영화계에서 처음 시도되는 '비정규직 노동자' 이야기로, 한국사회에서 심화되고 있는 노동현실의 문제를 다룬 작품이다.
ⓒ 이정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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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날 갑자기 협의도 없이 나의 출연료가 깎였다. 이유는 '회사 사정' 때문이었다. 연차는 쌓이는데 출연료가 깎인다는 것은 '나가'라는 소리거나, 정말 실력이 없거나(그럼 교체해야지)의 이유이지 않을까? 특별한 이유 없이 회사사정 때문이라고만 할 뿐이었다. 일개 대기업이 단돈 5만 원을 깎아 어디에 쓰려는 걸까 궁금하기도 하고, 어이없기도 했다. 그러나 계약서를 쓴 것도 아니니 따질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내 열정에 찬물을 부은 것에 분함을 느끼며 다른 곳으로 옮겨갈 기회를 노리는 방법 밖에 없었다. 그러면서 무슨 일은 그렇게 많이 시키는지...

또 연차와 능력에 맞게 임금을 협상할 수 없는 경우가 부지기수였다. 특히 아나운서 업무는 더더욱 치열했다. 인정 받는 경우도 있었지만, "너 말고도 싼 값에 하려는 애들이 많다"라고 하며 말도 안 되는 비용을 부르기도 했다. 그런데도 먹고 살기 위해 치사하지만 해야만 했다. 일을 취미로 하는 게 아니니 당연한 거다.

이런 상황이 올 때마다 이곳에 발을 들일 이름 모를 어린 후배들에게 미안함의 부채의식을 갖게 됐다. 누군가는 나의 전철을 밟아 말도 안 되는 비용에 자신의 열정을 팔고 있을 거라는 안쓰러움 때문이었다. 이 일을 위해, 부당한 임금을 받으면서도 별다른 항변을 못하는 게 억울했다.

프리랜서는 한 군데가 아닌 여러 곳에서 일을 하는 경우가 많다. 그렇다고 A직장에서 B직장에 소속된 것을 티내거나, 업무에 지장을 주는 경우는 없다. 그래서 체력적으로 많이 힘들고 강한 정신력이 요구되기도 한다. 어떤 일도 쉬운 일이 없다는 것쯤은 잘 안다.

"어젯밤에 뭐했어?" 이 질문은 하지 마세요

하지만, 최저 생계비도 안 될 돈을 주며 생색내는 모습에는 할 말을 잃었다. 남의 지갑 벌리는 일이 이렇게도 힘든 일일까? 꿈 한번 잘못 꿔서 이런 대가를 치러야만 하는 걸까. 정말 많은 생각을 하게 했다. 물론 그렇지 않은 곳도 많지만, 이런 곳이 산재해 있다는 게 얼마나 무서운가. 내가 아니라 해도 또 다른 누군가가 그 빈자리를 채우게 될 테니 말이다.

'열정'을 불사르는 중이라며 자기위안도 수천, 수만 번을 했다. 그럼에도 부당한 느낌을 지울 수는 없었다. 사흘도 채 안 되는 시간을 주고 15분짜리 구성물 4편을 만들어 오라는 오더가 내려오는가 하면(고료가 올라가는 것도 아니다), 일단 글부터 쓰고 원고료를 책정해 주는 황당한 일도 있었다. 새벽에 깨워 일 시키는 것을 너무도 당연시 여겼다. 그리고 다음 날 새벽, 녹화를 위해 무거운 눈꺼풀을 깨워 메이크업을 받고 있는 내 모습이 참 초라했다. 

내부 변심 문제로 된통 맞은 적도 있었다. 분명 그들과 협의한 대로 원고를 썼지만, 그들의 변심에 나는 원고료 한푼도 받지 못하는 꼴이 됐다. 좋은 글이었든 나쁜 글이었든, 본인들의 변심이든 노동의 대가를 치르는 것은 당연하지 않을까? 심한 업무 강도에 나는 제대로 먹지도, 싸지도, 자지도 못하고 그들의 요구사항을 들어줘야 했다. 그런데도 피곤기 있는 얼굴을 보이면 따뜻한 위로보단 "어젯밤에 뭐했어?", "그래서 되겠어" 식의 비아냥거림만 있었다. 차라리 진심으로 걱정해 줬다면 더 좋았을 텐데... 어젯밤 당신네들이 시킨 일을 하느라 못 잤단 말이다. 맡은 바 책임을 지겠다는 어리숙함 때문에 열정과 건강을 맞바꾸는 짓을 하고 있었다.

그렇다. 기계처럼 말하고, 공장처럼 찍어내듯 글을 쓰는 게 내 직업이었구나. 그래서 선뜻 내 직업이 '무엇이다'라고 당당하게 말하지 못했던 것 같다. 그토록 사랑하는 일을 택했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돈벌이가 시원찮아서도 아니고, 하는 일이 부끄러워서도 아니다. 정말 거지같은 취급을 받고 사는 내 스스로가 불쌍해서였다.
      
우리는 보다 인간답게 살아 가기 위해 일한다. 하지만, 그 이하의 취급을 당하며 일하기도 한다. 비단 나의 직업뿐만의 문제는 아닐 것이다. 지금 이 글을 함께 읽고 있는 누군가도 이하동문이라며 울분을 토할 것이고, 누군가는 울음에 목이 메여 소리조차도 나오지 않을 것이다. 이런 사회적 병폐에 대항할, 당연한 권리를 찾아줄, 한 목소리를 내줄, 진정한 '지붕'의 필요성을 절실하게 느낀다. 프리랜서에게 융숭한 대접을 해 달라는 것은 아니다. 그저 고용자로서 당연히 지켜줘야 할 의무가 있다는 것을 말하고 싶을 뿐이다.

그런데 나처럼 이렇게 힘없는 프리랜서 아나운서, 작가, 피디들을 위해 싸워줄 이가 있을까? 우리끼리 모여 한 목소리를 낸다고 들어줄까? 아니 들리기나 할까? 이 땅에는 너무 많은 것들이 힘의 논리로만 돌아가는 것 같다. 힘없는 사람을 보호해줄 제대로 된 법조차 존재하지 않으니 말이다. 부당한 대우를 받고도 신고조차 접수되지 않는다.

아, 그러고 보니 내년이 총선이다. 법의 사각지대의 놓여있는 프리랜서 노동자들을 보호해줄 대표가 300명 중에 꼭 한 명은 있었으면 좋겠다. 허울뿐인 법 새로 하나 제정해 주고, 맡은 바를 묵묵히 하는 그들의 어깨를 토닥여 줬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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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 이윤이 기자는 [바꿈, 세상을 바꾸는 꿈(www.change2020.org] 자원활동가 입니다.



태그:#비례대표확대, #프리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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