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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부해서 남주나"라는 말이 있다. 공부를 열심히 하면, 좋은 학벌을 얻어 출세할 수 있다는 뜻이 담겨있다. 과거 공부는 계층 이동의 사다리 역할을 했다. 하지만 시대는 바뀌었고, 공부는 낙오자를 양산하는 게임으로 변질됐다. 1% 소수만이 승자독식의 수혜자가 되고, 나머지 99%는 불행하다. 공부에 대한 인식 전환이 없으면, 우리사회는 '헬조선'에서 벗어날 수 없다. 여기 "공부해서 남주자"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다. 지난 4월 조국 서울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에 이어 지난 5일 '사회적 약자의 허위자백 사건'에 모든 것을 내건 박준영 변호사를 만났다. - 기자 말

박준영 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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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사무실을 내놓았는데, 아직 나가지 않네요."

지난 5일 오전, 마주 앉은 박준영(41) 변호사가 허허 웃는다. 경기도 수원시 원천동에 있는 50㎡ 남짓한 크기의 사무실에는 적막이 흘렀다. 3개의 방으로 나뉜 사무실에 책상이 여럿 있었지만, 그곳엔 서류 더미만 쌓여 있었다. 사건 검토와 상담으로 분주해야 할 변호사 사무실 모습은 온데간데없었다. 왜 사무실을 정리하느냐고 물으니, 사무실을 유지하기 어렵단다.

올해 상반기 매출은 1000만 원. 사무실 월세와 직원 월급 등을 제하고 나면, 매월 500만~600만 원씩 적자다. 지난해까지만 해도 변호사 2명과 사무직원 4명을 고용해 매월 3000만~4000만 원의 매출을 올렸다. 다들 떠나보냈고, 마지막 남은 사무직원은 이번 달까지만 일한다. 혼자 사무실을 정리해야 한다.

이러한 상황은 박 변호사 스스로 선택한 일이다. 지난해에는 두 간첩 사건의 피고인들을 변론했고, 올해에는 아버지와 택시기사를 죽인 혐의로 각각 무기징역과 10년형을 선고받은 김신혜씨와 최성필(가명)씨의 재심을 추진하고 있다. 돈도 안 되는 데다가, 국가 기관과 싸워야 한다. 특히, 재심 사건은 대법원 확정판결을 뒤집고 사법시스템에 도전해야 하는 지극히 까다로운 일이다.

박 변호사는 어느새 '사회적 약자의 허위자백 사건' 전문 변호사가 됐다. 그것도 무료 변론이다. 한때 부잣집 딸을 만나고 삼성과 대형 로펌에 들어가기 위해 노력했던 그다. 이미 많은 돈을 번 건 아닐까. 그런 것 같지는 않다. 그는 수원의 24평 아파트에 산다고 했다. 보증금 3000만 원에 월세가 50만 원이란다. 그리고 수억 원의 빚이 있단다. 더욱 궁금해졌다. 왜 사회적 약자의 변호인이 되려고 하는지.

'속물' 변호사, 인생을 바꿀 사건을 만나다

박준영 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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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 변호사는 2007년 7월 수원에서 개업했다. 수원지방법원에서 한 달에 40~50건에 달하는 국선변호사 일을 맡았다. 다른 국선 변호사와 비교해, 2배 이상 많은 사건을 다뤘다. 명절에도 고향에 내려가지 못했다. 그랬더니 법원에서 입소문이 났다. 2008년 1월 법원은 박 변호사에게 한 살인사건의 피고인 변호를 맡아달라고 했다.

노숙하던 가출 청소년 5명과 지적 장애를 가진 청년 2명이 또 다른 가출 청소년을 죽인 사건이다. 이들 7명 모두 검찰 조사에서 살인을 자백했다. 박 변호사는 "혹시라도 경찰·검찰의 강압이나 회유가 있었을 것으로 의심하지 않았다. 아이들의 얘기를 들어주고 변론하자는 생각으로 구치소로 향했다"고 말했다.

박 변호사는 살인자가 된 가출 청소년들을 만났다. 일부는 사람을 죽이지 않았다고 말을 바꿨다. 한 명은 "애들이 안 죽였대요? 죽였는데…"라고 말끝을 흐렸다. 박 변호사는 "청소년들이 살인자가 아닐 수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꼼꼼히 살펴봐야겠다고 생각했다"고 전했다. 청소년상담센터 교사들이 촬영한 현장 사진을 보고, 박 변호사는 사건에 더욱 의구심을 가졌다.

"조서에는 피고인들이 담을 넘어 고등학교에 들어가 사람을 죽였다고 나와 있다, 하지만 바리케이드가 있는 정문으로 쉽게 들어갈 수 있었다, 조서와 사건 현장이 맞지 않았다"고 지적했다. 가출 청소년들을 여러 번 찾아가 설득해, 마음을 돌렸다. 청소년들은 법정에서 허위자백이었다고 털어놓았다.

- 재판 과정에서 가장 어려운 일은 무엇이었나.
"7명이 자백했는데, 설마 모두 허위자백을 했겠느냐는 생각을 깨는 것이었다. 다들 나이가 어리고 경찰·검찰이 강압수사를 했다 해도, 어떻게 7명 모두 허위자백을 할 수 있을까. 세상의 합리적인 잣대로는 이해할 수 없다. 하지만 그들의 입장에 서니 편견을 깰 수 있었다."

- 7명 모두 무죄 판결을 받았다. 특히, 지적 장애가 있는 20대 노숙인 2명은 재심을 통해 무죄를 선고받았다.
"가출 청소년들이 살인했는지 따진 1~3심, 이미 확정판결을 받은 20대 노숙인들의 위증·재심 재판을 포함하면, 모두 15번의 재판에서 변론했다. 5년 10개월이 걸렸다. 처음에는 이렇게 오래 걸릴 거라고 생각 못 했다. 다만, 내 인생을 바꿀 사건이라고 생각했다. 내가 알기로, 과거사정리위원회 등의 권고 없이 일반 형사사건에서 재심이 이뤄진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 이 사건으로 유명해졌다. 그 뒤에 사건이 많이 들어왔을 것 같다.
"처음에는 유명해지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유명해지고 싶다는 생각은 줄었다. 법원에서 처음 재심 청구를 기각했을 때 이게 정의인가 싶었다. 법적 안정성을 운운하지만, 잘못된 것을 바로잡지 못한다면 그걸 사법 정의라 할 수 있나. 회의가 밀려왔다."

간첩 사건 무료 변론했더니, 수사 대상에 오르다

'익산택시기사 살인사건' 취재를 하고 있는 박준영 변호사(맨 왼쪽) 동료들.
 '익산택시기사 살인사건' 취재를 하고 있는 박준영 변호사(맨 왼쪽) 동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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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준영 변호사는 교도소에서 재소자들에게 다양한 편지들이 오면 편지들을 벽에 붙혀 놓는다. 억울함을 호소하는 재소자들의 편지가 끊이지 않고 온다고 했다.
 박준영 변호사는 교도소에서 재소자들에게 다양한 편지들이 오면 편지들을 벽에 붙혀 놓는다. 억울함을 호소하는 재소자들의 편지가 끊이지 않고 온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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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 노숙소녀 살인사건 이후 박 변호사는 나름 잘 나갔다. 하지만 지난해 4월 전화 한 통이 그의 인생을 완전히 틀어놓았다. 초면의 장경욱 변호사가 그에게 탈북자 간첩 사건을 맡아 달라고 했다.

간첩으로 몰린 탈북자 홍아무개씨를 만났다. 박 변호사는 "진짜 간첩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발을 빼고 싶었다"고 했다. 장경욱 변호사는 다시 북한 보위부가 남파한 간첩이라고 자백해 1~2심에서 유죄판결을 받은 탈북자 이아무개씨에 대한 면회를 요청했다. 박 변호사는 거절하지 못하고 이씨를 만났다. 박 변호사에게 느낌이 왔다. 허위자백 사건!

"공권력의 자의적 법 집행을 제한한다는 전제하에 국가보안법 존치에 찬성한다. 하지만 이씨와 홍씨를 변론하면서 국정원의 반인권적인 여러 문제점을 봤다. 공권력의 위법을 지적하는 게 변호사의 역할이다. 또한, 탈북자들의 실상이 알고 나니, 이들이 한국에 와서 억울한 누명을 쓴 모습이 너무 불쌍했다. 사무실에 안 나가고 이 사건에만 매달렸다."

박 변호사는 홍씨와 이씨의 무료 변론에 나섰다. 홍씨는 그해 9월 무죄 판결을 받았다. 하지만 1, 2심에서 유죄를 받았던 이씨는 대법원에서 확정판결을 받았다. 박 변호사는 이씨의 누명을 벗겨줄 증거를 대법원에 제출했지만, 새로운 증거를 받아들이지 않는다는 대법원의 원칙 앞에서는 소용이 없었다.

그는 이 사건으로 변호사 인생 최대의 위기에 처했다. 지난해 SBS <그것이 알고 싶다>에 이씨와 관련한 국가정보원 수사기록을 넘긴 것을 두고, 그해 11월 경찰이 형사소송법을 위반했다며 수사에 나선 것이다. 이에 관해 물으니, 그는 기자 앞에서 자신을 수사했던 경찰에게 연락했다. 아직 사건을 검찰로 넘기지 않았다는 답변을 들었다. 박 변호사는 검찰이 자신을 빨리 기소하기를 바랐다.

- 만에 하나 실형을 받고 변호사 자격을 잃을 수 있다.
"검찰로부터 기소를 당한다면, 이 사건을 다시 한 번 법정에 다툴 기회를 얻게 된다. 만약 잘못돼 변호사 자격을 잃는다 해도 억울하지 않을 것 같다. 진실이 밝혀지는 게 중요하다. 그리고 운 좋게 사법시험에 합격해, 10년 동안 변호사로 잘 먹고 잘살았다. 변호사가 인생 전부는 아니지 않나."

누구나 공정하게 재판을 받을 권리가 있다

책상 위에 놓여 있는 '김신혜 사건' 재판자료.
 책상 위에 놓여 있는 '김신혜 사건' 재판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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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신혜씨가 박 변호사에게 보낸 옥중 편지.
 김신혜씨가 박 변호사에게 보낸 옥중 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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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 변호사는 최근 박상규 전 <오마이뉴스> 기자와 함께 김신혜씨와 최성필(가명)씨의 재심을 위해 뛰고 있다. 다음 뉴스펀딩을 통해 이를 적극적으로 알렸고, 두 사건 합쳐 7000만 원의 후원금이 모였다. 연대의 힘 때문이었을까. 지난 6월 광주고등법원은 최씨 사건에 대한 재심 개시 결정을 내렸다. 검찰이 항고했고, 대법원의 판단만 남겨두고 있다.

이 사건의 공소시효는 애초 9일로, 박 변호사의 애를 태웠다. 다행히 지난달 24일 사람을 살해한 범죄에 대한 공소시효를 폐지하는 '태완이법'이 국회에서 통과되고 일주일 뒤 공포·시행되면서, 진범에게 죄를 물을 수 있게 됐다. 박 변호사는 "국회에서 통과되지 않았다면 정말 끔찍했을 것"이라면서 "진범이 창문 밖에서 기다리는 꿈을 자주 꿨다"고 말했다.

김신혜씨 사건 역시 재심을 기대하고 있다. 광주지방법원 해남지원은 지난 5월 재심을 결정하기 위한 심문 기일을 열었다. 김씨는 법정에 나와서 억울함을 토로했다. 박 변호사는 지난해 <그것이 알고 싶다> 제작진의 요청으로, 김씨 사건을 맞닥뜨렸다. 그는 "사건 기록을 보니 불쌍했다"면서 "설사 아버지를 죽였다 해도, 죽은 아버지가 감옥에 갇혀 고통스러워하는 딸의 모습을 원하지 않을 것 같았다"고 전했다.

- 김신혜씨가 무죄이기 때문에 재심을 신청한 것인가.  
"그건 알 수 없다. 처음부터 김씨가 무죄라고 생각하고 이 사건을 맡은 게 아니다. 경찰이 영장도 없이 압수 수색을 했고, 압수 수색할 때 군대 동기를 동원하기도 했다. 김씨는 수사를 받으면서 폭행을 당했다고 진술하고 있다. '위법하게 수집된 증거는 효력이 없다'는 판례를 감안하면, 재심 사유가 명백하다."

- 재심을 해서 다시 유죄가 나올 수 있다. 
"나라면 잘못된 수사와 재판으로 유죄를 선고받는다면, 받아들일 수 있을까. 재심의 본질은 무죄를 주장하는 게 아니다. 다시 재판해달라는 것이다. 누구나 적법한 증거와 절차에 따라 공정하게 재판을 받을 권리가 있다는 얘기를 하고 싶은 거다."

☞ 박준영 변호사 인터뷰 ②편이 이어집니다.

○ 편집ㅣ곽우신 기자



태그:#박준영 변호사, #공부해서 남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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