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우 조정석

배우 조정석 ⓒ 문화창고


배우 조정석은 한 작품이 끝나면 자신의 역할에서 빨리 벗어나는 편이었다. 사춘기의 방황을 견디지 못해 스스로 목숨을 끊는 인물을 연기했던 때에도(뮤지컬 <스프링 어웨이크닝>), 사랑하는 사람과 나라를 지키기 위해 이중첩자를 자청하다 죽음을 맞았던 때에도(MBC <더킹 투하츠>), 조정석은 자신의 역할에 한동안 잠겨 있다가도 또 언제 그랬냐는 듯 평소의 모습으로 돌아왔다. 스스로도 "생각보다 빨리 인물에서 빠져나오는 것 같다"고 평했을 정도다.

그런데 이번엔 좀 달랐다. tvN <오 나의 귀신님>를 마치고 지난달 25일 서울 용산구 이태원동에서 만난 조정석은 "(역할을) 놓을 때도 됐는데, 이번엔 조금 천천히 놓고 싶다"는 말부터 꺼냈다.

"그 정도로 현장이 행복했어요. 배우들과 스태프가 서로 입에 침이 마르도록 '행복하고 좋았다'는 말을 주고받았죠. 모든 것들이 다 맞아떨어지는 느낌이었어요. '이런 작품은 또 언제 만날까'라는 생각이었죠."

그의 말처럼 <오 나의 귀신님>은 시청자의 큰 사랑을 받았다. 귀신을 보며 자란 탓에 소심하기 짝이 없었던 여자주인공 나봉선(박보영 분)의 몸에 억울하게 죽음을 맞은 처녀귀신 신순애(김슬기 분)가 빙의되며 일어나는 일들을 그렸던 이 드라마는 자체최고시청률 7.9%(닐슨코리아 유료플랫폼 기준)로 종영을 맞았다.

이 드라마에서 나봉선과 신순애의 사랑을 한 몸에 받는 스타 셰프 강선우 역을 맡았던 조정석은 "정말 친누나처럼 지내는 누나가 있는데 그 누나가 강선우에게 설레어 하는 모습을 보고 '드라마가 인기가 있긴 있구나'라는 생각을 했다"며 "매회 방송이 끝나고 주변 사람들로부터 '너무 재밌다, 다음에 어떻게 되느냐'는 문자를 받을 때도 기분이 좋았다"고 말했다.

섬세한 표현력

그가 이 드라마로 처음 배운 신조어가 있으니, 바로 '츤데레'다. 일본 문화에 친숙한 요즘 세대 사이에서 유행한 이 말은 겉으로는 쌀쌀맞게 굴지만 속으로는 상대방을 걱정하고 챙기는 마음을 갖고 있는 캐릭터를 이른다. 주방에서 실수를 저지르고 상처를 입은 나봉선에게 화를 내다가도 '흉터가 남으면 안 되니 연고라도 바르라'는 강선우의 모습이 그 대표적인 예다.

"강선우가 더 멋있고 매력 있게 느껴졌던 게 이런 부분이었어요. 자존심이 셌지만 빈틈이 있었고, 겉치레가 있지만 그게 또 약점으로 보일 때가 있었고, 화를 내면서도 밑바탕엔 늘 배려심이 있었죠. '데꼬보꼬'('울퉁불퉁', '요철'을 이르는 일본말-기자 주), 캐릭터의 포인트가 있는 인물이었어요."

하지만 강선우는 츤데레에만 머무르지 않았다. 회를 거듭할수록 자신을 괴롭힌 친구의 초라한 현실을 확인하곤 한껏 허세를 부리는 스스로의 모습에 자책했고, 요리 경연 프로그램에서 실수를 저지른 나봉선을 자르자는 친구에게 "그러려면 나도 같이 자르라"고 항변했고, 나봉선의 시골집에서 그가 겪었을 외로움을 이해하고 껴안기도 했다. 나봉선, 그리고 나봉선에게 빙의된 신순애와 교류하며 마음을 열고 속내를 표현할 수 있는 사람으로 성장한 셈이다.

그 가운데 빛을 발한 건 조정석의 섬세한 표현력이다. 그를 스타덤에 올려놓은 영화 <건축학개론>(2012)부터 <관상>(2013), <나의 사랑 나의 신부>(2014) 등에서도 눈짓이나 손짓 등을 활용한 그의 연기는 호평을 받아왔다. 조정석은 "대부분은 대본에 있는 것들이지만, 보는 사람들이 지금 이 순간을 실제라고 느꼈을 때 그 페이소스나 감동은 배가될 거라 믿고 연기한다"며 "'이 인물이 실제로 어떻게 말하고 행동할까' 고민하면서 세세하고 디테일한 호흡을 찾으려 한다"고 말했다.

"그런데 확실히 하고 싶은 게, 제가 애드리브를 많이 했다고도 하시고, '애드리브의 정석'이라는 제목의 메이킹 영상(촬영 현장에서 일어난 일들을 담은 영상-기자 주)도 있던데 사실 그렇게 애드리브를 많이 했던 것은 아니에요. 나봉선이 유학가기 전 반지를 끼운 목걸이를 걸어 주는 장면에서 강선우가 했던 말도 다 대본에 있는 것들이었어요. 작가님이 피 땀 흘려 쓰신 글인데, (시청자가) 거기에 공감해 주신 거죠. 배우들이 애드리브로 (대본을) 채우지 않았어도 이미 그 자체로 훌륭한 글이었다는 이야기를 꼭 하고 싶어요."

"좋아하는 연기로 돈도 벌고, 저에겐 축복이죠"

 배우 조정석

배우 조정석이 알려준 자신의 비밀 하나. "저 사실, 질투 어마어마하게 해요. 사랑하는 사람에 대한 질투는 안 할 수가 없죠. (웃음) 그런데 그 외의 누군가, 그러니까 훌륭하고 좋은 배우들에 대해선 질투하지 않아요. 차라리 존경심에 가까운 마음이죠. 예를 들어 메릴 스트립 같은 훌륭한 배우는 경악을 금치 못할 정도로 놀라워요. 경외감을 넘어 두렵기까지 하죠. 저도 그 정도로 되고 싶다는 욕심은 갖고 있지만, 계속 실패하고 있어요. 그러니 계속 노력하게 되고요." ⓒ 문화창고


삼수 끝에 서울예대에 입학하는 날, 교문을 통과하며 '이 문을 지나면 나는 이제 죽겠다는 각오로 연기하겠다' 했던 앳된 인상의 청년은 이제 서른여섯의 11년차 배우가 됐다. "연기를 10년 하면 꼭 안식년을 갖겠다"던 말은 공염불이 됐지만, 그래도 쏟아지는 일에 조정석은 즐겁다. <오 나의 귀신님> 이후에도 아이돌 그룹 엑소의 디오(도경수)와 함께 하는 영화 촬영이 기다리고 있고, 오는 10월에는 미리 찍어둔 영화 <저널리스트>가 관객에게 선을 보인다.

"연기에 대한 열정은 대학교에 입학하던 그때 못지않지만, 그때의 각오와 36살이 된 지금의 각오는 또 달라요. 당시엔 '뭐든지 다 열심히 하겠다'는 마음이었다면, 지금은 그저 '열심히 하겠다'는 마음만으론 안 되는 거죠. 제가 책임져야 하는 것들이 늘어나고 있으니까요. 어렸을 땐 '죽었다 깨어나도 철없이 살아야지' 했어요. 철없이 생각할 때 다양한 상상을 할 수 있는 거라고 생각했거든요. 그런데 그것도 아닌 것 같더라고요. (웃음)

그런데 이것 하나는 확실해요. 나이에 맞게 제 역할을 맡을 수 있다는 것은 배우로선 정말 행운이에요. 저는 제 얼굴에서 계속 다른 느낌이 나오는 걸 즐기는데요, <오 나의 귀신님>을 보던 분들이 <저널리스트> 속 제 모습을 보시면 또 다른 걸 느끼게 되실 거예요. 이렇게 연기를 하며 저를 하나하나 배워 가고, 한번은 이렇게 해 봤다가 아닌 것 같으면 또 수정하고, 그런 과정이 즐거워요."

물론 회사의 중간 관리자가 되고, 아이를 낳아 키우고 있는 친구들의 모습을 볼 때면 "점점 인생에서의 격차가 벌어질 것 같아 두렵기도 하다"는 그다. 하지만 그 두려움을 날려주는 건 연기라고 조정석은 다시 한 번 강조했다.

그래서인지 앞으로의 목표도 연기에 집중되어 있다. 과거 인터뷰에서 언급했던 뮤지컬 <맨 오브 라만차>의 세르반테스/돈키호테 역도, <레미제라블>의 자베르 경감 역도 언젠간 꼭 맡을 작정이란다. 마지막으로 그는 "제대로 된 악역을 만나보고 싶다는 갈증도 있다"며 "지금까지의 내 이미지와 상관없이, 즐겨 보고 싶다"고 덧붙였다.

"연기를 해 돈을 벌 수 있다는 것 자체가 저에게는 정말 크나큰 축복이라고 생각해요. (웃음) 초등학교 때 통지표에 늘 적혀 있던 말이 '책임감이 많다'는 거였어요. 어머니도 모셔야 하고, 가족들도 도와줘야 한다는 그 책임감이 지금까지 제가 할 수 있는 것을 악착같이 할 수 있게 해 준 것 같아요. 다행인 건 그게 연기고, 재밌다는 거죠. 연기, 진짜 재밌어요. 또 다행인 건, 아직까지 제가 지치거나 쓰러져 본 적이 없다는 거예요."

조정석 오 나의 귀신님 박보영 김슬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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