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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월 총격사건이 벌어진 샤를리 에브도 건물.
 지난 1월 총격사건이 벌어진 샤를리 에브도 건물.
ⓒ 임하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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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샤를리 에브도에 한 번 가 보면 어떨까?"

파리에 온 다음에 문뜩 이런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진짜로 가보았다. 청명한 하늘에 따스한 햇볕이 쏟아지던 어느 금요일, 파리를 떠나기 하루 전날이었다.

그날의 일정도 역시 오페라에서 시작되었다. 오페라 거리를 따라 걷다 왼쪽으로 빠져 파리 3구로 향한다. 퐁피두센터를 지나면 마레 지구에 다다른다. 내가 머무는 프로방스 가에서는 빠른 걸음으로 40분, 느린 걸음으로 50분 정도 걸리는 거리이다. 물론 어떤 길을 선택하느냐에 따라 다르겠지만.

어느덧 모르는 길로 들어섰다. 계속 동쪽을 향해 걷는다. 가끔 힐끗힐끗 지도를 보며 가는 길이 맞는지 확인해 본다. 그렇게 얼마를 걸었을까. 드디어 파리 11구의 샤를리 에브도 건물에 도착했다. 지난 1월, 전 세계를 떠들썩하게 만든 총격 사건이 벌어진 바로 그곳이다. 이후 샤를리 에브도는 다른 곳으로 이사했으니 정확히 말하자면 전(前) 샤를리 에브도 건물이다.

이곳에서 총격 사건이 있었음을 짐작하게 하는 것은 벽면에 붙은 검은 스티커 한 장뿐이다. 그 위에는 'JE SUIS CHARLIE'(나는 샤를리다)라는 문구가 적혀있었다. 놀라우리만치 한산한 거리에는 가끔 행인 몇 명이 보일 뿐이다. 몇십 분에 한 번 순찰을 하는 경찰차를 보면 조금 삼엄한 분위기마저 느껴진다.

무언가 불안한 느낌이 들기도 했지만 결국 이곳에 오랜 시간을 머물렀다. 그리고 생각에 잠겼다. 이런 비극적인 사건은 도대체 왜 일어난 것일까? 충분히 방지할 수 있었던 것일까? 아니면 일어날 수밖에 없었을까? 잘못은 누구에게 있는 것일까?

'나는 샤를리다'와 '나는 샤를리가 아니다'

'Je Suis Charlie(나는 샤를리다)'
 'Je Suis Charlie(나는 샤를리다)'
ⓒ 임하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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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문제를 대하는 사람들의 태도는 크게 두 부류로 나눌 수 있다. 'Je suis Charlie'(나는 샤를리다), 그리고 'Je ne suis pas Charlie'(나는 샤를리가 아니다)로 말이다. 사건이 발생한 직후에는 희생자들에 대한 동정과 이슬람 테러리스트들에 대한 분노, 그리고 표현의 자유를 위시한 전자가 우세했다면, 시간이 지날수록 근본적인 원인은 바로 프랑스 사회 전체에 있다는 후자의 목소리도 커지기 시작했다.

샤를리 에브도 건너편, 한 건물의 벽에 기대어 나는 이 두 갈래 중 어디에 속할까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이 둘 중에 어디에 속한다고 할 만큼 뚜렷한 입장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굳이 하나를 택해야 한다면 후자에 가까울 것 같다.

그러나 내 개인적인 입장은 배제하고 왜 이런 사건이 일어날 수밖에 없었는지, 그 이유를 객관적으로 생각해 보기로 했다. 역시 사고의 물꼬를 트려면 정확한 사실관계부터 알아야 하는 법. 샤를리 에브도에서 일어난 일을 다시 한 번 간단히 정리해 보았다.

지난 1월 7일 오전 11시경, 세 명의 무장한 괴한이 파리 11구의 샤를리 에브도 사무실에 들이닥쳐 총기를 난사했고, 총 12명이 사망했다. 당시 편집회의 중이던 스테판 샤르보니에 편집장을 비롯해 장 카뷔, 조르주 볼린스키, 베르나르 베라크를 비롯한 기자와 편집진 10명이 숨졌고, 진압 과정에서 경찰 두 명도 목숨을 잃었다.

테러범 중 두 명은 사이드 쿠아시, 셰리프 쿠아시 형제로 밝혀졌고, 나머지 한 명도 역시 같은 단체 소속인 것으로 알려졌다. 테러 직후 행방을 감춘 쿠아시 형제는 이틀 뒤인 1월 9일, 파리 북부의 한 인쇄회사 건물로 도주하여 인질극을 벌이기 시작했다. 한편 같은 날, 파리 동쪽 방센느라는 마을의 유대인 식료품점에서는 또 다른 끔찍한 총격 사건이 발생했다.

범인은 쿨리발리라는 이슬람 교도였는데, 바로 전날 파리 남쪽 몽루즈에서 경찰을 살해한 혐의로 관계 당국의 추적을 받는 중이었다. 방센느에서 발생한 총격 사건으로는 3명의 시민이 사망했고, 이후 벌어진 인질극에서도 4명이 목숨을 잃었다(나중에 경찰 조사에 따라 밝혀진 바에 의하면 쿠아시 형제와 쿨리발리의 관계는 오래전부터 지속하여 왔다고 한다). 작전을 개시한 프랑스 특공대에 의해 쿠아시 형제와 쿨리발리가 사살당하고, 이로써 공식적인 사건 일지는 막을 내리게 된다.

이 사건이 프랑스 사회에 남긴 후유증은 결코 만만한 것이 아니었다. 일단 피해 정도만 놓고 보아도 1월 7일부터 9일까지 3일간 총 17명의 시민이 목숨을 잃었다. 테러범에 의해 사망한 경찰관도 3명이나 된다.

프랑수아 올랑드 대통령은 이를 두고 "50년 만의 최악의 테러"라 칭했고, 프랑스 온 국민이 공포와 충격의 도가니에 휩싸였다. 무슨 말이 더 필요할까. 정말 두말 할 필요 없는 참혹한 테러였다(만약 서울에서 이런 사건이 벌어졌다면... 생각만 해도 아찔한 일이다).

월간지 '하라 키리'로 시작, 한때 폐간 조치 당하기도

그렇다면 다시 본론으로 돌아와서, 이런 끔찍한 사건은 도대체 왜 일어난 것일까? 지구 반대편 한국에 사는 우리는 이 사건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그저 '정신 나간 이슬람교도들이 또 말도 안 되는 일을 저질렀구나!' 하는 단편적인 생각에서 벗어나는 것도 필요하지 않을까. 사건이 벌어진 이유와 맥락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해보자.

샤를리 에브도의 역사를 되짚어 보면서 질문에 대한 조금의 실마리를 얻고 싶었다. 이야기는 샤를리 에브도의 전신이라고 할 수 있는 '하라 키리(Hara Kiri)'가 창간된 1960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일본어로 할복(はらきり)의 의미하는 이 잡지를 창간한 주축은 바로 만평가 프랑수아 카바나(François Cavanna)와 조르쥬 베르니에(Georges Bernier), 그리고 만화작가 프레드(Frédéric Aristidès)였다.

사회 전반에 대해 굉장히 풍자적이며 도발적이고, 외설적이기까지 해 사람들의 눈살을 찌푸리게 하였던 하라 키리. 이 잡지는 처음에는 2천 부 정도의 자그마한 월간지로 시작했지만, 곧 상당한 성공을 거두었다.

1961년과 1966년 두 차례에 걸쳐 발행 금지 처분을 받으면서도 꾸준한 독자층을 확보했고, 1969년 월간지에서 주간지 '하라 키리 에브도(Hara-Kiri Hebdo)'로 변신하는 데 성공한다. 그러나 이제 갓 창간된 하리키리 에브도는 1970년 샤를 드골의 죽음을 추모하는 사회 분위기 속에 그를 조롱했다는 이유로 프랑스 내무부에 의해 폐간조치를 당하게 된다.

그러나 이도 잠시. 얼마 지나지 않아 이 잡지는 샤를리 에브도(Charlie Hebdo)로 이름을 바꾸어 재발간되었고, 더욱 신랄한 풍자를 감행하며 70년대 무렵 새로운 중흥기를 맞는다. 그렇지만 70년대 후반부터 사회 전반에 자유주의적인 분위기가 자리 잡으며 독자 수가 급격히 줄어들었고, 결국 1982년 폐간되고 만다.

이 잡지가 되살아난 것은 1992년. 원년구성원들을 중심으로 가수 겸 칼럼니스트 필립 발(Philippe Val)이 주축이 되어 다시 한 번 잡지를 부활시킨다. 실제로 여러 사회 저명인사들의 지지를 등에 업은 샤를리 에브도는 매주 14만 부를 발행하는 영향력 있는 주간지로 자리 잡게 되었다. 특히 이 잡지가 화제를 모은 것은 2006년으로, 무함마드를 조롱하는 만평을 싣기 시작한 때였다.

이 만화는 바로 몇 달 전인 2005년 9월 덴마크 일간지 일랜포스탠(Jyllands-Posten)에서 처음 선보인 것이다. 당시에도 여러 이슬람 국가와 단체의 강력한 반발을 불러일으킨 바 있었다. 이후 본격적으로 이슬람 풍자를 시작한 샤를리 에브도의 편집진은 수시로 살해 협박을 받기 시작했다. 2011년 무함마드의 캐리커처를 재등장시킨 이후에는 사무실 전체가 방화로 불타 잿더미가 되기도 했다. 그리고 지난 1월, 결국 12명이 목숨을 잃고 10명이 다친 비극적인 총격 사건이 발생한 것이다.

바로 그 사건이 일어난 건물 앞에 한참을 우두커니 서 있었다. 여러 가지 단어가 머리를 스쳤다. 살인, 테러, 이슬람 근본주의, 그리고 표현의 자유. 무엇이 옳고 무엇이 그른 것인가. 아니, 옳고 그름의 문제를 떠나 무엇이 정당하고, 또 무엇이 정당하지 않은 것인가.

살인은 어떤 이유로도 정당화될 수 없다. 사회적 약자를 조롱하는 일은 어떠한가. 무슬림들은 왜 유럽으로 오게 되었나. 프랑스에 있는 무슬림들은 소수자이자 사회적 약자로 분류되어야 하는가. 모든 무슬림은 지하디스트가 될 잠재적 가능성을 지니고 있는가. 왜 그들 중 일부는 극단주의로 치닫게 되는가. 그리고 표현의 자유는 어디까지 보장되어야 하는가. 보는 이에게 불쾌감을 주는 것도 표현의 자유라는 범주에 포함되어야 하는가. 아니면 그 불쾌감이라는 것도 문화, 또는 개인에 따라 지극히 상대적인가. 여러 가지 정리되지 않은 생각이 나를 혼란에 빠뜨렸다.

차별과 멸시 부추기는 사회, 대표적 사례 '샤를리 에브도'

거의 30분 간격으로 순찰을 돌던 경찰차의 모습.
 거의 30분 간격으로 순찰을 돌던 경찰차의 모습.
ⓒ 임하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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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을 마무리하기 전 몇 가지 되짚어 보아야 할 것이 있었다. 이 사건을 벌인 쿠아시 형제에 대한 것이다. 그들은 생의 대부분을 프랑스, 그것도 수도 파리에서 나고 자랐다. 그러나 알제리 이민자 출신 부모님을 둔 쿠아시 형제의 삶은 어렸을 때부터 그리 평탄하지 않았다.

1994년 사이드가 12살, 셰리프는 10살 무렵 두 형제는 학교를 마치고 집에 오자마자 스스로 생을 마감한 어머니의 시체를 보게 된다. 이들의 아버지에 대해서는 제대로 알려진 바가 없지만 비슷한 무렵에 역시 세상을 떠났다고 전해진다. 이를 통해 우리는 쿠아시 형제 부모의 삶도 그리 순탄치 못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이방인이자 이민자, 소수자로의 삶은 분명히 멸시와 차별, 그리고 그로 인한 어려움으로 가득했으리라.

이렇게 부모님을 모두 여읜 쿠아시 형제는 같은 해 남동생, 그리고 누나 한 명과 함께 프랑스 중남부의 한 보육시설로 보내진다. 사이드는 그곳에서 호텔리어가 되기 위한 과정을 밟고 있었고, 셰리프는 엔지니어가 되고자 훈련을 받고 있었다. 데일리메일의 기사에 따르면 두 형제는 축구를 무척 좋아하는 점잖은 아이들이었다고 한다. 특히 더 어렸을 때는 미키마우스를 비롯한 디즈니 캐릭터들을 좋아하는, 보육교사들의 귀여움을 듬뿍 받는 소년이었다고 한다.

보육시설에서 6년의 세월을 보낸 쿠아시 형제가 파리로 돌아온 것은 2000년. 그로부터 몇 년 지나지 않아 이들은 파리드 베네투(Farid Benyettou)라는 '멘토'를 만나며 본격적인 테러에 가담하기 시작한다. 쿠아시 형제는 베네투가 이끄는 조직에 가입해 무기를 다루는 법을 익히고, 정신교육을 받으며 진정한 지하디스트로 거듭나기 시작했다. 특히 셰리프는 여러 번 시리아와 이라크의 테러 조직에 가담하려고 시도했고, 그 때문에 3년을 감옥에서 보내기도 했다.

여기서 드는 의문 한 가지. 그런데 왜 축구를 좋아하던 점잖은 형제는 짧은 시간 안에 급격히 이슬람 극단주의로 빠져들게 된 것일까. 짐작건대 그들의 내면에는 오래전부터 수많은 감정의 동요와 분노의 용솟음이 있었을 것이다. 부모님을 죽음으로 몰아넣은 사회에 대한 증오, 자신들이 처한 처절한 삶의 현실에 대한 불만, 그리고 사상적, 심리적으로 이를 어느 정도 상쇄시킬 수 있었을 이슬람 극단주의. 이 모든 것이 맞물려 그들을 지하디스트로 만든 것이 아닐까 조심스레 생각해본다.

이제 생각을 정리할 때가 되었다. 샤를리 에브도 사건은 '목숨을 바쳐 표현의 자유를 수호한 사람들의 숭고한 희생'도, '얼빠진 이슬람 극단주의자들의 소행'도 아니다. 이 사건은 우연히 벌어진 것도, 결코 우발적인 것도 아니다. 이 단순한 사건을 관통하는 복잡한 사회적 맥락을 우리는 읽어낼 수 있어야 한다.

애초에 중동에서 나고 자란 극단주의자들은 차치하고서라도 생김새와 종교가 다를 뿐 프랑스에서 나고 자란 이민 청년들은 왜 극단주의자들로 변신하는가? 왜 유럽 국가 중 프랑스 출신자들의 비율이 이슬람국가(IS)에서 가장 높은 것일까?

세계 각국을 침략하여 식민지로 삼았던 프랑스의 제국주의적 과거, 그렇게 해서 생긴 '프랑스어권' 국가들, 그리고 프랑스 정부 자신이 2차대전 이후 국가 재건을 위해 그 프랑스어권 국가들에서 받아들인 이민자들. 그들에 대한 차별과 멸시, 그리고 노골적인 증오를 부추기는 프랑스 사회. 그 대표적인 사례인 샤를리 에브도. 사회적 기득권층인 그들이 소수자인 이민자들의 문화와 종교를 비하하는 것을 과연 표현의 자유를 지키기 위한 용기라고 간주할 수 있는 것일까?

물론 이 모든 것을 온전히 프랑스 정부와 사회의 탓으로 돌릴 순 없다. 하지만 많은 부분 그들의 잘못도 있음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많은 사람이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이고 있는 만큼, 프랑스 정부와 국민들이 여러 가지 어려운 상황들을 지혜롭게 극복해나가길 바란다. 그들이 더욱 하나 된 사회를 만들어나갈 수 있기를 기대해본다.

한국에서도 짙어지는 외국인 비하, 남 일 아니다

아직 프랑스에 비하면 새 발의 피에 불과하지만, 최근 대한민국에 거주하는 외국인의 비율은 점점 증가하는 추세다. 그중에는 재외동포도, 한국인과 결혼한 이들도, 어학연수를 온 이들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역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것은 일자리를 찾아온 외국인 노동자들이다. 베트남, 인도, 캄보디아 등에서 많은 이들이 다시 고국에 돌아가 안정된 삶을 누리고자, 혹은 자신의 가족을 먹여 살리기 위해 한국을 찾는다.

그렇지만 막상 한국에 도착한 이들이 맞닥뜨리는 환경은 그리 녹록치 않다. 인권을 존중받기는커녕 온갖 차별과 임금 체불을 당하면서도 제대로 항의 한 번 해볼 수 없는 것이 그들의 현실이다. 특히 동남아시아나 제3국가 출신 노동자들을 무시하고 비하하는 분위기가 이미 한국사회에 짙게 형성되어 있는 것 같아 참으로 씁쓸하다.

이런 한국의 실정을 보면 오히려 각종 보조금을 비롯한 사회보장제도에 기초한 프랑스의 이민 정책이 그나마 더 낫다는 것을 느끼게 된다. 그리고 우리의 또 다른 '이민자'라고 할 수 있는 탈북자들도 있다. 대다수의 탈북자들이 남한이라는 완전히 새로운 사회와 사고방식에 적응하는 데 많은 어려움을 겪고 있다. 남한사람과 북한사람은 같은 언어를 쓰지만 자라온 환경과 사고방식이 완전히 다르다. 상황이 그야말로 프랑스와 북아프리카 같다는 생각을 해본다.

이민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오랜 세월에 걸쳐 꾸준히 노력해온 프랑스도 지금 커다란 문제를 겪고 있다. 훗날 한국이 통일이 되어 남한과 북한이 하나가 된다면 얼마나 엄청난 혼란이 일어날까. 샤를리 에브도 사건이 남의 일 같지 않은 이유다.

지금부터라도 외국인 노동자와 탈북자들이 어떻게 한국사회에 잘 적응할 수 있을지, 그를 위해 우리가 어떤 도움을 줄 수 있을지 생각해볼 일이다. 그리고 훗날 통일 이후에는 어떻게 두 갈래의 민족을 하나로 융합해나갈 것인지에 대해서도 진지하게 고민해봐야 할 시점이다.

(2편에 계속)


태그:#파리, #샤를리 에브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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