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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도 후회, 안가도 후회할 거라면 일단 떠나고 보자
▲ The Wild Elephant Trail을 달리는 필자 가도 후회, 안가도 후회할 거라면 일단 떠나고 보자
ⓒ 김경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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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활은 편리해졌지만 시간은 더 줄었다. 약은 많아졌지만 건강은 더 나빠졌고, 가진 것은 많아졌지만 가치는 더 줄었다. 자유는 늘었지만 열정은 더 줄었다. 굳이 제프 딕슨의 시, <우리 시대의 역설>을 인용하지 않더라도 모든 것이 늘어난 삶 속에서 내 안의 열정을 깨우는 노력은 턱없이 부족하다.

'바쁘니까 중년이다.'

맞다. 연초 주택과로 근무 부서를 옮기고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시간을 보냈다. 그래도 이따금 찾아오는 지독한 유혹은 떨쳐버릴 수 없었다. 세상은 문밖에 있다. 가도 후회, 안가도 후회할 거라면 일단 떠나고 보자.

동양의 진주, 인도양의 눈물로 불리는 섬 나라. 천혜의 자연 경관과 도시 곳곳에서 수많은 고대 유적을 만날 수 있는 신비의 나라. 영국 BBC가 죽기 전에 꼭 가봐야 할 여행지 50곳 중 하나로 선정한 나라 스리랑카.

2015년 3월 6일 저녁, <The Wild Elephant Trail 210km> 대회 출전을 위해 수도 콜롬보로 날아 들어갔다. 레이스는 3월 8일, 콜롬보에서 북동쪽으로 100km 떨어진 야파후와(Yapahuwa) 불교 사원에서 시작됐다. 5박 6일 동안 밀림과 늪, 산야와 임도 210km를 달려 세계 문화 유산으로 지정된 시기리아 락(Sigiriya Rock) 정상에서 종지부를 찍어야하는 지옥 레이스였다.

내 속에 숨은 무한한 잠재력

370m 높이의 시기리아 락 정상에는 궁전이 있다.
▲ 밀림 속 천상의 요새 시기리아 락 370m 높이의 시기리아 락 정상에는 궁전이 있다.
ⓒ 김경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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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은 평소에 자신의 능력이 어디까지인지 잘 모르고 살아가는 것 같다. 잘 알지 못하는 만큼 가진 능력조차 제대로 발휘하지 못하는 것이 사실이다. 나도 사막, 오지 레이스 모험 이전에 특별하게 뭔가를 잘하거나 내세울 만한 것이 없었다. 그래서 경기에 출전할 때마다 '과연 내가 호기심과 열정만 가지고 사막과 오지를 횡단할 수 있을까'하는 질문을 자신에게 수 없이 던지곤 했다. 그런데 인간에게는 자신도 모르는 무한한 잠재력이 있나 보다.

평균 기온 35도, 습도 85%를 웃도는 밀림에서 '35km-36km-41km-54km- 31km-13km'를 달리는 내내 온몸에선 쉴 새 없이 땀줄기가 분출했다. 레이스 첫째 날, 출발 선상을 벗어난 지 얼마 못 가 수풀에 가린 푸른 색의 원주민 집 벽면이 바닷가로 보였다. 헛것이 보인 것이다. 매일 아침, 미처 풀리지 않은 뻣뻣한 허벅지와 종아리로 뒤뚱거리며 출발선을 나섰다. 목덜미가 타들어 가고 등은 종일 흐르는 땀으로 흥건했다. 연신 뿌려 주는 원주민들의 물세례에 한 번 더 젖었다. 답례는 그저 "이수뚜띠(감사합니다)"를 되뇌는 것뿐이었다.

16세기 유럽 열강의 끊임 없는 침략으로 포르투갈, 네덜란드, 영국에 번갈아가며 식민지 지배를 받았다. 2004년 12월 몰아닥친 쓰나미로 4만 명이 죽거나 실종되고 1조 원에 가까운 피해를 입었다. 불과 10년 전, 종족 갈등의 내전은 종식됐지만 10만여 명이 희생됐다. 스리랑카 사람들의 생활 속에 친절과 겸손이 밴 건 그들의 아픈 기억과 무관해 보이지 않았다.

5박 6일간의 레이스는 야파후와 Yapahuwa 불교사원에서 시작됐다
▲ 스리랑카 210km 레이스 출발 장면 5박 6일간의 레이스는 야파후와 Yapahuwa 불교사원에서 시작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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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염과 습한 대기, 단조로운 주로와 숨죽인 바람까지. 최악의 코스는 이런 상황을 두고 하는 말인가 보다. 외통수 길목에는 영락 없이 물 웅덩이가 버티고 있었다. 건너 뛸 수도 피해 갈 수도 없는 습지와 수시로 맞닥뜨렸다.

걸쭉한 흙탕물에 몇 차례 발목을 담그면서 불어 튼 발가락 물집이 모두 터졌다. 물집과 상처 부위로 진흙과 이물질이 파고들었다. 그렇다고 양말을 갈아 신는 건 멍청한 짓이다. 경험상 신발을 벗는 순간 상태가 나아지기 커녕 통증과 상처는 외래 더 악화될 뿐이다.

숙면이 필요한 밤은 끈적댔다. 꿈쩍 않고 누워 있어도 등에서 배어나온 땀으로 매트가 축축이 젖었다. 방충망 덕에 모기 떼의 공격은 피했지만, 틈새를 파고드는 개미 군단의 공격은 어찌할 수 없었다. 돈으로 환산할 수 없는 일을 하고 있다. 내가 생각해도 미친 짓인데 남들이 보기엔 오죽할까. 그래도 홑씨 날리듯 밤하늘을 유영하는 어미별 파란 유성의 모습이 보기에 좋았다.

레이스 5일 째부터 비가 쏟아졌다. 오전 11시 40분, 20km 지점의 CP2를 벗어나자 빗방울이 더 굵어졌다. 순식간에 온 대지가 흥건히 젖었다. 레이스 내내 빗속을 뚫던 부탄에서의 악몽이 되살아났다. 손에 쥔 카메라를 배낭 속에 집어 넣고 아예 빗줄기에 온몸을 맡겼다. 천당과 지옥을 모두 경험했다. 천당엔 잠깐 들렀다 지옥에서 더 오래 머문 것 같다. 그래도 고통을 이겨낼 수 있던 건 나를 사랑했기 때문이다. 나는 나를 학대한 것이 아니다. 나는 나를 사랑한 것이 분명했다. 웃을 수 있기 때문이다. 선수들의 부상은 참혹했지만 한계를 딛고 일어섰기에 더 강해졌다.

선수들이 속도를 내며 연신 나를 추월했다. 남의 명령은 따르기 쉬워도 자신의 명령을 따르긴 어렵다. 자기의 명령을 아는 사람은 자신 밖에 없기 때문이다. 내 명령에 놀라 다시 일어나 발돋움을 했다. 빈정 상할 틈도 없이 내안의 다른 내가 등을 떼밀며 격려해 주었다.

'경수야~ 한눈팔지 말고, 네 길을 가면되는 거야.'

출발전 스님의 안전기원 의식으로 경기가 시작됐다
▲ 불교국가(69%)인 스리랑카는 승려 반, 평민 반 출발전 스님의 안전기원 의식으로 경기가 시작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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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수들은 답변은... 이수뚜띠(감사합니다)
▲ 친절한 원주민의 물세례 선수들은 답변은... 이수뚜띠(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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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5일동안 코끼리들이 다니는 길을 기웃거렸다.
▲ The Wild Elephant Trail 나는 5일동안 코끼리들이 다니는 길을 기웃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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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이스의 대미는 사방이 정글로 둘러싸인 370m 높이의 시기리아 락 위에서 종지부를 찍었다. 사자바위(Lion's Rock)로도 불리는 시기리아 락 정상에는 AD 5세기, 부왕 다츠세나왕을 시해하고 동생까지 축출하며 왕이 된 카샤파가 외부의 침입을 막기 위해 건설한 궁전이 있다.

곁눈질 할 새 없이 암벽에 그려진 프레스코화 미인도를 지나쳤다. 궁전으로 오르는 사자발 입구에 가까워오자 다시 비가 퍼부었다. 빗줄기를 가르며 정상을 향해 1860개의 계단을 거침 없이 뛰어 올랐다. 내가 내게 물었다. '너는 이제껏 살면서 단 한 번이라도 전력질주를 해 본적이 있었는가?'라고.

'하고 싶은 걸 다 하는 건 포기이고, 하고 싶은 걸 참는 건 도전이다.'

퍼붓던 비가 잠시 멈춘 사이 카메라맨이 내 앞에 나타났다.
▲ 폭우와 폭염 사이 퍼붓던 비가 잠시 멈춘 사이 카메라맨이 내 앞에 나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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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은 문밖에 있다.
▲ 나를 찾아 떠나는 도전! 세상은 문밖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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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상을 딛고 선 선수들은 더 강해졌다.
▲ 레이스 5일째, 선수들이 다시 주로에 섰다. 부상을 딛고 선 선수들은 더 강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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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기리아 락은 사자바위(Lion's Rock)로도 불린다
▲ 레이스 6일째, 밀림을 헤치고 시기리아 락 입구에 섰다 시기리아 락은 사자바위(Lion's Rock)로도 불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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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백 번 주저앉고 싶었다. 수십 번 쓰러질 뻔 했다. 그럼에도 내리쬐는 자외선을 가르고, 퍼붓는 빗속을 뚫으며 6일 동안 210km의 스리랑카 산야를 달려 기어코 천상의 요새, 시기리아 락 정상에 올랐다. 일찍이 탐험가 마르코 폴로가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섬'이라고 극찬한 곳.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섬에 내가 서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섬에 내가 서있기 때문이다.
▲ 웃을 수 있어 행복하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섬에 내가 서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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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은 이제껏 살면서 단 한번이라도 전력질주를 해 본적이 있는가?
▲ 1860개의 계단을 뛰쳐 올라 선 시기리아 락 정상 당신은 이제껏 살면서 단 한번이라도 전력질주를 해 본적이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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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그:#스리랑카 , #오지레이스 , #김경수 , #도전 , #직장인모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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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여행을 핑계삼아 지구상 곳곳의 사막과 오지를 넘나드는 조금은 독특한 경험을 하고 있다. 사람들은 나를 오지레이서라고 부르지만 나는 직장인모험가로 불리는 것이 좋다. <오마이뉴스>를 통해 지난 19년 넘게 사막과 오지에서 인간의 한계와 사선을 넘나들며 겪었던 인생의 희노애락과 삶의 지혜를 독자들과 공유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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