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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르세폴리스의 소서노 - 이란 시라즈
▲ [당신에게, 실크로드 36] 페르세폴리스의 소서노 - 이란 시라즈
ⓒ 정효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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술이 없는 나라에서 취하는 법

이란은 술이 금지된 나라다. 술이 없다는 사실을 이란에 도착해서 알았다. 그럼 이 더위에 너희는 대체 뭘 마시느냐고 물어보자, 친구들은 친절히도 맥주 맛 음료를 사다 주었다. "이런 거로 뭘 어쩌라고!" 라며 화를 냈지만, 곧 가짜 맥주는 이란여행에서 빠질 수 없는 음료가 되었다.

일반 맥주맛은 물론 포도맛, 석류맛 등이 있다.
▲ 알콜없는 맥주맛 음료 일반 맥주맛은 물론 포도맛, 석류맛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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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란의 중부도시 시라즈. 지금의 시라즈 와인은 이곳의 포도 품종이 남프랑스로 전해졌다는 설이 있다. 9세기 중엽, 이 도시는 이미 최고의 와인 생산지로 명성이 높았다. 물론 지금 이 도시에 와인은 없다. 무슨 술꾼도 아니고 없는 와인 타령을 계속해서는 안 되겠지만, 이곳에서는 와인이 생각날 수밖에 없다. 시인 하피즈 때문이다.

"신은 창조 때부터 술 이외에 다른 선물일랑 주지 않았네"

"너와 내가 술 몇 잔 기울인들 무슨 허물이 있을쏘냐
술은 포도나무 피지 네 피가 아닐지니"

"가진 것 없어도 즐거이 취하도록 애쓰라
이 존재의 연금술은 거지를 부자로 만드나니"

"만약 술이 우리 기억 속에서
마음의 슬픔을 가져가지 않는다면
인생의 부침으로 인한 불안은
우리의 토대를 파버릴 수도 있나니"
- 샴세딘 모함마드 하페즈 쉬러지 <신비의 혀>에서 발췌-

이란의 국민시인 하피즈, 그의 시집은 펼칠 때마다 술이라는 단어가 들어있었다. 그의 무덤은 이곳 시라즈에 있다.

이란의 가정에 반드시 있다는 두 권의 책. 쿠란과 하피즈의 시집이다. 하피즈는 14세기 페르시아의 대표적인 서정시인이다. 페르시아 수피즘(신비주의)가 깊이 스며있는 그의 시는 신과의 합일, 연인과의 사랑, 삶의 신비함 등을 노래했다.

이슬람혁명전, 이란사람들은 술을 사랑했다.
▲ 이스파한 체헬소툰 궁전의 벽화 이슬람혁명전, 이란사람들은 술을 사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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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집에 있던 시집이다. 집집마다 한 권씩 있다.
▲ 하피즈의 시집 친구집에 있던 시집이다. 집집마다 한 권씩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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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피즈의 시는 괴테, 앙드레 지드, 바이런 등 서양 예술인들에게도 영향을 주기도 했다. 괴테의 경우 하피즈에 대해 '대적할 자가 없는 시인'이라며 극찬했고, 자신의 여자 친구 마리아네에게 편지를 보낼 때도 하피즈 시집의 쪽수와 행 번호를 사용해 둘만의 암구호로 활용했다고 한다.

이란 사람들은 시를 사랑한다. 호주 멜버른에서 시라즈 와인과 하피즈 시를 함께 접했던 날이 있었다. 이란 정부에 반대해 호주에 이민 온 친구 집엔 쿠란은 없고 하피즈의 시집만 있었다. '네가 파르시(이란어)를 알면 좋을 텐데. 이 시들이 얼마나 아름다운지는 오직 파르시로만 알 수 있어.' 와인을 앞에 두고 이란 친구들은 하피즈의 시를 외웠다. 시 내용을 모르는 나는 그들의 입에서 늘 쓰던 더듬더듬한 영어 대신 그들의 모국어가 생생하게 흘러나오는 것에 감동했었다.

하피즈의 무덤은 장미가 가득한 커다란 정원에 둘러싸여 있다. 흰색기둥에 돔형 지붕이 얹혀있고 그 아래 그의 흰색 대리석 관이 놓여있다. 이란 사람들은 관에 입맞춤하고 쓰다듬기도 했다. 단체로 기도하거나 시를 낭송하기도 했다. 또 문학소녀들은 무덤가에 앉아 생각에 잠긴 눈빛으로 시집을 읽고 있기도 했다. 차분할 것이라는 예상과 다르게 기묘한 열정에 들떠있는 분위기였다.

묘소 주변에는 작은 책을 가지고 시를 읽는 사람들도 많이 보였다.
▲ 하피즈 묘소에서 시를 읽는 이란여성 묘소 주변에는 작은 책을 가지고 시를 읽는 사람들도 많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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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밤, 사람들은 이곳에서 시를 읊는다.
▲ 밤의 하피즈 묘 여름밤, 사람들은 이곳에서 시를 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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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이 불면 장미 향이 코끝에 실려 오는 여름밤이다. 환한 불빛, 그리고 밤이 늦도록 서성이는 시를 사랑하는 사람들. 만약 이곳에 한 잔의 루비색 와인이 있다면 시인이 말한 대로 "술잔에서 삶의 산들바람을 찾는" 그런 밤일 텐데 아쉽다.

그래도 이 밤에 시가 있어서 다행이다. 이들에게 시마저 없었으면 삶은 얼마나 답답했을까. 어쩌면 하피즈의 시는 이란 사람들이 술 없이도 삶에 살짝 취할 수 있게 도와주고 있는듯했다.

페르세폴리스의 소서노

이란 사람들은 워낙에 피크닉을 좋아한다.
▲ 장미가 만발한 하피즈 묘소의 정원 이란 사람들은 워낙에 피크닉을 좋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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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여름의 이란은 지옥이다. 기온이 연일 40도를 넘고 카샨이라는 지역에선 50도가 넘었다. 그나마 라마단이 끝난 시기에 도착해서 다행이었다. 라마단 기간을 이란에서 보낸 여행자들 말로는 길거리에서 물도 못 마신다고 했다. 외국인이라도 종교경찰의 눈에 띄면 제재를 받는다고 한다. 이 더위에 물도 못 마시면 어쩌라는 건지. 물을 그때그때 마셔도 버티기 힘들 때도 있었다.

잠시 바깥에 나갔다가 일사병에 걸려서 고생했다.
▲ 바깥 온도 50도 잠시 바깥에 나갔다가 일사병에 걸려서 고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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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번은 페르세폴리스에서 탈수증상이 왔다. 자꾸만 머리가 아프더니 결국 속도 메슥거리고 눈앞도 흐릿해졌다. 매점에서 음료수를 사고 손수건을 물에 적셔서 머리 위에 얹었다. 그늘을 찾아 기대앉아 있다 보니 눈이 다시 맑아지는 기분이다. 눈앞의 풍경들을 다시 바라봤다. 그러고 보니 나는 지금 '만국의 문'을 바라보며 슬러시를 마시고 있다.

한때 이곳은 기원전 6세기에 오리엔트 지역을 통일한 대제국이었다. '왕 중의 왕' 다리우스 1세와 그의 아들 크세르크세스 1세는 이곳에 바위산을 잘라내 거대한 왕궁단지를 세웠다. 이 주변은 그냥 노란 먼지 바람이 날리는 황무지다.

'왕중의 왕' 다리우스 1세가 세운 왕궁터다. 오직 왕의 거처와 행사를 치르기 위해서 세워졌다.
▲ 페르세폴리스 전경 '왕중의 왕' 다리우스 1세가 세운 왕궁터다. 오직 왕의 거처와 행사를 치르기 위해서 세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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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곳을 방문한 사람들은 111개의 계단을 올라 이 '만국의 문'을 마주한다. 이 문앞에는 사람 얼굴에 황소의 몸 그리고 날개가 있는 상상 속 동물 '라마수'가 버티고 있다. 그리고 높이 16.5m의 거대한 문을 지나면 이번엔 사자의 몸에 독수리의 머리를 가진 '호마(그리핀)'가 기다리고 있다.

속국의 사신들은 공물을 들고 이 문을 지나야 했다.
▲ 만국의 문과 라마수 속국의 사신들은 공물을 들고 이 문을 지나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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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설의 새로, 아시아의 봉황과 같이 왕권을 상징한다.
▲ 호마(그리핀) 전설의 새로, 아시아의 봉황과 같이 왕권을 상징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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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 중의 왕'을 알현하려면 약 3미터의 기단을 올라 최고의 궁전인 '아파다나'에 가야 한다. 1만 명이 들어갈 수 있는 이 공간은 72개의 기둥이 있었다 한다. 지금은 13개가 남아있다. 방문객들은 23개의 속국이 공물을 바치는 부조조각을 보며 계단을 올라야 했다. 공물 중에는 말이나 양도 있었고, 임신한 노예, 동물 얼굴이 새겨진 금팔찌도 있었다.

왕에게 공물을 바치는 속국의 사신들 23개국의 대표들이 진상품을 바치고 있다. 가운데 동물머리가 새겨진 팔찌가 보인다.
▲ 왕에게 공물을 바치는 속국의 사신들 왕에게 공물을 바치는 속국의 사신들 23개국의 대표들이 진상품을 바치고 있다. 가운데 동물머리가 새겨진 팔찌가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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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쪽에 있는 왕의 보물창고에는 각국에서 보낸 공물들이 가득했다고 한다. 그러나 기원전 333년에 마케도니아의 알렉산더 대왕에 의해 파괴되었고, 알렉산더는 당나귀 1만 마리와 낙타 5천 마리로 이 창고의 보물을 가져갔다는 이야기가 전해져온다.

'왕 중의 왕'의 도시. 한때 그 명성에 맞게 번성했지만 지금 이곳엔 폐허만 남아있다. 하지만 폐허여도 규모가 다르다. 주춧돌만 1m, 가늘고 촘촘한 건물 기둥의 높이는 25m다. 그렇게 과거 영화로웠을 제국의 모습을 그려보며 더운 것도 모르고 돌아다니다가 탈수증상이 온 것이다.

기운을 차리고 친구들을 만나기로 한 장소로 돌아갔다. 숙소에서 만난 중국인과 일본인 여행자다. 함께 시라즈 시내로 돌아가려는데 이란인 아저씨 두 명이 우리 앞을 막아선다. 그러더니 다짜고짜 우리에게 질문을 던졌다.

"한국에서 왔어?"
"아니, 중국에서 왔는데.."
"한국에서 왔어?"
"아니, 일본에서 왔는데."

내 차례다.

"한국에서 왔어?"
"응. 내가 바로 한국인이야."

그러자 반색을 하며 그들이 한 말은 "주몽! 소서노!"였다. 저 말이 하고 싶어서 동양인만 보이면 물어보고 다닌 거다. 심지어 그들은 내게 드라마 속 소서노와 닮았다며 함께 기념사진까지 찍었다. 세상에. 내가 배우 한혜진이 연기한 소서노를 닮았다는 소리를 듣다니. 올 한 해의 운은 여기에 다 썼나 보다.

이란에서 한국 드라마가 인기 있는 이유

'소서노'역의 한혜진씨와 닮았다는 말을 들었다. 실제로는 한국인이라는 인종적 특징 외엔 전혀 닮지 않았다.
▲ "한혜진씨 미안해요" '소서노'역의 한혜진씨와 닮았다는 말을 들었다. 실제로는 한국인이라는 인종적 특징 외엔 전혀 닮지 않았다.
ⓒ MBC 홈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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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 주몽이 애가 셋이나 있어?"

한번은 이스파한의 친구 집에서 위성방송으로 해주는 'KBS 월드 채널'을 같이 보고 있었다. 때마침 배우 송일국이 KBS 예능프로그램 <슈퍼맨이 돌아왔다>에 막 세쌍둥이들과 출연하기 시작한 시점이었다. 해당 방송분에서 송일국은 세쌍둥이를 임신한 아내가 얼마나 힘들었는지를 이야기하며 눈물지었고, 이란 친구들과 나는 '주몽 멋있다'며 호들갑을 떨었다.

이란에서 드라마 <주몽>이 한창 인기일 때는 시청률이 85%에 육박했고, 2009년 송일국이 이란을 방문했을 때 주몽을 만나고 싶다며 3일간 식음을 전폐한 어린아이가 있을 정도였다. 친구들이 킬킬대며 해준 이야기는 엽기적이었다. 한 청년이 아버지에게 양을 팔아 한국으로 가 소서노를 만나겠다 했지만, 아버지가 반대하자 낙담해 목을 맨 채 발견되었다는 거다. 식겁해서 물어봤다.

"그래서 그 사람은 죽었어?"

다들 고개를 갸우뚱 했다. 자살 시도라고 나왔으니 아마 죽진 않았을 거란다.

이란 사람들은 한국드라마에 특별한 애정이 있다. '양곰'( MBC 드라마 <대장금>)은 물론 '주몽'(MBC 드라마 <주몽>, 그리고 '둥기'(MBC 드라마 <동이>) 까지. <대장금>의 시청률은 90%에 육박할 정도였단다. 14살 이란 소녀 베히는 한국 드라마 이름을 줄줄 외우고 있었다. 하지만 특이한 것은 죄다 사극이었다. <별에서 온 그대>는 안 봤느냐고 물어보니까 모른단다. 사극이 아닌 드라마는 거의 몰랐다.

나중에 그 이유를 알았다. 이란 방송국에서 한국 사극을 방영해주는 이유는 다름 아닌 방송심의 때문이었다. 이란방송국은 이슬람 혁명 이후 율법에 따른 엄격한 심의규정을 가지고 있다. 그 때문에 과도한 여성의 신체 노출이 있으면 모두 편집을 해야 한다. 하지만 한국의 사극은 일단 팔, 다리를 다 가려주는 한복이기에 그들이 원하던 콘텐츠였다.

여성은 7세부터 자신의 머리카락을 가족이 아닌 남성에게 보여줄 수 없다.
▲ 페르세폴리스에서 만난 이란 소녀 여성은 7세부터 자신의 머리카락을 가족이 아닌 남성에게 보여줄 수 없다.
ⓒ 정효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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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뿐만 아니라 여성이 바깥출입을 할 때 장옷을 쓰거나, 처첩 제도가 있거나, 아버지의 권위가 강하다거나 등등의 조선 시대 가부장적 정서가 자신들의 문화와 비슷해 더욱 공감을 얻는다고 한다. 결국, 한국 드라마가 이란에 상륙할 수 있었던 근본적인 이유는 강한 가부장적 정서였다.

물론 이렇게 방송되기 시작한 한국드라마는 한국 배우들의 우수한 연기력과 매력적인 줄거리로 더욱 인기를 끌고 있다. 하지만 애초에 '한류 콘텐츠의 우수성'이라는 대답을 기대했던 나는 조금 김이 빠지고 말았다.

○ 편집ㅣ김준수 기자

덧붙이는 글 | 2014년 4월부터 10월까지의 여행 중, 실크로드- 경주, 중국, 키르기스스탄, 타지키스탄, 우즈베키스탄, 투르크메니스탄, 이란, 터키, 로마의 이야기를 담아냅니다. 동쪽과 서쪽을 잇는 실크로드의 과거 이야기와 현재 진행형 이야기입니다. 더불어 히스테리가 극에 달한 노처녀의 한풀이이기도 합니다. 실크로드에서 건져낸 이야기를 점과 점으로 이어, 글을 읽는 당신의 마음에 또 하나의 실크로드가 그려졌으면 합니다.



태그:#실크로드, #이란, #시라즈, #페르세폴리스, #하피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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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송작가, 여행작가. 저서 <당신에게 실크로드>, <남자찾아 산티아고>, 사진집 <다큐멘터리 新 실크로드 Ⅰ,Ⅱ> "달라도 괜찮아요. 서로의 마음만 이해할 수 있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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