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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전 우체국에 들렀을 때 겪은 일입니다. 등기우편을 보내려고 접수창구에 서서 기다리고 있는데, 바로 옆 택배 창구에 중년의 아주머니가 택배 접수를 하고 있었습니다. 군에 있는 아들에게 보내는 물건이었습니다. 우체국 직원이 내용물이 뭔지 물어보더군요.

아주머니는 "화장품"이라고 대답했습니다. 요즘은 군대 간 젊은 병사들이 스킨, 로션, 선크림 등을 일상적으로 사용하기 때문에 처음엔 그러려니 했습니다. 저도 아들 녀석이 군 복무 중이고, 휴가 나오면 스킨·로션·선크림을 사가는 걸 봤기 때문입니다.

심지어 입대날, 훈련소에 가져가는 물품 중에도 선크림이 필수 품목에 들어있더군요. 훈련소에서 난생처음 얼굴은 물론이고 귀까지 새카맣게 그을리고, 몇 번이나 껍질이 벗겨졌던 제 군대 시절과 비교해보니 그야말로 격세지감이었습니다. 그런데 이어지는 대화를 들어보니 깜짝 놀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택배 상자에 화장품이 들었다는 이야기를 듣고 우체국 직원은 "군에 보내는 택배인데 화장품이 들었나 봐요?"라고 다시 물었습니다. 그녀도 곧 아들이 군 입대를 앞두고 있어서 물어본다고 하더군요. 아주머니는 "군대 간 아들 녀석이 스킨·로션·선크림 같은 걸 사서 보내달라고 해요, 이번에는 위장크림도 들어 있어요"라고 말했습니다. 위장크림이 뭔지 아실 겁니다. 군인들이 훈련이나 작전을 할 때 사용하는 겁니다.

위장크림 보내는 엄마, 당황스럽네요

지난 2013년 6월 25일 경기도 연천군 미산면에서 육군 병사가 얼굴을 위장하고 있는 모습.
 지난 2013년 6월 25일 경기도 연천군 미산면에서 육군 병사가 얼굴을 위장하고 있는 모습.
ⓒ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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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군 생활을 했던 30년 전에는 위장크림 대신 나무나 종이를 태워 얼굴에 시커멓게 칠하곤 했습니다. 큰 훈련이나 작전이 있을 때만 크레파스처럼 생긴 위장크림을 바를 수 있었지요.

우체국 직원은 "위장크림은 어디서 팔아요? 군대에서나 사용하는 걸 파는 데가 있어요?"라고 다시 묻더군요. 아주머니는 "마산 창동에 가면 팔아요, 더OOO샵에서 샀어요"라고 답했습니다. 옆에서 듣고 있던 저와 우체국 직원도 모두 깜짝 놀라서 동시에 물었습니다.

"아니, 요즘엔 엄마가 군대 간 아들에게 위장크림도 사서 보내준다는 말입니까?"

그랬더니, 아주머니 왈.

"아들이 군용 위장크림을 바르면 피부에 트러블이 생긴다고 하더라고요. 화장품 가게에서 위장크림을 사달라고 해서 보내는 거예요."

어이가 없더군요. 스킨·로션·선크림 정도야 사서 보낼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만, 훈련이나 작전 때 사용하는 위장크림까지 이른바 '사제품'을 사서 보내야 한다는 사실이 황당하더군요.

수천억 원씩 하는 전투기 한 대만 줄여도 군용 위장크림을 얼마든지 좋은 제품으로 바꿀 수 있을 텐데요. 게다가 군용이 품질이 나쁘면, 국방부에 품질 개선이 필요하다고 요구해야지, 위장크림을 집에서 사서 보내는 건 아니라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위장크림 틈새시장' 공략한 화장품 업체들

화장품 회사의 위장크림을 판매중인 인터넷 쇼핑몰
 화장품 회사의 위장크림을 판매중인 인터넷 쇼핑몰
ⓒ 이윤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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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식이면 시중에 떠도는 농담처럼 '군대 갈 때 총도 사줘야' 할지 모릅니다. 만약 전쟁이라도 나면 집에서 더 좋은 개인화기를 사서 보내줘야 할지도 모르는 판국이죠. 아~ 실제로 이라크 전쟁 당시에 미군들도 집에서 성능이 좋은 '방탄복'을 사서 보낸다는 뉴스를 본 기억이 떠오르기는 하네요(2004년 3월 미 육군 조사 결과 내용).

우체국에서 돌아와 인터넷 검색을 해봤습니다. 여러 화장품 회사에서 만든 위장크림을 소개하는 블로그와 광고가 적지 않게 쏟아지더군요. 인터넷 쇼핑몰을 검색해보니 유명 화장품 회사들이 앞다퉈 위장크림을 출시했더군요.

블로그와 인터넷 쇼핑몰을 살펴보니 화장품 회사의 상술과 마케팅이 한몫한 것으로 보입니다. 젊은 병사들에게 "군용은 품질이 안 좋다, 위장크림도 화장품 회사가 만든 것을 써라"라고 광고를 했더군요.

블로그 리뷰를 읽어봤습니다. "군용 위장 크림은 내다 버려라" "언제 만든 제품인지 유통기한도 알 수 없다" "허접하기 이를 데 없다" "피부를 망치고 싶으면 그냥 써라" 이런 글들이 수두룩했습니다.

실제로 군용 위장크림의 품질이 안 좋을 수도 있겠지만, 화장품 회사가 색조 화장품을 판매하기 위해 젊은 병사들을 위한 제품을 만들어 적극적인 마케팅을 펼치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어이가 없었습니다. 자본주의 상술은 끝 간 데가 없다 싶었습니다.

그렇게 많은 돈 쓰면서... 위장크림도 사게 만들다뇨

위장크림을 소개하는 블로그 리뷰
 위장크림을 소개하는 블로그 리뷰
ⓒ 이윤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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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 화장품 시장이 포화 상태에 이르자 남성 화장품 시장을 새롭게 개척한 업체들이 입대 장병을 위한 맞춤형 화장품을 판매하는 것으로 읽힙니다. 화장품 회사들의 광고를 보니 '피부 보호 성분을 함유한 안심 처방 3색 위장크림' 등의 문구가 적혀 있더군요.

예컨대 화장품 회사들은 이른바 색조 화장품의 하나로 위장크림을 만들어내 판매하고 있었습니다. 한 현역 병사가 블로그에 쓴 제품 리뷰를 읽어 보니 시중에 판매되는 화장품급의 위장크림만 열 종류 이상 되는 것 같았습니다.

2015년 기준으로 우리나라 1년 국방예산은 37조4560억 원이나 됩니다. 이 막대한 돈을 국방예산으로 쏟아붓는데, 병사들은 엄마에게 "위장크림 사주세요"라고 전화를 합니다. 한심하지 않나요? 모든 병사들의 위장크림을 바꿔주는 데 그렇게 큰돈이 들까요?

인터넷 쇼핑몰 소매가격 기준으로만 해도 60만 명 분의 위장크림은 3억 원가량 됩니다. 소매가격이 아니라 경쟁 입찰로 대규모 납품받으면 값은 더 싸질 것입니다. 국방부는 입대한 장병들에게 훈련·작전수행에 필요한 물품을 민간에서 사달라고 조르는 일이 벌어지지 않게끔 조치하면 좋겠습니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제 블로그(www.ymca.pe.kr)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태그:#위장크림, #국방부, #화장품, #군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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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YMCA 사무총장으로 일하며 대안교육, 주민자치, 시민운동, 소비자운동, 자연의학, 공동체 운동에 관심 많음. 오마이뉴스 시민기자로 활동하며 2월 22일상(2007), 뉴스게릴라상(2008)수상, 시민기자 명예의 숲 으뜸상(2009. 10), 시민기자 명예의 숲 오름상(2013..2)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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