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막작 <침묵의 시선> 중 한 장면.

개막작 <침묵의 시선> 중 한 장면. ⓒ 엣나인필름


수 십 명을 칼로 잔인하게 죽인 일을 자랑스럽게 얘기하는 사내들이 있다. 이들에게 가족을 잃은 한 노파는 그들을 용서할 수 없다면서도 같은 마을에서 살아간다. 안경사인 아디는 그런 어머니의 말을 가슴에 품고 수십 년 전 자신의 형 람리를 죽인 이웃들을 찾아가 사과를 요구한다.

내용만 보면 얼핏 판타지 스릴러로 치부할 수 있는 이 이야기는 인도네시아에서 벌어졌고, 지금도 이어지고 있는 실화다. 미국 출신의 조슈아 오펜하이머 감독은 다큐멘터리 영화 <침묵의 시선>을 통해 현재진행형인 인도네시아의 비극을 아디의 눈으로 담담하게 바라봤다.

오는 9월 3일 한국 개봉을 앞둔 영화 <침묵의 시선>은 감독의 전작 <액트 오브 킬링>과 정서적으로 이어진다. 권력자들이 감추고 있는 진실에 대해 침묵하는 이들에 대한 경고가 <액트 오브 킬링>이었다면, 그 무서운 침묵 속에서도 '인간의 품위'를 잃지 않고 살아가는 이들을 위로하는 작품이 <침묵의 시선>이라 할 수 있다.

"시대가 좋아서 이러고 있지 옛날이었으면 너..."

1965년 네덜란드의 식민지에서 벗어나기 위해 투쟁하던 인도네시아는 독립엔 성공했지만 군부의 쿠테타로 독재정권의 차지가 된다. 이 과정에서 독립 운동의 선봉에 섰던 인도네시아 공산당은 군부의 타도 대상이 되고, 결국 공산주의자를 척결한다는 명목의 '100만 대학살' 사건이 벌어진다.

'민주 시민과 공산당의 싸움'. 인도네시아 군부 정권이 해명한 이 비극의 원인이다. 세계 최대 이슬람 국가인 인도네시아에서 종교 모독은 곧 큰 죄처럼 여겨진다. 독재 정권은 이를 이용해 시민들끼리 죽고 죽이게 만든 셈이다. 정권은 뒤에서 척결자들을 지원해왔고, 자신들은 모른 체 하며 살상을 방조했다.

자명한 진실 앞에 가해자와 피해자는 스스로 침묵해 왔다. 독재자 수하르토가 1998년 정권에서 물러났고, 그 뒤로 10여년이 더 흘렀지만 여전히 당시 호의호식했던 이들이 권력층 곳곳에 자리 잡고 있기 때문이다. <침묵의 시선>에서 아디가 만난 십 수 명의 살상 가담자들은 "이미 지난 일이고, 다들 사이좋게 살고 있는데 왜 이제 와서 들추느냐"며 오히려 화를 낸다. 혹은 "시대가 좋아서 이러고 있지 옛날이었으면 아디 너, 어떻게 될지 장담 못한다"며 협박하기도 한다.

 영화 <침묵의 시선>의 한 장면. 아디의 형 람리를 직접 죽인 이농의 모습이다. "당시 공산주의자를 죽이는 건 나라를 위한 일이었다"며 자랑스럽게 말하는 인물.

영화 <침묵의 시선>의 한 장면. 아디의 형 람리를 직접 죽인 이농의 모습이다. "당시 공산주의자를 죽이는 건 나라를 위한 일이었다"며 자랑스럽게 말하는 인물. ⓒ 엣나인필름


기시감이 든다. 이 영화를 그저 타국의 특수한 사례로 치부하기엔 한국 사회가 거쳐 온 역사가 너무도 생생하다. 제주 4.3항쟁의 비극이 있고, 군사독재 정권 시절 불었던 매카시즘 광풍은 여전히 '빨갱이들'이란 단어로 치환돼 시민들의 무의식 속에서 꿈틀거리고 있다. 국가적 비극을 설명하는 권력층의 논리는 간단하다. 사회 발전 과정의 하나로 눙치거나, 좌우 이념 대립 내지는 시민 사회 간 갈등으로 축소·은폐하기 일쑤다.

조슈아 오펜하이머 감독은 이 같은 권력의 속성을 냉철하게 짚어냈다. 26일 서울 동대문서 열린 언론 시사 직후 그는 "이런 비극은 이데올로기 문제가 아닌 (권력층이 시민들의) 자유를 착복하면서 살인을 저지른 꼴"이라고 비판했고, "침묵에 익숙해진 우리가 스스로 그것을 깨야 한다"고 호소했다.

찾아가서 묻는다, 잘못임을 알고는 있냐고

영화 속 아디는 살인자에 대한 분노의 감정을 갖고 있지만, 복수를 택하지 않고 끈질기게 찾아다니며 진실을 묻는다. '당신이 행한 일이 도덕적으로 큰 잘못임을 알고나 있냐', '그때 무고한 시민들을 죽이며 지금의 부를 누리게 된 건 아닌가'라며 준엄하게 되묻는다. 살인자 이웃들과 한 동네에 사는 어머니는 그런 아들을 말리며 몸조심 하라고 하지만, 아디는 그저 웃어보일 뿐이다.

이런 의문이 들 수 있다. 이들이 당한 거대 폭력은 과연 누가 어떻게 보상해주는지 말이다. 국가에게 기댈 수도 없고 시민 사회의 도움도 요원한 상황에서, 조슈아 오펜하이머 감독은 자연스럽게 아디 가족의 삶에 더 파고들었다. 그의 딸은 아빠의 렌즈 통을 가지고 놀며 천진난만한 웃음을 보인다. 이제 막 나비가 되려고 이리저리 움직이는 고치들을 가지고 노는 딸은 곧 침묵과 폭력 속에서 파괴당한 아디와 이전 세대의 희망이었다. <액트 오브 킬링>에서 한 발 더 나아간 지점이다.

또 다른 의문도 든다. 사실 인도네시아의 비극은 암묵적으로 군사 독재 정권을 지원해준 미국과 영국 등 서방 제국주의 국가가 큰 원인인데 영화가 너무 단순하게 바라보고 있는 건 아닌지. 심지어 지난 1999년 호주의 하워드 총리는 인도네시아 동티모르에 군대 파견을 두고 "아시아, 태평양 지역에서 미국 대리인 노릇을 하겠다"는 일명 '하워드 독트린'을 발표하기도 했다. 서방의 야욕이 여전히 동남아시아에 뼏쳐 있다는 증거다.   

폭력사태에도 불구하고 상영 취소 횟수는 25회 뿐

 영화 <침묵의 시선>의 한 장면. 1965년 대학살의 가담자 중 하나인 삼실과 그의 딸의 모습이다. 살인의 기억을 대수롭지 않게 얘기하는 삼실을 두고 그의 딸은 아디에게 "아버지를 용서해달라"고 대신 사과하지만 동시에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자신의 아버지를 이해해달라고 말한다.

영화 <침묵의 시선>의 한 장면. 1965년 대학살의 가담자 중 하나인 삼실과 그의 딸의 모습이다. 살인의 기억을 대수롭지 않게 얘기하는 삼실을 두고 그의 딸은 아디에게 "아버지를 용서해달라"고 대신 사과하지만 동시에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자신의 아버지를 이해해달라고 말한다. ⓒ 엣나인필름


물론 눈에 보이는 일련의 사안으로만 보면 현실은 어두워 보인다. <침묵의 시선>이 2014 베니스 영화제 주요 부문 5관왕을 차지했고, 각지에서 70여개의 영화상을 수상했음에도 정작 인도네시아 내부에선 상영 당시 폭력 사태가 일었다는 것도 지나칠 수 없는 사실이다.

이에 대해 조슈아 오펜하이머 감독은 의미심장한 말을 했다. "경찰과 군부에 의해 일어난 그 폭력 사태로 취소된 상영횟수는 고작 25번뿐이었다"고.

2014년 12월 10일 세계 인권의 날에 인도네시아에서 개봉한 <침묵의 시선>은 상영 3주차 만에 116개 도시에서 950회나 상영됐다. 현지 집계에 따르면 약 5만 3000명의 관객이 들었다고 한다. 2012년 <액트 오브 킬링>이 비밀리에 개봉했고, 인터넷을 통해 인도네시아어 판을 무료로 다운받게 했던 것과 대조되는 부분이다.   

이쯤에서 한 기사를 인용해 본다. 정문태 국제분쟁 전문기자는 2009년 5월 경 인도네시아에 대한 기억을 이렇게 서술했다.

'(독재정권에 맞섰지만) 무기력한 시민-학생운동을 나무라는 기사를 날렸다. 결국 (독재자) 수하르토를 쫓아내기 힘들 것이라는 내용을 담은 기사를 수하르토가 물러난 날 가판대에 뿌렸다. 한동안 고개를 들 수 없었다. 20년 가까이 외신을 뛰면서 그때처럼 부끄러웠던 적은 없다.' - 저서 <현장은 역사다> 중

과오를 부정하고 합리화 하는 사람들이 있는 만큼, 그에 맞서는 양심의 사람들도 존재한다. 대부분이 예상치 못했지만 인도네시아 역시 스스로 독재를 몰아냈고, 극심한 성장통을 이겨내는 중이다.

다만,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것은 그 누구든 역사의 흐름에서 가해자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이다. <침묵의 시선>은 그런 의미에서 지나쳐선 안 될 주요한 참고서다.

[기자간담회 현장 기사 보기]
인도네시아에서 폭력 사태 일으킨 영화가 온다

'침묵의 시선' 조슈아 오펜하이머, 진실과 화해를 위해 2012년 <액트 오브 킬링>으로 전 세계 70개 이상의 영화제에 초청되며 수많은 상을 받았던 조슈아 오펜하이머 감독이 26일 오후 서울 동대문 메가박스에서 열린 다큐멘터리<침묵의 시선> 시사회 기자간담회에서 작품을 소개하고 있다.
조슈아 오펜하이머 감독은 <액트 오브 킬링>에 이어 <침묵의 시선>으로 2014년 베니스국제영화제 심사위원대상, 국제비평가협회상, 2015년 베를린국제영화제 평화영화상, 2014년 부산국제영화제 부산시네필상 등 전 세계 37개의 영화상을 수상했다.  

<침묵의 시선>은 1965년 인도네시아 100만 명 대학살 사건으로 형을 잃은 '아디'가 50년 뒤 형을 죽인 사람들을 찾아가 직접 인터뷰를 진행하는 다큐멘터리로 학살 위에 세워진 사회 및 진실과 화해, 정의를 바라는 인도네시아인들의 모습을 담고 있다.

▲ '침묵의 시선' 조슈아 오펜하이머, 진실과 화해를 위해 2012년 <액트 오브 킬링>으로 전 세계 70개 이상의 영화제에 초청되며 수많은 상을 받았던 조슈아 오펜하이머 감독이 26일 오후 서울 동대문 메가박스에서 열린 다큐멘터리<침묵의 시선> 시사회 기자간담회에서 작품을 소개하고 있다. 조슈아 오펜하이머 감독은 <액트 오브 킬링>에 이어 <침묵의 시선>으로 2014년 베니스국제영화제 심사위원대상, 국제비평가협회상, 2015년 베를린국제영화제 평화영화상, 2014년 부산국제영화제 부산시네필상 등 전 세계 37개의 영화상을 수상했다. <침묵의 시선>은 1965년 인도네시아 100만 명 대학살 사건으로 형을 잃은 '아디'가 50년 뒤 형을 죽인 사람들을 찾아가 직접 인터뷰를 진행하는 다큐멘터리로 학살 위에 세워진 사회 및 진실과 화해, 정의를 바라는 인도네시아인들의 모습을 담고 있다. ⓒ 이정민



침묵의 시선 액트 오브 킬링 인도네시아 조슈아 오펜하이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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