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월 <사랑이 이긴다> 이탈리아 로마 상영 당시 민병훈 감독.

지난 2월 <사랑이 이긴다> 이탈리아 로마 상영 당시 민병훈 감독. ⓒ 민병훈필름


"한국 사회에서 영화를 만드는 건, 독립을 하는 게 아니라 스스로 창작의 존엄을 훼손하는 일인 것 같다. 이 가치 있는 작업이 기쁘기보다 분노나 허탈감을 불러일으킨다는 건 나를 자해하는 꼴이고, 나를 불행하게 만드는 것 밖에 안 된다. 불행하기 위해 영화를 만드는 사람이 누가 있을까. 그래서 이 땅을 떠나야지만 자유로워지고 행복할 수 있구나 싶었다."

민병훈 감독은 오는 9월 10일 개봉을 앞둔 <사랑이 이긴다>가 한국 영화계에서 만드는 "마지막 작품이 될 것 같다"라고 말한다. 민병훈 감독은 <벌이 날다>로 1998년 이탈리아 토리노국제영화제 대상과 그리스 데살로니카영화제 은상을 수상하며 화려하게 데뷔했고, 그간 '두려움에 관한 3부작'인 <벌이 날다> <괜찮아 울지마> <포도나무를 베어라>와 이어 '생명에 관한 3부작'인 <터치> 등을 통해 인정받은 중견 감독이다.

그는 끊임없이 한국에서 영화 만들기의 비참함을 토로했다. 그건 불안감이나 자신감 결여와는 전혀 다른 차원이었다. 민병훈 감독은 그래서 해외 프로젝트를 구상했고, 가시화 단계까지 진행시켰다. 왜곡된 시장이 창작자의 혼을 죽이는 작금의 풍토에 대한 작가적·예술적 저항인 셈이다. <사랑이 이긴다> 개봉 준비가 한창이던 지난 19일 민병훈 감독을 만나, 신작과 해외 프로젝트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다. 그는 창작열도, 날도 바짝 선 상태였다.

신부들이 응원한 영화, 자살하는 한국 10대를 응시하다

 오는 9월 12일 개봉을 앞둔 영화 <사랑이 이긴다> 포스터.

오는 9월 12일 개봉을 앞둔 영화 <사랑이 이긴다> 포스터. ⓒ 민병훈필름


<사랑이 이긴다>는 한국가톨릭문화원으로부터 전액 투자를 받은 흔치 않은 영화다. 시나리오를 접한 신부 20여 명과 문화원이 십시일반 제작비를 3억여 원을 모았다. 신부가 등장하지도, 수녀가 나오지도, 하느님이 언급되지도 않는 이 영화의 무엇 때문에 이 종교인들이 마음을 움직였을까.

민병훈 감독의 <사랑이 이긴다>는 높은 10대 자살률을 자랑하는 한국사회를 반영하는 휴먼 드라마다. 한 가족의 이야기를 통해 강도 높은 문제제기를 가한다. 민 감독의 표현을 빌리자면, "제 정신으로 살아가기 힘든 현 한국 사회"를 반영하는 동시에 "관객들이 반대로 영화관에서 나를, 한국사회를 되돌아보게" 하기 위해 만들었다.

"신부님들이 그러더라. 이 이야기야말로 하느님의 이야기고, 성경의 이야기고, 강론의 정점의 이야기라고. 사랑이 무엇이고, 왜 우리 시대에 사랑이 필요한지에 대한 복음적인 이야기라는 거다. 신부님들은 돈을 벌고자 투자한 것이 아니라, 신자들이 많이 보고 무언가 느끼게 하고 싶다고 했다."

10대들이 스스로 목숨을 끊는 시대, 그런 한국 사회에서 <사랑이 이긴다>는 밖에선 단란하게 바라 볼 한 가족에게 카메라를 가져간다. 외모에 학벌, 어디하나 빠지는 데 없는 엄마 은아(최정원 분)는 딸 은아(오유진 분)가 불만족스럽다. 국제수학올림피아드 선수인 은아는 소위 1% 우등생인 자신을 항상 다그치는 엄마 때문에 스트레스가 극도에 달했다. 그리고, 성공한 의사지만 꽉 막힌 남편 상현(장현성 분)이 있다. 이들은 곧 큰 갈등을 맞는다. 

"힘들게 만든 영화다. 스태프 열두 명에 촬영도 내가 직접 했을 정도다. 말도 안 되는 촬영 회차에, 말도 안 되는 시스템으로 만들었지만 최선을 다했다. 감독 역할만 하고 싶다는 생각은 종종 하지만 후회는 없다.

이 영화는 꼭 부모와 아이들이 같이 봐줬으면 한다. 이런 소재의 영화가 더 이상 나오지 않았으면 한다. 이런 불행들이 계속되기 전에, 영화를 보면서 온전히 느끼고 깨우치고 용서했으면 싶고. 어떤 관객들은 이 가족을 통해 거울을 보는 심정일 수도 있을 것이다."

1등주의·획일주의가 점령한 영화계, 그의 프로젝트를 주목하라

제19회 BIFF '사랑이 이긴다', 작지만 강하게 2일 오후 부산 해운대구 우동 영화의전당에서 열린 제19회 부산국제영화제 개막식 레드카펫에서 영화<사랑이 이긴다>의 민병훈 감독과 배우 장현성, 최정원 등이 포즈를 취하고 있다. 제19회 부산국제영화제는 2일부터 11일까지 7개 극장 33개 상영관에서 79개국 314편의 작품이 상영되며 해운대 비프빌리지와 남포동 비프광장에서 야외무대인사와 오픈토크, 영화의전당 두레라움광장에서 아주담담 등이 진행된다.

작년 10월 제19회 부산국제영화제 개막식 레드카펫 당시 <사랑이 이긴다>의 민병훈 감독과 배우 장현성, 최정원 등이 포즈를 취하고 있다. ⓒ 이정민


민병훈 감독은 해외 프로젝트인 '사랑에 관한 3부작'을 제작 중이다. 그 출발은 작금의 영화계가 처한 현실에서 비롯됐다. 대기업 자본으로부터 소외된 영화와 영화감독들이 내몰린 어려움 말이다.

민병훈 감독은 "새로운 출발로 삼고 싶다"라고 말한다. 그는 "음악과 같은 영화의 국제적인 정서를 믿는다"라면서 "일종의 국제화 프로젝트라 할 수 있을 텐데, 국내 개봉만 바라보지 않고 해외에 진출해 관객들과 온전하게 만나려고 한다"라고 설명한다. 그가 이런 결심을 하게 된 속내는 무엇이었을까.

"지금 한국 영화계는 획일주의와 1등주의, 관객주의가 지배한다. 무조건 관객이 많이 드는 영화가 좋은 영화다. 무서운 논리다. 맛있는 음식이 잘 팔린다고  코카콜라가 제일 좋은 음식인가? 세계인의 눈도, 예술의 눈도 있을 수 있는데 재미라는 측면만 보는 거다. 재미없는 나 같은 영화는, 감독은 필요 없어지는 거다. 그렇지 않나? 롯데나 CJ가 만드는 10개 영화만 있으면 되지.

예술도 개인적으론 스스로의 행복감을 얻기 위한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어떤가. 숨이 막혀 죽을 것 같은 분위기다. 독립영화는 고작 만 명 넘었다고 파티를 해야 하는. 한국 현실을 생각하지 않고, 배급이나 홍보 마케팅에 신경 쓰지 않고, 온전히 영화만 생각해도 부족하다. 그래야만 숨을 쉴 수 있는 감독이 될 수 있다. 해외로 나가는 건 그 자유가 방종이 아니라, 내 스스로 만든 대안과 출구다."

지난해 12월, 미국 뉴욕에서 뉴욕필름아카데미 주관으로 민병훈 감독의 영화 전편(장편 6편, 단편 6편)을 상영하는 '민병훈 영화제'가 개최됐다. 이어 지난 2월엔 이탈리마 로마 '까사델라 시네마' 초청으로 <터치> <사랑이 이긴다> 상영회가 진행됐다. 이탈리에서 민병훈 감독은 이탈리아 작곡가이자 피아니스트인 프랑코 안토니오 미렌지와 차기작인 <에세이 인 뉴욕>의 음악 감독 계약을 체결했다. 민병훈 감독의 해외 프로젝트는 이렇게 해외 예술영화인들의 도움으로 착착 진행 중이다.

이 '사랑에 관한 3부작'은 뉴욕과 파리, 베이징 3개 도시에 촬영된다. 각각의 제목은 <에세이 인 뉴욕> <에세이 인 파리> <에세이 인 베이징>. 한국적인 정서를 배제하고 가족과 사랑과 같은 세계 어디서나 공감할 보편적인 이야기를 구상 중이다. 한국인의 등장 여부도 시나리오에 따라 유동적이다. 이미 뉴욕과 파리 편은 시나리오가 나왔고, 베이징은 마무리 단계에 있다.

"세 편 다 공통적으로 상처받은 사람의 이야기다. 각기 다른 도시, 다른 인물들이 어떻게 상처를 받고, 새 살을 얻은 뒤 상처를 치유해 나가는 가 하는 과정을 그릴 예정이다. 뉴욕은 현지 코프로덕션을 찾아 진행 중이고, 파리는 거의 확정적이다. 베이징은 중국 국영 회사와 얘기가 잘 진행 중이다. 일단 돈도 중요하지만, 시나리오와 기획이 먼저인 것 같다.

예컨대, 전체 예산이 55억 원 정도 소요된다면, 10억 원이든 1억 원이든 예산이 마련되는 대로 순차적으로 진행할 수 있을 것 같다. 내년부터 2018년까지 한 편씩 찍어 나갈 거다. 이런 프로덕션이 억울하거나 힘들거나 하진 않다. 일단 내 자신이 내 영화의 첫 번째 투자자라고 생각한다. 내가 사랑하는 영화를 찍는데, 남들에게만 투자하게 만드는 게 정답이라고 생각하지도 않고 상도덕도 아니지 않나. 이런 제작 과정이 이제는 편하다."

"할리우드가 점령한 세계, 영화가 왜 꼭 재미 추구해야 하나"

 올해 전주국제영화제에 참석한 평졍지에 작가와 민병훈 감독.

올해 전주국제영화제에 참석한 평졍지에 작가와 민병훈 감독. ⓒ 전주국제영화제


지난 4월 제16회 전주국제영화제에서 영화 <평정지에는 평정지에다> 역시 민병훈 감독의 작품이다. 중국 현대미술의 거장 펑정지에가 배우 자격으로 참여하고 서장훈, 윤주 등의 배우가 출연했다. 영감이 떠오르지 않아 더 이상 그림을 그릴 수 없는 한 화가를 주인공으로 한 실험적인 작품이다.

민병훈 감독은 이 <평정지에는 평정지에다>와 같은 '화가 시리즈' 역시 병행하는 중이다.  1922년생 최고령 화가이자 신사실주의의 마지막 생존화가로 꼽히는 백영수 화백을 주인공으로 삼은 영화 역시 한창 촬영 중에 있다. 파리에서 활동한 백영수 화백의 예술과 삶을 영상에 담는 작업이다. 이미 파리에서의 모습을 카메라에 담았고, 아직 촬영이 예정돼 있다.

"영화가 왜 다 재미를 추구해야 하나. 음악이, 오페라가, 미술이 다 재밌는 건 아니다. 영화가 예술이라면, 질문을 던져주고 관객 스스로 감상하는 영화도 존재할 수 있는 거다. 이제는 아트영화 시장이 다 죽었다. 우리나라에 국한된 것만도 아니다. <포도나무를 베어라> 때만 해도 전 세계 40개국에서 개봉했다. 이젠 전부 다 할리우드 영화에 길들여져 있다.

그래서 찾은 것이 결국 휴머니즘이다. 휴머니즘을 찾지 않으면 영화가 아니다. 그 휴먼니즘에 자본이 들어가면 들어갈수록 진정성은 떨어질 수밖에 없다. 그래서 온전히 작품만 생각하려고 한다. 그래서 찾은 것이 바로 해외프로젝트고, 음악과 그림 프로젝트다."

민 감독의 예술에 대한 관심은 음악으로까지 확장되고 있다. 민병훈 감독은 현재 아시아 연주자로서는 최초로 리즈 국제 피아노 콩쿠르에서 우승한 피아니스트 김선욱의 동선을 따라 잡고 있다. 베토벤 피아노협주곡 5번 황제를 예로 들며, 김선욱을 평소 좋아하는 예술가로 꼽는 민병훈 감독은 이 김선욱 프로젝트 역시 "순수 예술로 돌아가서 음악영화를 만들고 싶었다"라고 말한다. 그러면서 꽤나 도발적인 답을 내놨다. 그의 프로젝트가 한국영화에, 한국사회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몹시 궁금해질 수밖에 없는 답이 이어졌다.

"제 정신으로 힘든 시대다. 한 사람이 지금과 같은 정치와 사회현상을 보고 제대로 살아가면 '무뇌아' 수준인거다. 이 시대에 직장에서나 가정에서나 학생도 힘든데, 영화관에 가서까지 힘들어야 하느냐고 말한다. 아니, 거꾸로 영화관에서까지 퍼지고 싶느냐 묻고 싶다. 오히려, 영화관에서 나를, 우리 사회를 되돌아 볼 수 있지 않을까.

예컨대, 여행할 때, 가이드가 알려주는 길은 안정적이지만 재미가 없다. 내 영화들은 안내자까진 아니지만 자유여행이라 할 수 있다. 그 여행 안에서 각자 해석의 몫을 주는 거다. 정답을 제시하기보다 질문을 던져주고. 그게 바로 영화를 보는 재미다. 그런 영화들이 많아지고 그런 영화들이 온전하게 소통할 때, 한국의, 세계의 영화문화가 더 풍성해 질 수 있지 않을까."

○ 편집ㅣ김지현 기자


민병훈
댓글10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기고 작업 의뢰 woodyh@hanmail.net, 전 무비스트, FLIM2.0, Korean Cinema Today, 오마이뉴스 등 취재기자, 영화 대중문화 칼럼니스트, 시나리오 작가, 각본, '4.3과 친구들 영화제' 기획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