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텍스트(Text)에는 맥락(Context)이 있습니다. 문화 콘텐츠도 마찬가지입니다. 100% 정치적인 예술이 존재할 수 없듯이, 100% 순수한 예술도 없습니다. 문화 공연을 때로는 인문학적으로, 때로는 사회과학적으로 읽어봅니다. 마음에 안 들면 신랄하게 태클도 걸어보고, 재미있으면 '우쭈쭈' 칭찬도 합니다. 공연을 정치·사회적으로 해석하려는 시도가 항상 성공하지는 않을 겁니다. 시도가 비록 재미(Fun)는 없더라도, 최소한 '뻔'한 리뷰는 쓰지 않으려 합니다. [편집자말]
안재욱의 송수익 지난 8월 28일, 배우 안재욱이 LG아트센터에서 뮤지컬 <아리랑> 커튼콜 때 노래하고 있다. 브라운관이나 스크린에서의 안재욱이 아닌, 무대 위의 안재욱도 이제 익숙하다. 이전 작품보다 훨씬 더 완숙해진 연기와 노래를 선보였다.

▲ 안재욱의 송수익 지난 8월 28일, 배우 안재욱이 LG아트센터에서 뮤지컬 <아리랑> 커튼콜 때 노래하고 있다. 브라운관이나 스크린에서의 안재욱이 아닌, 무대 위의 안재욱도 이제 익숙하다. 이전 작품보다 훨씬 더 완숙해진 연기와 노래를 선보였다. ⓒ 곽우신


"하나뿐인 목숨을 바쳐 우리를 이끌고자 하셨던 (단재 신채호) 선생의 숭고한 뜻을 받들고 잇기 위해 나는 둔필을 들어 <아리랑>을 썼다. 그건, 인간의 본능 중에 하나인 '망각'을 자칫 '역사 해결'이라고 착각하는 의식을 바로잡아 고통스럽고 슬픈 역사를 새 경험으로 환기시키는 작업이었다. 뮤지컬 또한 새로운 '역사 체험하기'이다."

조정래의 대하소설 <아리랑>을 원작으로 하는, 새 창작뮤지컬 <아리랑>이 지난 7월 11일, 관객 앞에 첫선을 보였다. 서울 LG아트센터에서 오는 6일 막을 내리는 뮤지컬 <아리랑>을, 조정래 작가는 '역사 체험하기'의 일환으로 설명했다. 뮤지컬 <아리랑>은 일제강점기라는 한의 역사를 무대에 온전히 옮기기 위해 노력한 흔적이 엿보인다. 대사와 가사의 사투리, 투박한 듯 정겨운 소품과 의상, 국악과 클래식이 얽혀든 노래 등이 맛깔스럽다.

그러나 그 노력이 '결과'로 이어졌는지는 미지수다. 뮤지컬 <아리랑>을 향한 호불호는 엇갈린다. <시사IN>의 고재열 기자는 "뮤지컬 <아리랑>은 한국판 <레미제라블>로 성장할 수 있는 가능성을 보여준 작품"이라고 평한 반면, 김여란 <경향신문> 기자는 "관객의 입장에서 누군가에게 보라고 권할 만한 작품인가, 생각하면 흔쾌히 답하기는 어렵다"고 썼다.

민초의 삶, 미약한 주체들의 질긴 생명력

혜영수국 지난 8월 28일, LG아트센터에서 공연되고 있는 뮤지컬 <아리랑>의 커튼콜. 배우 임혜영이 노래하고 있다. 배우 임혜영이 소화하는 방수국 역은, 혼란스러운 시대 속에서 가장 고통 받고 힘겨워 하는 인물이다. "내는 득보 사랑하제"라는 가사가 반복되면서, 그 분위기와 울림의 톤이 변화하는 과정이 관객을 뭉클하게 한다.

▲ 혜영수국 지난 8월 28일, LG아트센터에서 공연되고 있는 뮤지컬 <아리랑>의 커튼콜. 배우 임혜영이 노래하고 있다. 배우 임혜영이 소화하는 방수국 역은, 혼란스러운 시대 속에서 가장 고통 받고 힘겨워 하는 인물이다. "나는 득보 사랑허제"라는 가사가 반복되면서, 그 분위기와 울림의 톤이 변화하는 과정이 관객을 뭉클하게 한다. ⓒ 곽우신


뮤지컬 <아리랑>의 최대 장점은 억압에 맞서 일어서는 '민초'의 이야기에 있다. 이들의 개인사는, 단순히 각 인물의 이야기에 국한되지 않고 당시 우리 민족 전체가 겪었던 민족사와 연결된다. 민중의 관점에서 서술되는 역사의 한 토막, 그 과정에서 뮤지컬 <아리랑>은 민초의 주체성을 효과적으로 드러낸다.

"나는 득보 사랑허제. 나도 수국이 사랑허제. 우리 마음 서로 알제. 좋은 호시절 오것제."

뮤지컬 <아리랑>의 시작을 알리는 첫 넘버 '진달래와 사랑'에서, 차득보와 방수국은 호시절을 기대한다. 그러나 이 '호시절'은 가만히 기다린다고 오지 않는다. 국권이 침탈당하고, 일제에 의해 민중의 삶이 짓밟히던 시절. 호시절은 오는 것이 아니라 찾아와야 할, 쟁취해야 할 대상이 된다.

"농사만 짓고 살었제. 씨앗 뿌려 싹을 틔우고, 꽃을 피워 열매 맺었제. 그라믄 다 되는 걸로 알었제. 가름마 같은 논두럭길, 쟁기질로 불어나는 황토가 이뻤제. 그라믄 다 되는 걸로 알었제. 그란 게 아니제. 그라믄 되는 거가 아니제. 인자 보이제. 죽을 때나 보이제. 도적이 들면 대적을, 강도가 들면 싸워야 혀!"

땅만 알고, 농사만 지었던 이들. 그러나 도적이 들면 대적을 해야 하고, 강도가 들면 싸워야 한다. 정치, 권력, 국가 간의 다툼... 이들의 삶과 거리가 멀었던 이야기들이, 민초의 일상으로 파고든다. 누구는 억울하게 목숨을 잃고, 누구는 땅을 빼앗기고, 누구는 정조를, 삶의 터전을 잃는다.

"올 것이 오는구나. 갈 때까지 가는구나. 가야할 길 더 또렷하고, 내 심장 소리 고동친다. 숨통이 맥혀. 가슴만 탁탁, 목구녁이 메어 가슴만 탁탁. 추스립시다, 마음을 다잡고. 일어습시다, 두 발로 딛고. 호미 녹여 창을 만들고, 소매를 걷어붙이고. 맷돌을 깨, 돌팔매 묵고. 책을 놓아 총을 붙들고. 먹을 놓고 대창을 깎고. 아리랑 어떻게든, 어떻게든."

지금까지 이들이 조선 왕조에 충성할 이유가 무어란 말인가. 양반 송수익, 배우고 깨치고 가진 것이 있었던 그의 거사는 십분 이해된다. 그러나 그의 외침에 평범한 사람들이 모이는 건 왜인가. 일제라는 거악이 이들의 일상을 파괴했기 때문이다. 농사밖에 모르던 이들은, 이제 호시절이 기다리면 오는 게 아님을 알았다. 숨통이 막히는 상황, 나라를 잃고 가족을 잃은 이들은 총 한 자루 들고 울분을 토해낸다.

"풀이 눕는다. 동풍에 나부껴. 먼저 누워도, 먼저 울어도 바람보다 먼저 일어나. 바람보다 늦게 누워도, 바람보다 먼저 일어나. 바람보다 늦게 울어도, 바람보다 먼저 웃는다."

물론, 이들의 분노가 바로 승리로 돌아오지는 않는다. 우수한 무기로 무장한 채, 힘으로 찍어 누르는 일제 앞에서, 소수 게릴라 형태의 의병 활동은 '계란으로 바위치기'에 지나지 않는다. 싸우는 자, 남는 자 모두 고통스럽기는 마찬가지. 그러나 포기하지 않는다. 김수영 시인이 '풀'에서 밝혔던 것처럼, 그 시에서 따온 넘버 '풀이 눕는다' 역시 민초를 노래한다.

바람에 흔들리는 부채, 그 부채에 그려진 도깨비가 마치 우는 것 같다. 바람이 불면 풀은 누울 수밖에 없지만, 그 풀은 다시 분연히 일어난다.

소연옥비 지난 8월 28일, LG아트센터에서 호연 중인 뮤지컬 <아리랑> 커튼콜에서 차옥비 역의 이소연 배우가 인사하고 있다. 그녀의 '소리'는 <아리랑>을 한층 맛깔나게 만든다.

▲ 소연옥비 지난 8월 28일, LG아트센터에서 호연 중인 뮤지컬 <아리랑> 커튼콜에서 차옥비 역의 이소연 배우가 인사하고 있다. '소리'로 <아리랑>을 한층 맛깔나게 만든 그녀의 캐스팅은 '신의 한 수'였다. ⓒ 곽우신


"죽지 말어. 죽을 것 같아도 죽지 말어. 심장을 두드리고 부아를 돋아서라도 살아남아!"

차옥비를 향한 송수익의 절규. 바람이 불면 울 수밖에 없는 목숨이지만, 그렇다고 쉬이 버릴 수 없는 목숨이다. 살아남아야만 우리가 쟁취할 그 호시절을 볼 수 있다. 결국 얻어내고야 말 그 새벽까지, 어떻게든 부지해야 할 생명이 아닌가. 아무리 꺾이고 밟혀도 다시 돋아다는 풀, 그 풀이 곧 민초이기에.

"매운 계절의 채찍에 갈겨, 마침내 북방으로 휩쓸려 오다. 하늘도 그만 지쳐 끝난 고원, 서릿발 칼날 진 그 우에 서다. 어데다 무릎을 꿇어야 하나. 한 발 재겨 디딜 땅조차 없는데, 이러매 눈 감아 생각해보니, 겨울은 강철 무지개인가 보다. 그러나, 그러나, 그러나. 봄은 오고 풀은 또 돋아난다. 풀이 눕는다, 풀이 눕는다. 풀은 바람보다 더 빨리 눕고, 풀은 바람보다 먼저 일어난다."

이육사의 시 '절정'과 김수영의 '풀'이 합쳐져 하나의 새로운 이야기를 만든다. 강철 무지개 같은 겨울, 그러나 봄은 온다. 그 강철 같은 겨울을 뚫고, 풀은 반드시 올라오고야 만다. 저 들판을 푸르게 물들이고야 만다. 빼앗긴 들판에 봄은 오는가? 온다. 아무리 밟혀도 한 뼘씩 뻗어나가 돋은 풀들, 그 풀이 바람보다 먼저 일어나 덮을 때, 결국 봄은 온다.

매혹적인 넘버들의 배치. 음율과 가사의 절묘한 합. 앙상블들의 호연. 절절한 각 인물의 사연들이 중첩된다. 뮤지컬 <서편제> 이후 이토록 '우리 것'을 잘 드러낸 뮤지컬이 있었는가. 뮤지컬 <아리랑>이, <아리랑>에 앓는 '회전문' 팬들을 만들어낸 데는 분명 이유가 있다.

민족주의 감성 자극하는 신파, 그 이상이 필요하다

차득보 역에 이창희 배우 뮤지컬 <아리랑>의 지난 8월 28일 커튼콜, 차득보 역의 배우 이창희가 관객에게 인사하고 있다. 차득보는 방수국을 향해 흔들리지 않는 사랑을 보여준다. 시대적 상황에 휩쓸려 괴로워하는 방수국의 곁을 끝까지 지키는 인물이다. 그 순정을, 이창희만의 아우라로 드러낸다.

▲ 차득보 역에 이창희 배우 뮤지컬 <아리랑>의 지난 8월 28일 커튼콜, 차득보 역의 배우 이창희가 관객에게 인사하고 있다. 차득보는 방수국을 향해 흔들리지 않는 사랑을 보여준다. 시대적 상황에 휩쓸려 괴로워하는 방수국의 곁을 끝까지 지키는 인물이다. 그 순정을, 이창희만의 아우라로 드러낸다. ⓒ 곽우신


그러나 눈물을 닦고 가만히 살피면, 뮤지컬 <아리랑>은 구멍이 많은 작품이다. 소설 <아리랑>은 한반도와 만주, 미주 등 각지로 흩어진 민족의 애환을 모두 담은 작품이지만, 이는 방대한 분량의 대하소설이기에 가능했다. 뮤지컬 <아리랑>은 소설 <아리랑> 중 시간적 배경과 공간적 배경의 일부만을 가져와 무대 위에 구현한다.

그런데 그 일부조차도 너무 많다. 특히 하와이로 떠난 방영근의 이야기는, 눈물샘을 자극할지언정 전체 이야기에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않는 곁가지에 불과하다. 절대악 일본과 핍박받는 조선의 대립구도는 뻔하다. 평면적인 캐릭터도 여럿 되다 보니, 이 뻔함이 결국 식상한 레퍼토리로 흐른다. 연출자의 의도는 이해하나, 일본어 원어 대사 처리는 극 몰입을 방해한다. LED에 대해서는 뭐라 할 말이 없다. 

무엇보다 <아리랑>이 관객을 울리는 코드에는, 민족적 감수성에 단순히 '호소'하는 게 대부분이다.

"우리들은 조선 사람 아니더냐."

송수익의 이 거친 외침에서 말하는 '조선'이 이조 오백년의 왕정국가 조선을 말하지는 않을 게다. 국가 '조선'은 이미 대한제국이 서면서 사라졌고, 그 대한제국마저 을사늑약으로 사라졌다. 여기서의 조선은 국적을 의미하는 게 아니라, 한반도라는 땅의 터전을 딛고 살아온 우리 민족을 의미한다.

그러나 민족적 정체성은 굉장히 추상적이고 불분명한 개념이다. 아리랑에 신명이 나고, 한을 흥으로 소화하는 그 '민족혼'은 한국인의 DNA 속에 흐르는 것이 아니다. 민족의 얼은 육신의 개념이 아니라 정신의 개념이다. 넋 안에 응어리진 '무언가'가 있는 걸 부정하기는 어렵지만, 그 '무언가'를 당시 혹은 지금의 우리 모두가 갖고 있다고 일반화할 수도 없다.


"이 나라가 무엇을 나에게 무엇을, 양반네들 뒤치다꺼리 종놈의 팔자. 거지 같았던 내 운명."

넘버 '다른 길'에서 양치성이 질문한다. 그러나 뮤지컬 <아리랑>은 아무런 답을 하지 못한다. 머슴의 아들로 태어나 아버지를 잃고 친일로 돌아선 그. 단순히 권력욕이나 방수국을 향한 짝사랑 때문에 그가 친일을 선택한 건 아니다. 그런데 "나는 황국의 신민"이라고 주장하는 양치성에게 송수익은 "그래도 넌 조선의 아들"이라고 자동응답기처럼 되풀이할 뿐이다.

물론 양치성이 '황국의 신민'은 아니다. 그는 끝까지 성실하게 황국신민의 의무를 다했지만, 끝내 인정받지 못하고 버려진다. 하지만 황국신민이 아닌 것이 바로 불령선인 혹은 조선인을 의미하지도 않는다.

양치성이 왜 조선의 아들인가? 양치성은 왜 조선을 배신하면 안 되는가? 그의 아버지가 조선 사람이라 그런 건가. 동학 운동을 하던 이들을 고해바치던 그의 아버지, 그 머슴은 그럼 조선의 아들이었나. 국가에 대한 충성, 공동체에 대한 헌신은 막연한 감수성과 당위로 설명되는 게 아니다. 죽은 뒤에 아리랑을 함께한다고 그가 조선 사람인가?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왜 양치성을 안아야 하는지, 그는 왜 조선 사람일 수밖에 없는지 설명되어야 한다. 역사적 맥락에 대한 서술도 부족한데, 별다른 이유 없이 관객에게 '여러분도 한국 사람이니 공감하시죠?' 정도의 메시지만 가지고는 한계가 있다.

카이치성 지난 8월 28일, 뮤지컬 <아리랑> 커튼콜 현장. 이제는 '팝페라 가수'보다 '배우'라는 말이 더 잘 어울리는 카이는, 여전히 성장 중인 배우이다. 매 작품마다 자신의 기량이 어디까지 클 수 있는지 증명하는 그는, 극의 중심인물인 양치성의 감성도 훌륭하게 소화한다.

▲ 카이치성 지난 8월 28일, 뮤지컬 <아리랑> 커튼콜 현장. 이제는 '팝페라 가수'보다 '배우'라는 말이 더 잘 어울리는 카이는, 여전히 성장 중인 배우이다. 매 작품마다 자신의 기량이 어디까지 클 수 있는지 증명하는 그는, 극의 중심인물인 양치성의 감성도 훌륭하게 소화한다. ⓒ 곽우신


뮤지컬 <아리랑>에는 분명 한국형 <레미제라블>의 가능성이 있다. 그러나 갈 길이 멀다. 민족주의 감성을 자극하는 '신파' 그 이상을 어떻게 달성할 것인지 고민이 필요하다. 뮤지컬 <레미제라블>은 '혁명의 나라'에 어울리는 '프랑스다움'이 곳곳에 묻어나 있는 작품이지만, 프랑스 사람들만 공감할 수 있는 작품이 아니다. 프랑스 혁명에 대해 잘 몰라도, 프랑스 국민이 아니어도 눈물 흘리고 감동하게 되는 작품이다.

작품의 마지막, 산 자와 죽은 자가 뒤엉키는 장면의 '한 방'은 있다. 결혼식도 장례식도 아닌, 흥도 한도 아닌 그 모든 것을 아우르는 '아리랑'. 그러나 이 역시 모두를 안기에는 무리가 있다. 이번 초연은 '실망'스러운 수준까지는 아니지만, '기대치'를 충족했다고 보기는 어렵다. 할인 없이 제값 다 주고 보기에는 주저된다.

하지만 지금이 <아리랑>의 완성본은 아닐 것이라 믿어 본다. 이제 고작 초연 아니었나. 다듬어지지 않은 그 발전 '가능성'에 기대를 걸고 재연을 기다려 본다. 신시컴퍼니가 이 극을 아껴준 팬들에게 미안하지 않으려면 말이다.

뮤지컬 <아리랑> 포스터 신시컴퍼니의 창작뮤지컬 <아리랑>이 9월 5일, LG아트센터에서 초연 막을 내린다. 배우의 열연, 힘 있는 넘버, 적재적소에 배치된 '우리 고유의' 요소들이 눈에 띈다. 하지만 그 완성도나 서사에서 짙은 아쉬움을 남겼다. 다듬어야할 부분이 많지만, 제대로 손만 본다면 훨씬 더 좋은 작품이 되리라 믿는다.

▲ 뮤지컬 <아리랑> 포스터 신시컴퍼니의 창작뮤지컬 <아리랑>이 오는 6일, LG아트센터에서 초연 막을 내린다. 배우의 열연, 힘 있는 넘버, 적재적소에 배치된 '우리 고유의' 요소들이 눈에 띈다. 하지만 그 완성도나 서사에서 짙은 아쉬움을 남겼다. 다듬어야할 부분이 많지만, 제대로 손만 본다면 훨씬 더 좋은 작품이 되리라 믿는다. ⓒ 신시컴퍼니



뮤지컬 아리랑 조정래 신시컴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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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5월 공채 7기로 입사하여 편집부(2014.8), 오마이스타(2015.10), 기동팀(2018.1)을 거쳐 정치부 국회팀(2018.7)에 왔습니다. 정치적으로 공연을 읽고, 문화적으로 사회를 보려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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