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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력범죄를 성적판타지로 미화했다는 비난을 받고 있는 성인 잡지 <맥심>의 9월호 표지 사진.
 강력범죄를 성적판타지로 미화했다는 비난을 받고 있는 성인 잡지 <맥심>의 9월호 표지 사진.
ⓒ 맥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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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걸 돈 주고 샀어요?!"

여성 세 명이 둘러앉은 지름 1m 남짓 원형 테이블에 최근 논란이 된 성인남성잡지 <맥심> 9월호를 툭 내려놓자 제일 먼저 튀어나온 말이다. 이들이 헛웃음을 내뱉으며 바라보고 있는 표지에는 '악역 전문 배우' 김병옥이 미간을 찌푸린 채 담배를 피우며 서 있다. 그리고 바로 옆에는 자동차 트렁크 문 사이로 여성의 다리가 절반쯤 나와 있다. 청테이프에 발목이 결박된 채로.

이 표지가 공개된 지난 21일 온라인에선 즉각 반발 여론이 일었다. 그동안 <맥심>은 헐벗은 여성들을 표지에 걸어 남성의 성적 판타지를 무한히 자극하던 잡지였다. 그런데 이례적으로 남성 모델이 등장했고, 그는 여성 납치·살해 장면을 재연했다. 그동안 <맥심>이 보여 온 정체성과 현실에서 여성을 상대로 한 강력범죄가 대부분 성범죄를 동반한다는 사회적 맥락까지 고려하면 보는 사람의 입장에서는 성범죄를 성적 판타지로 미화했다는 불쾌감이 충분히 들 수 있었다.

표지는 그나마 양호했다... 그런데도 '프로불편러'라고?

남성지 <맥심> 9월호 'THE REAL BAD GUY'에 실린 사진들.
 남성지 <맥심> 9월호 'THE REAL BAD GUY'에 실린 사진들.
ⓒ 김지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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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는 그나마 양호한 편이었다. 이후 공개된 나머지 네 장의 사진에는 민소매 티셔츠와 핫팬츠를 입은 여성이 트렁크 안에서 웅크리고 누워있는 뒷모습과 트렁크 안으로 손을 뻗는 배우의 얼굴을 여성의 시각에서 찍은 장면, 자신의 몸집보다 큰 검은 가방을 어디론가 옮기는 모습 등이 담겼다. 가방 표면에는 핏방울이 흘렀다. 땅바닥 또한 흥건하게 젖었다. 맥심 측은 "흉악 범죄를 누아르 영화적으로 연출했으며 성범죄적 요소는 없다"라고 해명했다.

여성들은 또 한 번 분노했다. 스스로 납치·성폭행 생존자라고 밝힌 이들은 트라우마가 떠올라 손이 부들부들 떨린다고 증언했다. '여성혐오 반대'를 구호로 내세운 커뮤니티 메갈리아 회원들은 편집장에게 사과를 요구하는 서명운동을 시작했다. 예상치 못한 옹호론도 컸다. '디시인사이드' 등 대체로 남성 이용자가 많은 인터넷 커뮤니티에서는 '취향의 자유'라고 강변했다. 진보적 커뮤니티로 불리는 '오늘의 유머'에서도 이 화보를 두고 불편한 의견을 표하는 누리꾼에게 '프로불편러'라는 부정적 딱지를 붙였다.

그래서 만났다. 맥심 화보에 비판을 가하는 일은 과연 시도 때도 없이 자신의 감정을 남에게 강요하는 '프로불편러'들의 무리한 떼쓰기 일까? 여성주의 상담 팟캐스트 '거침없는 해장상담소' 진행자 꽃뱀(33·여)과 큐티보이(31·여), 불만녀(26·여)다. 이들과 함께 <맥심> 9월호 품평회를 열고 잘근잘근 씹어봤다. 무엇이 불편한지, 그리고 과연 이 불편함을 공공연하게 드러내서는 안 되는 것인지. 이들의 결론은 "세계 최강 프로불편러가 되자"는 것이었다.

다음은 지난 27일 오후 서울 마포구 성산동 시민공간 나루에서 나눈 대화를 정리한 것이다. 솔직한 대화를 위해 모두 익명을 사용했다.

사회자: "먼저 한마디씩 품평한다면?"

꽃뱀(아래 꽃) : "에휴 참…. 이 화보에 성적 요소가 없다고 볼 수 있나? 트렁크 안에 웅크리고 있는 사진도 봐봐. 의상과 포즈도 그렇고, 사진을 뒤에서 찍어서 허리와 엉덩이 라인을 강조했잖아. 더군다나 맥심은 그동안 성적 화보를 내걸어왔고. 주로 남성들의 연애 얘기, 섹스칼럼 등이 실리고."

큐티보이(아래 큐) : "<맥심>은 누아르의 한 장면을 연출했다고 하는데, 영화잡지에서도 누아르 영화 주인공들이 이런 식으로 재연하지 않아. 이전 표지는 1년 365일 내내 골이 파인 옷을 입은 여자들이 나오다가 갑자기 이런 사진이 툭 튀어나왔잖아. 그런데 이전에 표지의 성적코드와 이번 표지를 연결 짓지 말라고? 자가당착적인 해명이야. 왜 본인들의 정체성을 부인하는지 모르겠어."

"'위안부 누드화보'는 완전히 아웃됐는데, <맥심> 표지는?"

큐 : "범죄를 화보로 '쌔끈'하게 뽑는다는 게 이해가 안 돼. 옛날에 탤런트 이승연이 위안부 피해자를 콘셉트로 한 누드화보를 찍었을 때 비난했던 사람들이 다 어디 갔는지 모르겠어. 이 화보를 두고 호불호로 의견이 갈린다는 게 놀라워. 잡지 불매운동을 해도 이상하지 않은데."

꽃 : "피해자의 시선에서 찍은 사진은 참…. 남성이 여성을 살해했다는 뉴스가 이렇게 많이 나오는 시기에 이런 걸 내놓다니. 나는 이걸 찍은 배우도 싫어지더라고. 촬영하면서 한번이라도 내적 갈등이 없었는지. 이승연은 당시 완전히 아웃됐는데, 비슷한 일도 남자들이 하면 '사진일 뿐이다' '누아르다'라면서 쉽게 용서가 되는 것 같아."

큐 : "꽃뱀 말대로 실제로 이런 일이 흔하니까 여성들에겐 이 사진 자체가 현실적인 위협으로 다가온 거지. 간혹 캘빈클라인 광고 중에 여성이 채찍을 들고 여왕처럼 앉아있고, 옆에 남성들이 헐벗고 있는 사진이 등장해. 이것과 <맥심>의 표지가 뭐가 다르냐며 반박하는데, 캘빈클라인 화보는 현실에서 거의 존재하지 않잖아."

불만녀(아래 불) : "촬영 현장에서 아무도 문제제기 하지 않았는지 궁금해. 촬영하면서 정말 이상했을 거 같은데. 이걸 데스크가 허락했다는 것도 놀랍고."

사회자 : "메갈리아와 SNS에서는 성폭력 등 강력범죄 생존자들이 자신의 경험을 쏟아내며 맥심 표지에 불편한 의견을 쏟아냈다. 그런데 남성 커뮤니티는 물론 진보적이라 평가받는 오늘의 유머에서도 '불편을 강요하지 말라'는 반응이 압도적이었다. 그중 일부는 '프로불편러들은 닥치라'는 분위기였는데."

꽃 : "오히려 남성들이 집단적으로 반발할 만하지 않나? '여성 납치·살해'가 남성의 성적 판타지라고 공공연하게 주장하는 거잖아. 만약 여성 잡지가 이런 걸 여성의 판타지라고 이야기하는 화보를 내걸었다면 내가 제일 불편했을 거 같은데? 남성의 욕망은 이런 게 아니라고 얘기해야지."

큐 : "취향을 존중하라는 주장도 있었어. 납치·살해·사체유기가 취향이라면 그건 범죄야. 머릿속에만 담아뒀으면 좋겠어."

"프로불편러들, 더 불편해져도 된다"

27일 서울 마포구 성산동 시민공간 나루에서 만난 여성주의 상담팟캐스트 '해장상담소' 진행자들. 왼쪽부터 시계방향으로 큐티보이, 꽃뱀, 불만녀. 여성 납치/살해를 재연한 표지로 논란이 된 성인남성잡지 맥심 품평회에 참석한 이들은 이번 화보를 두고 '호불호'가 갈린다는 사실에 크게 실망했다.
 27일 서울 마포구 성산동 시민공간 나루에서 만난 여성주의 상담팟캐스트 '해장상담소' 진행자들. 왼쪽부터 시계방향으로 큐티보이, 꽃뱀, 불만녀. 여성 납치/살해를 재연한 표지로 논란이 된 성인남성잡지 맥심 품평회에 참석한 이들은 이번 화보를 두고 '호불호'가 갈린다는 사실에 크게 실망했다.
ⓒ 손지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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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 : "만약 누군가 나한테 프로불편러라고 비난하면 위축되지 말고 '그래 나 프로불편러야, 그러니까 불편하게 하지마'라고 받아쳐버려야 해. 그 단어 안에 갇혀서 소모적 논쟁을 할 필요는 없다고 봐."

큐 : "맞아. '넌 안 불편하면 그렇게 살아라. 난 바꿀 거야' 이렇게. 그 단어 가지고 입씨름 할 필요가 없다니까. 최근에 '김치녀를 저격하는 노래를 발표한 키썸이랑 제이스도 본인 인스타그램에 명품 사진 올렸다가 엄청 욕먹고 삭제했잖아. 그냥 놔두지 삭제는 또 왜 해. 그들은 이제 평생 명품 못 사.(웃음) 김치녀라는 프레임을 인정하는 순간 거기 갇힌다니까. 명품 사면 바로 세상에 너도 명품 좋아하는 여자였어? 이런 질문에 계속 따라다닐 테니까."  

꽃 : "수렁에 빠졌네, 수렁에 빠졌어.(웃음) 자기 욕망을 인정하고 이해하면 되는데. <맥심> 표지 보고 너무 화나고, 불편한 분들 '프로불편러'라는 비난에 위축되지 않았으면 좋겠어. 이거에 분노하는 나는 제정신이야라고 생각하고. 이런 논쟁 자체가 전에는 문제라고 인식도 못했던 여성 문제가 수면 위로 올라왔다는 방증이야."

큐 : "남성들의 집단 반발이 일어나지 않는 걸 보고 혹시 남자들에게 섹스와 강간의 경계가 모호한 건 아닐까 우려됐어. 동시에 많은 사람의 입에 이 문제가 오르내린 건 긍정적 신호라고 봤어. 과거와 달리 여성들도 가만히 있지 않고, 여성들의 존재가 기득권에게 위협으로 인식된다는 거니까."

꽃 : "더 불편해 져야 해. 불편러 대회라도 열까?"

큐 : "<맥심> 화형식은 어때?(웃음)"

불 : "그럼 사야 하잖아."

지난 24일 커뮤니티 메갈리아에서는 재밌는 이벤트 하나가 제안됐다. 글쓴이 'ㅇㅇ'은 "남초(남성커뮤니티)에선 여성 이슈를 들고 오는 것만으로도 불편하게 하지 말라며 입막음을 시전 한다"며 "모르고 지나쳤던 여성혐오 발언이나 행동, 광고, 문학, 예술 등을 성토하는 천하제일프로불편러 대회를 열자!"라고 남겼다. 다른 이용자들의 호응도 좋았다. 만약 불편함을 속에 쌓아둔 '프로불편러'가 있다면 이 이벤트에 주목하시길.

○ 편집ㅣ김지현 기자



태그:#맥심, #화보, #메갈리아, #해장상담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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