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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쿵쿵쿵쿵'

문 두드리는 소리에 깜짝 놀라서 일어났다.

"저기 예약하신 택시가 기다리고 있어요."

새벽 5시에 맞춰놓은 알람 소리를 듣지 못했나 보다. 호스트가 찾아온 걸 보아하니 이미 시간이 많이 지난 듯했다. 오전 8시 자이푸르(Jaipur)행 비행기를 타야 했던 우리는 가방에 세면도구와 옷가지들을 쑤셔 넣으며 정신없이 숙소를 빠져나왔다.

택시를 타며 델핀과 나는 띵띵 부어오른 서로의 얼굴을 보고서 웃음이 터졌지만, 어째 안토니는 무표정했다. 아마도 충분히 휴식을 취하지 못한 채 하루를 시작하려니 꽤 힘겨운 듯 보였다.

인도에서는 공항에 들어갈 때 당일 비행 티켓이 없다면 출입 자체가 불가능했다. 그래서인지 탑승자를 배웅하던 사람들은 건물 밖에서 작별인사를 나누었다. 경찰이 일일이 여권과 탑승권을 확인하느라 길게 늘어선 줄은 더 끝없이 이어졌다.

좀 번거롭긴 했지만 아마 이러한 검사가 없다면 공항은 노숙하는 사람들로 인산인해가 될 테니 기다리면서도 저절로 이해가 되는 부분이었다.

출입제한이 없는 뉴델리역만 하더라도 기차를 타는 사람보다 노숙하는 사람이 더 많았다. 그 광경을 처음 마주했을 당시에 큰 혼란에 빠졌었다. 그렇게 나흘간 겪었던 인도는 오늘의 낯선 상황을 받아들이는 연결고리가 되었나 보다. 그래서 겪어봐야 안다는 말이 있는 거겠지. 여전히 익숙지 않은 세상이었지만 나는 서서히 어울려 가는 중이었다.

 비행기를 타기 위한 버스를 기다리는 사람들
 비행기를 타기 위한 버스를 기다리는 사람들
ⓒ 정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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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도 뉴델리에서 갈 수 있는 많은 국내선은 인도의 넓디넓은 국토의 규모를 실감케 했다. 탑승 게이트라기보다 고속버스 승차 홈처럼 탑승구의 간격이 번호 순서대로 촘촘히 자리하고 있었다. 아니나 다를까, 그 승차 홈에서 버스를 타야지만 탑승 비행기까지 갈 수 있다고 한다.

워낙 노선이 많다 보니 비행기가 있는 활주로까지 직접 가야 했다. 비행기를 타고선 예상치 못한 환경에 기대 없이 놀랐는데, 깨끗하고 쾌적했던 내부를 보니 최근에 만들어진 신식 기종인 듯했다. 인디고(Indigo)는 저가 항공이라 물을 제외한 모든 음식을 구매해야 했지만, 가격대비 친절한 승무원의 서비스까지 만족스러운 탑승 경험이었다.

자이푸르(Jaipur) 공항에 도착하니 숙소에서 친절히 마중 나왔다. 델핀이 일정 상 너무 피곤할 것 같아 미리 픽업 서비스를 신청했다고 한다. 그런데 차량을 타고 도착한 곳은 사진과는 전혀 다른 건물.

우선 현지인의 숙소가 아닌 어딘가 보수 공사 중인 호스텔이었다. 먼지에 얼굴이 뒤덮이고 드릴과 못질에 귀와 코를 막아가며 델핀과 안토니는 숙소 상태부터 확인했다. 맘에 들지 않으면 돈을 더 주고서라도 다른 곳으로 옮길 거라며 다녀오더니 이상하진 않았나 보다.

내가 보기에도 방은 나쁘지 않았지만, 침대가 하나뿐이라 나는 또 바닥에서 자야 할 판이다. 두 사람은 손수 가져온 시트를 침대 위에 깔았다. 나는 곰팡이가 한껏 묻어있는 매트리스 두 개를 겹쳐서 임시 침대를 만들었다. 그리고 호스텔 직원에게 건네받은 다소 찝찝한 느낌의 시트를 깔고서 가져온 스카프를 다시 덮었다. 잠자리를 마련한 우리는 아무 말 없이 약속이라도 한 듯 쓰러져 깊이 잠들었다.

요금 바가지 씌우려던 기사, 갑자기 돌아오더니...

 호스텔에서 먹은 첫 식사. 피자 토스트와 난
 호스텔에서 먹은 첫 식사. 피자 토스트와 난
ⓒ 정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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늦은 오후가 되어서야 각자 쌓아두었던 피로를 좀 덜어냈다. 하지만 애써 충전한 피로가 금방 찾아들 정도로 자이푸르의 체감날씨는 델리보다 훨씬 무더웠다. 뉴델리-아그라-쟈이푸르까지 지역을 이동할 때마다 더위가 더 강력해지는 느낌이다.

무척 허기져 있던 우리는 호스텔에서 간단한 음식을 주문한 후 다시 그들이 추천하는 맛집을 가기 위해 릭샤를 불러세웠다. 호스텔 직원이 말했던 릭샤 가격은 숙소에서 식당까지 최대 60루피.

그런데 처음 만난 릭샤 기사는 우리에게 150루피라는 가격을 불렀다. 우리가 고개를 내젓자 그는 100루피까지 내렸지만 내가 60루피라고 말하자 그는 당황해하며 그 가격으론 절대 안 된다고 딱 잘라버렸다.

"우리도 60루피 이상 당신에게 줄 수 없어요."

나는 다른 릭샤를 타자며 발길을 돌렸고, 친구들은 나를 따라나섰다. 모르면 어쩔 수 없지만 알면서 터무니없는 가격을 지불하기엔 어느새 흥정에 단련되어 있었다. 한 10m쯤 갔을까? 조금 전 릭샤 기사가 우리 앞에 다시 나타나더니 마지못해 입을 열었다.

"60루피로 식당까지 안내할게요. 어서 타요."

 갑자기 몰려든 소떼가 지나가길 기다리는 릭샤기사
 갑자기 몰려든 소떼가 지나가길 기다리는 릭샤기사
ⓒ 정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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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까 내뱉은 말과 달라진 자신의 행동이 멋쩍은지 살짝 손만 내저으며 타라는 신호를 보냈다. 그의 릭샤를 타고 식당으로 가는 길. 릭샤 기사는 이제껏 다른 기사에게 들어보지 못한 꽤 유창한 영어로 방금 전 자신의 태도를 해명하듯 쏟아냈다.

"당신들에게 금액을 높게 부른 건 인정할게요. 하지만 그걸 알아야 해요. 현지인과 같은 금액으로 관광객에게 운전하는 릭샤 기사는 많지 않을 거란 걸요. 솔직히 이곳에 관광을 온 외국인이니 가격을 높게 부른 건 맞지만 지금은 그러고 싶지 않아요. 어쨌거나 만나서 반가워요. 나는 수시라고 해요. 다들 어디서 왔어요? 이름이 뭐예요?"

나는 그의 이름을 듣고 깜짝 놀랐다.

"당신 이름이 뭐라구요? 내 이름도 수지예요, 수지."

발음이 미묘하게 달랐지만, 얼핏 들으면 같은 발음이었다. 이름 덕분인지 조금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 그는 우리의 자이푸르 일정을 구체적으로 물어갔다. 사실 셋 다 자이푸르에 대해서 아는 것이 없었는데 오게 된 이유도 인도친구가 추천했기 때문이었다.

델핀과 안토니는 "코끼리를 탈 수 있지 않나요?"하고 물었다. 고작 내가 아는 정보라곤 '핑크색 도시'라는 별칭뿐이었다. 수시는 우리의 말을 듣고서 자신이 자이푸르 출신임을 강조하며 특별한 제안을 했다.

"당신들이 좋아할 곳을 내가 알아요. 우선 나를 믿어보세요. 내 말은 정말 후회하지 않는다는 거예요. 오늘 나를 믿어본 후에 내일 우리가 함께할지 아닐지를 결정하세요."

그는 자이푸르에서 가장 멋진 경치를 볼 수 있는 명소를 안내하겠다며 자신했다. 만약 마음이 이 사람을 거부했다면 이미 돌아섰을 텐데 우리는 식당 앞에 서서 그의 말을 계속 듣고 있었다. 우리를 속이려 했지만 이후 속내를 털어놓는 모습은 그리 밉지 않았다. 정말 이런 마음은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

아까 전까지 절대 속지 않을 거라 다짐했던 마음이 '오늘 저녁까지만 함께 다녀볼까?'로 어느 순간 변해버렸다. 모르긴 해도 알 수 없는 진심이 느껴져서일 테다. 함께 해서 좋을지 혹은 나쁠지 확신할 수 없지만 이것 또한 믿지 않으면 알 수 없을 터. 우리는 그가 안내해주는 곳을 식사 후에 가기로 결정했다.

호스텔에서 추천한 니로스(Niros)는 셋이서 먹기에 그리 저렴한 가격은 아니었지만, 나흘 동안 먹었던 인도 음식 중에서 단연 최고였다. 나는 탄두리 버터 치킨을 주문해서 먹었는데, 한국의 양념 통닭이 위기를 느낄 정도로 황홀한 맛이었다. 셋 다 쉴새 없이 갈릭난, 버터난, 치즈난을 찢어가며 먹었다. 손이 그렇게 바쁠 수 없었다.

"그거 알아요? 이 산에 호랑이가 살고 있는데"

 전혀 기대하지 않았던 빈티지카. 왠지 과거로 타임슬립하는 기분!
 전혀 기대하지 않았던 빈티지카. 왠지 과거로 타임슬립하는 기분!
ⓒ 정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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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사를 마치고 나오자 수시는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릭샤로는 갈 수 없다며 대신 끌고 온 흰색 빈티지카(구형 자동차)를 보자마자 우리는 크게 반색했다. 20분 넘게 차를 타고 달리던 산길은 굉장히 험난했다. 쌍라이트를 켜지 않고선 도저히 갈 수 없는 비탈진 길을 덜컹거리며 달렸다. 조금 두려운 마음으로 창문 위에 붙어있는 손잡이를 꽉 붙잡았다.

델핀은 귓속말로 "저 사람 우리를 납치하려는 거 아니야? 길이 진짜 이상하잖아"하고 의심했다. 사실 나도 같은 생각이 들 정도로 무서웠다. 칠흑 같은 어둠 속 길이었다. 게다가 기사는 계속 울리는 전화벨을 받지도 않고 아무 말 없이 운전에만 집중했다. 전화를 받아보라는 내 말에도 그는 친한 친구들이 술을 먹자고 전화를 하는 거라며 귀찮아했다.

"전화 받으면 뻔한 이야기 뿐이에요. 나는 어제와 같은 날을 보내고 싶지 않아요. 어제와 같은 잔으로 술을 마시고 싶지도 않고요. 그 이유는 오늘은 어제보다 더 새로워야 하니까."

그렇게 어둠을 뚫고서 도착한 곳은 산 정상에 있는 카페, 레스토랑 아니 야외 전망대랄까? 나하가르 포트(Nahagarh Fort)라고 불리는 곳이었다. 도시 전경이 보이는 산 정상이었는데, 조금만 더 일찍 왔다면 끝내주는 야경을 구경할 수 있었다며 수시가 아쉬워했다.

"지난주에는 영국인을 데리고 왔는데 이 장소에서 파티하고 있어서 타이밍이 좋았어요. 가끔 파티하거든요. 그럴 때 오면 더 끝내줘요."

 우연히 친구들을 만난 수시는 반가움에 달려가 포옹을 했다.
 우연히 친구들을 만난 수시는 반가움에 달려가 포옹을 했다.
ⓒ 정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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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의 반짝이는 불빛들을 바라보니 가슴이 뻥 뚫리는 기분이다. 역사 속 방어시설로 지어진 요새가 지금은 시민들이 낭만적인 시간을 보낼 수 있는 장소로 탈바꿈되었다고 한다. 곳곳에 놓인 테이블도 성곽의 축조물 안에 있어서 야경을 보는 운치를 더했다.

낮에는 더위 때문에 인적이 드물겠지만, 저녁에는 멋진 경치와 함께 시간을 보내기엔 이만한 장소가 없다 싶을 정도로 매력적인 곳이었다. 그냥 오래 머물고 싶다. 사랑하는 사람과 다시 오고 싶다. 이런 느낌이 스며들었다.

나하가르 포트는 입장료 50루피(한화 약 900원)를 내면 물, 콜라, 사이다 중 하나를 무료로 받을 수 있었다. 나는 콜라를 마셔가며 눈과 마음이 행복해지는 자이푸르 전경을 천천히 담아갔다. 그 순간 동시다발적으로 여기저기서 불꽃이 터지고 있었다.

"오늘 무슨 축제가 있나 봐요? 여기저기서 불꽃이 터지는데요?"

수시는 내 말을 듣고서 "어디서 또 결혼식을 하나 보지요"라고 대답했다. 그의 설명을 들어보니 신랑 측에서 결혼하게 되면 축복의 의미로 불꽃을 쏘아 올린다는 것이다. 그럼 오늘 열린 결혼식만 세 군데 아니 네 군데쯤 되겠네? 실내에서 폭죽을 터트리는 결혼이 소박하게 느껴질 정도로 하늘에 수놓아진 불꽃은 성대한 연회를 연상케 했다.

"그거 알아요? 이 산에 호랑이가 살고 있는데 우리 차를 덮칠지도 몰라요."

'새로운 내일을 위하여' 그 말에 마음 움직였다

 영롱한 눈빛으로 나를  빤히 쳐다보던 아이들
 영롱한 눈빛으로 나를 빤히 쳐다보던 아이들
ⓒ 정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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숙소로 돌아가는 길. 호랑이가 나타날지 모른다며 겁을 주면서 브레이크를 밟아가는 수시. 그의 운전과 말재간은 무서움과 재미를 동시에 안겨주는 중이었다. 호랑이가 있다는 말이 사실이라고 우기는 수시와 아니라고 말하는 우리. 말하는 사이에 진실이건 거짓이건 그 속에서 즐거웠던 하루가 저물어가고 있었다.

"내일 몇 시까지 숙소로 오면 될까요?"

우리가 차에서 내릴 때 그가 씨익 웃으며 말했다. 그는 알고 있었나 보다. 우리가 어느 순간부터 자신과 함께하고 싶었는지를. 우리는 굳이 오지 않아도 된다며 농담을 하면서도 다음날 오전 9시에 만나자고 대답했다.

델핀과 안토니는 "처음에는 우리를 속이려 했지만 이제는 믿을 수 있게 노력한 것 같다"며 은근히 만족해했다. 나도 같은 생각이었지만, 유독 이 말이 마음을 움직이게 한 것 같다.

"어제와 같은 날을 보내고 싶지 않아요. 어제와 같은 잔으로 술을 마시고 싶지도 않아요. 왜냐하면, 오늘은 어제보다 더 새로워져야 하니까."

오늘보다 새로운 내일을 위하여 그를 다시 믿어보는 수밖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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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그:#인도여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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