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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의문과 경기감영, 경교, 고마청, 서지, 영은문, 모화관이 표시되어 있다.
▲ 수선전도 중 돈의문 주변도 돈의문과 경기감영, 경교, 고마청, 서지, 영은문, 모화관이 표시되어 있다.
ⓒ 이정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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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인들은 말합니다. 로마는 발 닿는 곳이 박물관이라고. 600년 도읍지 서울도 그에 못지않습니다. 후손들이 못나서 지키지 못하고 가꾸지 못해서 그렇지 서울은 곳곳이 문화유적지입니다.

유홍준 교수가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를 발표하여 돌풍을 일으켰습니다. 유 교수는 최근에 발굴된 유적을 가지고 얘기한 것이 아닙니다. 독자들이 초등학교 때 소풍 가서 보거나 중· 고등학교 때 수학여행 가서 본 유적지를 유 교수 특유의 시선으로 봤기 때문에 독자들이 충격을 받은 것입니다. 그 후, 문화유적 답사 광풍이 불었습니다. 이제 보이는 유적지도 좋지만 보이지 않은 유적지를 찾아보는 것도 의미 있는 일이라 생각됩니다.

우리의 국토가 두 동강이 나기 전, 조선시대는 서울에서 부산까지 경부 축이 아니라 한양에서 의주까지의 '의주대로'가 국토의 대동맥이었습니다. 고관대작들의 수레와 가마가 그칠 날이 없었으니 얼마나 번다했겠습니까? 오죽하면 경교장 근처에 살고 있던 이숙번이 수레 소리에 잠을 이루지 못한다고 태클을 걸어 돈의문을 서전문으로 옮겼겠습니까. 말 그대로 조선 1번지였습니다.

조선시대의 '로데오거리'는 서대문 사거리

1868년 흥선대원군은 7481칸의 웅장한 모습으로 공사를 마쳤다.
▲ 일제가 파괴하기 전 경복궁 1868년 흥선대원군은 7481칸의 웅장한 모습으로 공사를 마쳤다.
ⓒ 자료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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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가 우리나라를 침탈한 후 철저히 파괴한 곳이 경복궁과 서대문 사거리입니다. 왕권의 상징 경복궁을 파괴한 것은 민족혼을 말살하기 위한 것이었고 서대문 사거리를 파괴한 것은 조선이 떠받드는 중국과 연결된 흔적을 지우기 위해서였습니다. 도성 사대문 중 하나인 돈의문도 사라졌습니다. 전찻길을 낸다는 명분이었지만 동대문과 숭례문은 우회했습니다. 적십자병원 자리에 있던 경기감영도 없어졌습니다. 그 앞 만초천에 걸쳐있던 홍예가 아름다운 경교(京橋)와 반송정, 서지, 모화관도 흔적이 없습니다.

조선시대에는 서대문 사거리를 '고마동'이라고 불렀습니다. 오늘날로 해석하면 인천공항, 고속버스터미널, 여행사, 렌터카 업체, 택시회사를 모아놓은 종합교통타운 같은 곳입니다. 교통이 편리하니까 사람이 모이고, 사람 모이는 곳에 물화와 돈이 흘렀습니다. 때문에 서대문 4거리는 최첨단 유행을 걷는 '조선의 로데오거리'였습니다.

조선은 교통과 통신을 위하여 역참로를 촘촘히 짰습니다. 병조가 운영하는 역참로의 출발지가 바로 고마동에 있었습니다. 관서지방으로 떠나는 사람은 고마동에서 출발하여 연서역을 지나 개성방면으로 떠났고 삼남지방으로 떠나는 사람은 청파역에서, 금강산과 함흥으로 떠나는 사람은 누원역에서 출발했습니다.

도성 사대문 중 하나였지만 아직까지 복원되지 않고 있다
▲ 돈의문 도성 사대문 중 하나였지만 아직까지 복원되지 않고 있다
ⓒ 자료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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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대문 사거리는 한양에서 대륙으로 가는 길의 들머리였습니다. 사신으로 떠나는 사람, 공부하러 가는 유학생, 개성, 평양, 의주를 비롯한 관서지방에 관직을 명받아 떠나는 관료들이 이곳에서 출발했습니다. 지금이야 남북이 가로막혀 서울에서 부산 가는 경부선이 1등 길이지만 그땐 한양에서 의주 가는 길이 1등 길이었습니다.

사신으로 떠나는 관리들이 자기 말을 가지고 떠나는 사람도 있었지만, 그 당시 고위직에 있는 사람이라도 자기 말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많지 않았습니다. 이들에게 말을 빌려주는 곳이 서대문 사거리에 포진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임금이 내리는 하사품 중에서 최고로 치는 물품이 '내구마'였습니다. 안장까지 갖춘 내구마라면 오늘날로 치면 최고급 벤츠 승용차에 해당됩니다.

대중 무역 '대박'의 원조, '인삼'을 거래하던 곳

우리나라를 짓밟은 청나라 황제의 공덕을 기리는 비를 청국의 강요가 아니라 인조가 스스로 세웠다. 한자, 만주어, 몽고어로 쓰여져 있다. 정식명칭은 대청황제 공덕비다.
▲ 삼전도 비 우리나라를 짓밟은 청나라 황제의 공덕을 기리는 비를 청국의 강요가 아니라 인조가 스스로 세웠다. 한자, 만주어, 몽고어로 쓰여져 있다. 정식명칭은 대청황제 공덕비다.
ⓒ 이정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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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초, 조선과 명나라는 대등한 수평관계는 아니었다 하더라도 대국과 소국의 차이는 있었습니다. 그런데 임진왜란 후 완전히 달라졌습니다. 중국은 조선을 보호한다는 명분으로 참전하였지만 그들의 속내는 순망치한(脣亡齒寒)이었습니다. 조선의 사대부들은 이것도 모르고 무너지는 나라를 다시 세워준 은혜로 생각하고 재조지은(再造之恩)으로 받들어 모셨습니다.

병자호란을 보면 더욱 가관입니다. 남한산성에서 항거하던 인조가 청나라에 항복 의사를 전달합니다. 남한산성을 포위하고 있던 홍타이지는 시신을 염할 때처럼 두 손을 묶고 입에는 노자로 쓸 동전과 쌀, 구슬을 물고 빈 관을 끌고 나오라고 요구합니다. 완전 저승사자에게 끌려가는 영혼 없는 좀비의 모습입니다.

"한 나라의 왕인데 백성과 신하들 보기 민망하옵니다."

통사정하여 무마하긴 했지만 삼배구고두례(三拜九叩頭禮)를 거절할 수 없었습니다. 정축하성(丁丑下城)이라 핑계 댄 인조는 산성을 내려와 청 태종 앞에 세 번 절하고 절할 때마다 세 번씩 머리를 찧었습니다. 치욕스러운 항복이었습니다. 그 후에는 완전 갑을(甲乙)관계로 변질되었습니다. 승전국과 패전국의 관계였습니다. 사신 편수도 많아졌습니다. 오라면 가고, 트집 잡으면 가서 빌었습니다.

정조사, 동지사, 성절사 등 정기적으로 보내는 3절사 외에 천추사, 진하사, 주청사 등 오가는 사신이 길에서 마주치는 것이 다반사였습니다. 한마디로 사신으로 해가 뜨고 사신으로 해가 졌습니다. 이뿐이겠습니까. 중국에서 오는 사신은 얼마나 많았습니까. 한마디로 '사신 망국'이었습니다.

조선 후기 사역원에 등록된 역관이 600명이 넘었습니다. 조선 초에는 이들에게 녹봉을 주지 못해 조정에서 인삼 10근을 주며 가서 팔아서 쓰라고 했는데 점점 그 분량이 많아져 병자호란 이후에는 80근까지 상향 조정되었습니다. 인삼 10근이면 1자루가 됩니다. 팔포무역의 유래입니다.

인삼은 중국에서 고가로 팔리는 상품이었습니다. 오늘날의 삼성 휴대폰보다도 더 좋은 상품으로 대접받았습니다. 그걸 팔아서 경비로 쓰는 것이 아니라 그 돈으로 중국에서 비단과 귀중품을 사서 귀국했습니다. 200배 이상 남는 장사였습니다. 대박의 원조입니다. 그 물건의 집하장은 물론, 은밀히 거래되는 곳 또한 서대문 사거리였습니다. 이게 재테크의 수단이 되면서 밀수까지 성행하게 되었습니다.

명품 집합소, 서대문 사거리

육의전거리에서 모시 파는 가게를 알리는 깃발
▲ 저포전기 육의전거리에서 모시 파는 가게를 알리는 깃발
ⓒ 이정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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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루(보신각)를 중심으로 운종가에 있던 육의전에는 면포전, 지전, 저포전, 어물전, 명주전, 선전 이렇게 여섯 종류의 가게들이 있었습니다. 일반 서민들과 거리가 먼 사대부나 왕실 조달품목입니다. 일종의 어용상점이었습니다. 서민들은 자급자족하거나 없으면 헐벗었습니다. 시장경제가 돌아가기 시작한 중기 이후, 난전(노점상)을 필두로 배오개 시장과 칠패시장이 발달하였습니다.

조선시대에 고위층은 중국에서 건너온 물건을 사기 위해 돈을 아끼지 않았습니다. 당나라가 망한 지 언제인데 중국제는 계속 '당화'라 불리며 고위층의 로망처럼 여겨졌습니다. 오늘날의 명품처럼 말입니다. 중국에서 들어온 고급 잡화는 없어서 못 팔았습니다. 서대문 사거리에는 중국제 장신구, 화장품, 귀금속, 귀한 약재, 구하기 어려운 책, 질 좋은 붓 가게가 성시를 이루었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중국에서 들여온 물건을 일본으로 재수출하는 중개무역도 이뤄졌습니다. 오늘날로 치면 '보세창고'가 즐비했습니다. 왜관에서 샘플을 보고 흥정이 끝나면 부피가 작은 물건은 육로를 통해 문경새재를 넘었고 부피가 많은 것은 삼개나루로 보내 부산으로 해상운송 했습니다. 이러한 거리가 서대문 사거리였습니다.

반송정, 서지, 돈의문... 서대문 사거리의 다양한 모습

타지로 떠날 때, 가족, 친지들로부터 어디에서 환송받고 싶으십니까? 일제 강점기에는 경성역, 관부연락선이 떠나는 부산항, 해방 후에는 김포공항이었습니다. 지금은 인천공항이 송별의 장소가 아닐까요. 조선시대에는 반송정(지금의 금화초등학교)이 송별장소였습니다. 지방이나 외국으로 파견되는 '엘리트' 관리들만이 송별회를 열 수 있어서, 조선 선비들이 동경하는 곳이기도 했습니다.

가족과 함께 어디로 나들이를 나가고 싶으십니까? 일제 강점기에는 창경원, 전쟁 후에는 남산공원, 박정희 시대에는 어린이대공원이 인기 있는 나들이 명소였고, 지금은 과천 서울대공원, 에버랜드, 롯데월드, 워터파크 등으로 많이 놀러 갑니다. 조선시대는 어떨까요? 놀이공원이 없던 조선시대에는 돈의문 밖 서지(西池), 숭례문 밖 남지(南池), 동대문 밖 동지(東池) 등 한양성곽 주변의 연못 등이 인기가 많았습니다. 그 중 서지(西池)가 가장 아름다웠습니다. 특히 개성에서 옮겨온 연꽃이 만발한 7월이면 장안의 여인들이 몰려나와 향연을 즐겼습니다.

서대문 사거리에서 광화문 방향으로 돈의문이 있었는데 일제에 의해 강제로 헐리고 아직 복원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일본인들에 의해 경복궁이 헐리고 광화문이 헐렸습니다. 그런데 박정희 전 대통령은 광화문을 콘크리트로 복원했습니다. 조선시대 목조건물을 시멘트로 복원한다니 어처구니없습니다. 그걸 헐고 최근 다시 복원했는데 현판이 갈라지고 원목이 뒤틀리고 있습니다. 조상들 보기 부끄럽습니다. 돈의문 복원이 구체화되고 있는데, 이왕 하려면 제대로 해야 할 것입니다.

역사의 흔적이 살아있는 서대문 사거리

김종서의 집터임을 알리고 있습니다. 장군 전성시대 이곳은 김종서 타운이었습니다. 앞집에 아들 김승규가 살았고 주변에는 장군을 따르는 윤광은, 신사면 등 건장한 체격의 사병들이 살았습니다.
▲ 표지석 김종서의 집터임을 알리고 있습니다. 장군 전성시대 이곳은 김종서 타운이었습니다. 앞집에 아들 김승규가 살았고 주변에는 장군을 따르는 윤광은, 신사면 등 건장한 체격의 사병들이 살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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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협 박물관 자리에 '김종서 집터'라는 표지석이 있습니다. 김종서가 수양대군에게 습격을 당한 장소입니다. 1453년 10월 10일 밤. 수양대군이 데리고 간 임운의 철퇴를 맞은 김종서는 졸도했고 양정의 칼을 맞은 아들 김승규는 절명했습니다. 김종서가 죽은 줄 알았던 수양대군 일당이 물러간 후, 의식을 회복한 김종서가 하인 등에 업혀 돈의문을 찾았습니다. 임금에게 수양대군을 체포하라는 긴급 주청을 드리기 위해서입니다. 하지만 굳게 내린 성문을 열리지 않았습니다. 수양대군 휘하 권람이 이미 돈의문을 장악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칠흑같이 어두운 밤. 깨진 머리를 싸맨 김종서가 여장을 하고 소의문에 도착했습니다. 소의문을 백성들은 서소문이라고 불렀습니다. 역시 굳게 닫힌 문은 열리지 않았습니다. 숭례문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무시로 드나들던 도성의 문이 이렇게 높은 줄 처음 알았습니다. 파루를 울리기를 기다려 남묘 앞 김승규의 처가로 찾아간 김종서는 결국 소재가 파악되어, 의금부 도사 이홍상과 함께 찾아온 양정의 칼을 받고 최후를 맞이했습니다.

4군과 6진을 개척한 김종서는 여진족이 출몰하는 함경도의 안위가 걱정스러워 성 밖에 살았습니다. 역사의 가정은 부질없지만, 김종서가 성내에 살았으면 계유정난은 어떻게 됐을까요? 아쉬운 대목입니다. 서대문 사거리는 이렇게 보이지 않은 역사의 흔적들이 많은 곳입니다. 방학과 휴가를 맞아 가족과 함께 '조선시대 로데오거리'를 걸어보는 것도 의미 있을 것입니다.

○ 편집ㅣ박정훈 기자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기자의 블로그 - 삿가스 칼럼>에도 함께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태그:#로데오거리, #돈의문, #계유정난, #김종서, #수양대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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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事實)과 사실(史實)의 행간에서 진실(眞實)을 캐는 광원. 그동안 <이방원전> <수양대군> <신들의 정원 조선왕릉> <소현세자> <조선 건국지> <뜻밖의 조선역사> <간신의 민낯> <진령군> <하루> 대하역사소설<압록강>을 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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