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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 직장을 그만두고 얼마 지나지 않았을 때의 일이다. 새로운 회사에 입사해 첫 회식 자리에서 회사 대표로부터 건배 제의를 요청받았다. 긴장과 흥분이 감돈 상태에서 나는 이렇게 외쳤다.

"새로운 일터에서 새로운 사람들과 새 역사를 만들겠습니다. OOO을 위하여!"

그러자 갑자기 분위기가 어수선해졌다. 아차! OOO은 전 직장의 회사 이름이었던 것이다. 극도의 긴장 상태에서 실수를 범했다. 곧바로 새로운 회사 이름을 대고 건배사를 다시 외치고 대표 앞에서 고개 숙여 죄송하다고 말했다. 그리고선 폭탄주 몇 잔을 연거푸 들이켰다.

"총선 필승" 행정자치부 장관 구호, 주어 없으니 괜찮다?

새누리당 연찬회에서 '총선 필승' 건배사로 논란이 된 정종섭 행정자치부 장관이 28일 오전 서울 종로구 정부서울청사 브리핑실에서 기자회견을 열어 자신의 입장을 표명한 뒤 고개를 숙이고 있다.
▲ " 새누리당 연찬회에서 '총선 필승' 건배사로 논란이 된 정종섭 행정자치부 장관이 28일 오전 서울 종로구 정부서울청사 브리핑실에서 기자회견을 열어 자신의 입장을 표명한 뒤 고개를 숙이고 있다.
ⓒ 유성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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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거관리 주무부처인 행정자치부 정종섭 장관이 지난 25일 새누리당 연찬회 만찬장에서 "총선 필승"이라는 건배사를 외쳤다. 이에 대해 야당은 선거중립의무 위반이라며 선관위에 정 장관을 고발하고 비판을 가했다. 이에 김무성 새누리당 대표는 건배사에서 '새누리당'이라는 말은 안 했다며 정종섭 장관을 두둔하고 나섰다.

새누리당의 이 같은 '주어 없음' 궤변은 처음 벌어진 일이 아니다. 8년 전 2007년 대선 당시 이명박 후보의 BBK 설립 여부가 선거기간 최대 이슈로 떠오르자 나경원 당시 대변인은 "'내가' 설립했다고 말한 적이 없다, '설립했다'라고만 했다"라면서 '이명박'이라는 주어가 없었음을 강조했다.

<쿨하게 사과하라>라는 책이 있다. 저자 정재승·김호는 이 책에서 오바마 대통령이 선거운동 기간 중 했던 실수와 대처 방식이 우리나라 정치인들의 그것과 어떻게 달랐는지 보여준다.

오바마의 사과 방식, 참 다르네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자료사진).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자료사진).
ⓒ 연합뉴스/EP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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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5월 당시 민주당 대선후보였던 오바마는 한 자동차 생산공장을 방문했다. 현장에 있던 기자가 오바마에게 질문했다. "의원님, 미국의 자동차 산업 노동자들을 어떻게 도울 생각인가요?" 그러자 오바마는 기자에게 "잠시만요, 스위티(sweetie)"라고 답한 채 즉답을 미뤘고, 결국 기자는 답변을 듣지 못했다.

답을 미룬 것도 미룬 것이지만 '스위티'라는 표현이 문제였다. 이 표현은 애인이나 가까운 친구에게 쓰는 말로 성희롱으로도 문제 삼을 수 있는 것이었다. 민주당은 발칵 뒤집어졌다. 오바마는 논란이 일자 자신의 잘못을 깨달았다. 그는 당장 해당 기자에게 전화를 걸었고, 그가 전화를 받지 않자 직접 음성 메시지를 남겼다.

"오바마입니다. 두 가지 사과할 것이 있어요. 하나는 답을 주겠다고 하고 주지 않은 것, 다른 하나는 '스위티'라는 표현을 쓴 것입니다."

그는 잘못을 인정하고, 그 잘못에 대한 추후 조치에 대해 상세히 밝혔다. 즉각적이고, 진심이 담겨 있으며, 잘못에 대한 후속 조치가 담겨 있는 오바마의 사과는 기자의 마음을 녹인 것은 물론, 되레 대중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또한 이 책은 사과할 때 절대 쓰지 말아야 할 사과 방식으로 다음의 세 가지를 들고 있다.

① 미안해, 하지만….
② 만약 그랬다면 사과할게.
③ 실수가 있었습니다.

참 미사여구 많은 '사과'... 제발 쿨하게 사과하라

정종섭 행정자치부장관. 사진은 지난 27일 오전 정부서울청사에서 열린 국가정책조정회의에 참석하고 있는 모습.
 정종섭 행정자치부장관. 사진은 지난 27일 오전 정부서울청사에서 열린 국가정책조정회의에 참석하고 있는 모습.
ⓒ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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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종섭 장관은 28일 정부서울청사에서 "진심으로 송구스럽게 생각하며 앞으로 이런 일이 없도록 깊이 유념하겠다"라고 사과했다. 그러면서 "25일 연찬회가 끝난 후 저녁식사 자리에서, 평소 술을 잘하지 않는 저로서 갑작스러운 건배사 제의를 받고, 건배사가 익숙하지 않아 마침 연찬회 브로슈어(안내서)에 있는 표현을 그대로 하게 됐다"라면서 "당시 저의 말은 어떤 정치적 의도나 특별한 의미가 없는 단순한 덕담이었다"라고 해명했다. 그는 "결과적으로 제 말이 불필요한 논란을 불러오게 됐다"라고 잘못을 시인하면서 거듭 "송구하다"라고 말했다.

역시나였다. 정종섭 장관의 사과에는 부적절한 사과 방식이 그대로 적용됐다. '진심으로 송구하다'는 멘트, '익숙하지 않은 술자리'라는 핑계, '의도치 않는 덕담'이었으나 '결과적으로 잘못했다'는 뻔뻔함….

국민들은 언제까지 이런 뻔한 사과를 들어야 할까? 사람은 누구나 실수를 하기 마련이다. 긴장하면 말 실수를 하기도 한다. 또 열심히 하려고 하다 소위 '오버'해서 하지 않아도 될 말을 하기도 한다.

실수를 하면 사과를 해야 한다. 고개를 숙이고 사과하는 것이 패배를 의미한다는 인식이 강한 우리나라에서 사과는 힘든 일이다. 특히 국민의 지지를 먹고 사는 정치인에게 사과는 곧 패배를 의미한다고 알고 있다. 하지만 사과하려고 마음먹었다면 진심을 다해 사과 해야 한다. 구차한 변명이나 의도치 않은 잘못이라는 핑계는 국민들을 더 분노하게 할 뿐이다.

대한민국 정치인들이여! 제발 한 번쯤은 '쿨하게' 사과하라.

○ 편집ㅣ김지현 기자



태그:#정종섭, #쿨하게 사과하라, #주어 없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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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가는 이야기에 행복과 미소가 담긴 글을 쓰고 싶습니다. 대구에 사는 시민기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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