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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수행 성공회대 석좌교수.
 김수행 성공회대 석좌교수.
ⓒ 이희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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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승이신 김수행 선생께서 작고하셨다. 한 시대가 갑작스럽게 막을 내렸다. 나는 마치 아버지를 잃은 것과 같은 비통한 심정으로 선생의 행장(行狀)을 쓴다. 지극히 개인적인 기억에 의존하여 쓰는 이 글은 앞으로 계속 수정되어야 할 것이다.

선생은 1942년 일본에서 태어나서 대구에서 성장하셨다. 빈한한 가정 형편 탓에 경북중학교를 졸업하시고, 장학금을 위해 연식정구 특기생으로 대구상고로 진학하셨다. 고등학교 2학년 때 전국대회에서 우승을 하신 것으로 장학금에 대한 보답을 하셨다고 마음대로(!) 판단하신 선생은 고등학교 3학년 때부터 대학진학을 위한 준비를 하셨다. 그리고 이듬해인 1961년 수석으로 서울대 상대에 입학하셨다.

1968년 즈음에는 서울대 경제학과 박사과정에 재학하면서 경제학과 조교로 근무하셨다. 당시의 조교는 오늘날과는 달리 교수(전임강사)로 승진하는 예비 교원의 신분이었다. 같은 시기 조교로 근무하시던 분들이 다 교수로 승진하였으나 선생은 그해 여름 통혁당 사건으로 구속된 신영복 선생과의 개인적 인연이 빌미가 되어 중앙정보부에 끌려가 고초를 겪으시고 결국 서울대에서 쫓겨나셨다.

서울대를 나오신 후 외환은행에 입사하여 근무하시던 중 사모님과 만나 결혼을 하셨고, 런던지점으로 발령을 받으셨다. 아마도 엄혹한 유신 치하였던 서울과는 다른 런던의 자유로운 공기가 다시금 선생의 꺾인 학구열을 되살려 놓았나 보다. 사모님의 말씀에 의하면 선생은 가족 부양을 위해 직장을 다니시면서도 공부를 너무 하고 싶어 하셨다고 한다.

그러나 연년생과 쌍둥이로 세 아들을 둔 가장으로서 그건 단지 이루지 못할 꿈과 같은 것이었다. 보다 못한 사모님께서 런던 현지법인에 취직을 하시면서 선생께 다시 공부하실 것을 권하셨다. 사모님의 헌신과 격려 덕에 선생은 사표를 내고 런던 대학에서 타의에 의해 중단 당했던 학자의 길을 다시 이어 나가시게 되었다.

비통한 심정으로 쓰는 선생의 '행장'

20대에 한국에서 진보적 경제학자의 길을 걸으시려다 좌절하셨고, 이역만리 런던에서 사모님께 가족 부양의 짐을 떠넘긴 채 어렵사리 다시 시작하는 마당에 왜 선생은 하필이면 마르크스 경제학을 선택하셨을까? 선생이 다시 공부를 시작하던 때의 한국은 도무지 끝날 것 같지 않은 유신독재의 한가운데였는데 말이다. 만약 선생이 공부를 마치고 한국으로 돌아와 대학에 자리를 잡으시려는 생각이 조금이라도 있으셨다면 참으로 쉽지 않은 결정이었을 것이다.

선생께서 우여곡절 끝에 서울대에 부임하신 얼마 후 술자리에서 제자들이 여쭈어본 적이 있었다. 아마도 우리는 선생의 결의와 신념에 찬 어떤 말을 기대했을 것이다. 그러나 선생의 대답은 전혀 의외의 것이었다.

"이 친구야, (마르크스가) 좋아서 했지. 공부는 좋아서 하는 거지 뭐가 되기 위해서 하는 것은 아니야."

이 대화는 몇 년 후인 1990년대 초 한창 마르크스주의의 위기에 대한 논의가 뜨거웠을 때 학회의 토론장에서도 재현되었다. 후배 또는 제자 그룹의 소장 학자들이 (소련이 붕괴한 상황에서) 우리는 왜 마르크스를 공부해야 하는가, 라는 주제로 열띤 토론을 하는 자리에서 선생은 똑같은 취지의 말씀을 하셨다.

그 토론장의 분위기는 일순 싸하게 가라앉았고, 혹자는 선생의 말을 공개적으로 비판했다. 아마도 신념의 문제를 개인적인 선호의 문제로 말씀하신다는 것이 그 비판의 취지였던 것 같다.

그러나 선생은 제자들이 '교수가 되기 위하여' 혹은 '취직을 위하여' 학위논문 주제에서 마르크스를 직접 다루는 것을 회피하더라도 제자들을 탓하지 않으셨으며, 본인의 전공을 벗어난 낯선 주제의 논문들도 최선을 다해 읽어주시고 고쳐주셨다. 그리고 선생보다 더 '신념에 투철했던' 후배나 제자들이 하나 둘씩 마르크스 경제학과 결별해 나가는 과정에서 선생은 끝까지 한결같은 마르크스 경제학자의 자리를 지켰다.

선생이 어렵사리 마르크스로 학위를 마칠 즈음에 유신체제는 막을 내렸다. 1980년 민주화의 봄은 신군부의 광주학살로 다시 봉쇄되었으나 한 번 봉인이 풀린 학문과 사상의 자유에 대한, 민주주의와 진보에 대한 열망은 서슬퍼런 군부독재의 탄압에도 불구하고 대학의 저변에서 싹이 트고, 열매를 맺고, 마침내 하나의 도도한 흐름으로 자라나고 있었다.

1982년에 선생은 이러한 흐름 속에서 정운영 선생과 함께 당시 상대적으로 진보적인 사학이었던 한신대학교에 몸담으시게 되었고, 당시 젊은 진보적 후배 소장학자들을 불러들여 한신대를 명실공히 진보적인 학풍의 대학으로 만드는 데 일조하셨다. 그러나 선생은 당시 '상대적으로 진보적인' 대학의 재단보다 훨씬 더 진보적이셨기에, 학내 지배구조의 민주화를 요구하시다가 얼마 안 되어 정운영 선생과 함께 해직되셨다.

몇 년 동안 서울대 등 여러 대학에 시간강사로 출강하시면서 어려운 시기를 겪은 끝에 1989년 진보적 경제학자의 영입을 요구하던 대학원생들의 시위에 힘입어 어렵사리 서울대 경제학과 교수가 되셨다. 타의로 서울대를 떠난 지 실로 20년 만의 일이었다.

선생은 48세에 서울대에 부임하셔서 우리나라에서 최초로 <자본론>을 완역하셨으며, 퇴임하실 때까지 학부와 대학원에서 자본론과 마르크스 경제학을 강의하셨다. 민교협, 교수노조, 학단협 등에서 활동하셨고, 맑스코뮤날레, 사회실천연구소, 사이버노동대학 등의 설립과 운영에 참여하셨다. 한국경제발전학회와 한국사회경제학회의 회장을 역임하셨고, 서울대 퇴직 후에는 성공회대 석좌교수로 재직하고 계셨다.

<자본론> 이외에도 루돌프 힐퍼딩의 <금융자본> 아담 스미스의 <국부론> 등 경제학의 고전들을 번역하셨고, <자본주의경제의 위기와 공황><자본론의 현대적 해석><세계대공황><자본론 공부> 등 많은 저서를 남기셨다.

선생이 사준 네 번의 식사

필자의 박사과정 시절 선생님과의 관악산 등반길에서. 가운데가 김수행 선생, 왼편이 필자
 필자의 박사과정 시절 선생님과의 관악산 등반길에서. 가운데가 김수행 선생, 왼편이 필자
ⓒ 박도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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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선생과의 개인적인 추억을 말해야 할 시간이다. 선생이 서울대에 부임해 오신 1989년에 나는 석사과정 2년차의 대학원생이었고, 우연찮은 계기에 학부 한 해 후배이자 대학원 동급생이었던 동료와 함께 선생의 첫 조교가 되어 1년 동안 선생의 연구실에서 같이 공부할 행운을 얻게 되었다.

연구실 입구에 책상 두 개를 나란히 놓고 두 대학원생이 앉고, 간이 칸막이 너머 테이블이 놓이고, 그 너머에 선생의 책상이 문을 바라보며 놓여 있는 구조였다. 선생은 부임하시자마자, 그동안 간간이 해오셨던 <자본론> 번역에 본격적으로 매진하셨고, 석사 2년차의 두 대학원생은 선생의 지도하에 석사논문을 작성하고 있었다.

나는 선생으로부터 공부하는 자세를 배웠으나 여지껏 선생만큼 열심히 공부해보진 못했다. 선생은 공부란 모름지기 엉덩이로 하는 것이라는 것을 여실히 보여주셨지만, 문간에 앉은 두 제자는 처음에는 한 시간이 멀다 하고 자리를 떴다, 돌아왔다를 반복하였다.

선생은 무뚝뚝해 보이셨지만 한 줌의 권위의식도 없이 우리를 대하셨다. 문간에 앉아 되지 않는 논문에 머리를 쥐어뜯으며 줄담배를 피워대도 불평하지 않으셨다. 가끔은 공부하는 제자들을 위해 당시 홀로 기거하시던 교수 아파트에 미리 가셔서 스팸을 넣은 김치찌개와 소주를 장만하시고는 우리를 불러주시기도 하셨다.

같은 날 등산 길에서 꽃을 든 선생, 꽃을 머리에 꽂은 필자
 같은 날 등산 길에서 꽃을 든 선생, 꽃을 머리에 꽂은 필자
ⓒ 박도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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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월이 흘러 박사과정에 진학하고, 결혼을 하게 되었을 때 주례를 서 주셨으며, 아이들을 낳아 데리고 명절에 인사를 드리러 가면 할아버지처럼 인자하게 아이들을 사랑해주셨다. 이제 다 자란 내 아이들은 아직도 선생을 '흰머리 할아버지'라는 호칭으로 기억한다.

선생과의 추억 중 가장 잊지 못할 대목은 나의 박사논문 심사과정이다. 나는 마르크스를 전공한 선생 밑에서 하이에크로 박사논문을 쓰고 있었다. 선생은 잘 모르는 주제임에도 불구하고 초고를 드릴 때마다 원고가 벌겋게 보일 정도로 빨간 펜으로 교정을 보아 주셨다.

무려 다섯 번에 걸친 심사과정에서 선생은 네 번에 걸쳐 심사 후 식사 비용을 내셨다. '마지막 종심 후 식사는 자네가 내게'라고 말씀하시면서. 그런데 정작 종심 날짜가 되자 선생께서 식당을 미리 예약해 두셨는데, 그동안 다녔던 식당보다 매우 저렴한 식당이어서 민망했던 기억이 있다.

오늘날, 마르크스 그리고 김수행은 어떤 의미인가

마지막으로 선생에 대해 사람들이 궁금해 할 두 가지의 질문에 대해 나름대로 대답을 해보고자 한다. 첫 번째 질문은 선생이 평생에 걸쳐 '좋아했던', 마르크스란 오늘날 어떤 의미가 있는가 하는 것이다.

마르크스의 주저인 <자본론>은 세간의 오해와는 달리 사회주의 혹은 공산주의의 바이블이 아니라 자본주의의 운영원리와 그것의 사회경제적 효과를 규명하고자 한 책이다. 일당독재와 국가에 의한 계획경제로 대표되는 소련을 비롯한 현실사회주의 사회는 마르크스의 지적 유산에 직접 기초하고 있다고 보기 힘들다.

마르크스 자신은 공산주의를 도달해야 할 이러저러한 목표로 규정하기보다는 '현실의 문제를 타개하려는 현실의 운동' 정도로 정의했다. 그러므로 소련이나 다른 현실사회주의 사회가 망했다고 해서 마르크스의 현실적 의미가 소멸한 것은 아니다. 자본주의가 초래하는 착취, 불평등, 배제 등이 현실적으로 상존하는 한 여전히 마르크스의 자본주의 비판은 의미가 있다.

자크 데리다가 말한 것처럼 자본주의가 만들어내는 억압적 현실이 존재하는 한 마르크스의 유령은 '억압된 것의 회귀'로서 지속적으로 도래한다. 마르크스의 이론이 자본주의의 사회경제적 효과에 대한 비판이라는 점에서 근대의 모든 진보적 이론은 마르크스에 빚지고 있다. 설사 그 이론이 마르크스를 그 비판의 대상으로 삼는 경우에도 그렇다. 최근 학계를 뜨겁게 달군 토마 피케티의 <21세기 자본>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두 번째 질문은 평생을 마르크스 연구에 매진하셨던 선생은 우리 사회에서 어떤 의미가 있느냐 하는 것이다. 선생은 이름이 비슷하다는 이유로 막스 베버의 저작까지 금서가 되던 참혹한 시대를 극복하고 우리나라에 학문과 사상의 자유를, 그리고 그것의 상징이자 정점에 있는 <자본론>을 읽을 자유를 쟁취하는 과정의 중심에 서 계셨다.

아마도 그때 선생께서 <자본론>을 번역하고 대학의 강단에서 강의하지 않으셨다면 여전히 <자본론>은 우리사회에서 금서로 남아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므로 마르크스 경제학을 한국 사회 분석에 접목시키려고 노력하셨던 선생 개인의 매우 전문적인 학문적 업적은 논외로 하더라도, 1980년대 이후에 등장한 모든 진보적 학자들의 문제의식과 학문적 성취는 자본론 출간과 강의, 그리고 대학원에서의 세미나들에 빚지고 있다. 설사 그 진보적 학자들이 직접 선생의 이론적 성과를 알지 못하거나, 스스로 선생이나 마르크스와 무관한 작업을 하고 있다고 주장하는 경우에도 그러하다.

최근 제자 몇 명이 모여 선생의 학문적 업적을 계승하고 발전시킬 방안을 의논하려던 차에 있었기에 선생의 갑작스러운 서거가 더 비통하다. 선생님의 명복을 빕니다.

○ 편집ㅣ홍현진 기자



태그:#김수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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