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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의 모토는 '모든 시민은 기자다'입니다. 시민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사는 이야기'도 뉴스로 싣고 있습니다. 당신의 살아가는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여보, 좀 일어나 봐요."
"왜요?"
"별채에 무슨 일이 있는 것 같아요."

비몽사몽 간에 들은 말이라서 도대체 무슨 일이냐고 다시 물어보았다. 남편의 목소리가 평소와는 다르게 황망하다. 그래도 침대에서 일어날 수가 없다. 취해 있던 잠은 어느새 달아나고 머릿속에서는 별채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예측 가능한 것들을 가늠해 보지만, 도저히 감이 잡히질 않는다. 정신을 가다듬을 틈도 주지 않고 남편의 다급한 목소리가 또 들렸다.

"빨리, 빨리 별채에 좀 가 봐요."
"무슨 일인지 아는 대로 우선 얘기를 해 봐요."
"영빈이 엄마 비명 소리가 들렸어요. 겁에 질린."
"꿈을 꾸거나 가위에 눌린 모양이지요."

"살려 주세요"라는 친구의 말에 깜짝 놀라

남편은 내 말은 다 듣지도 않고 미리 달려나가 별채 앞에 서 있다. 태연한 척하며 따라 나가서 나도 별채 앞에 섰다. 우선 문이 잘 닫혀 있는지 살펴보았다. 저녁 식사 후에 이런저런 얘기를 하며 재미있는 시간을 보내다가 밤 10시쯤 자러 가는 친구에게 문단속을 잘하고 자라고 신신당부했기 때문이다.

우리 집은 앞에서 보면 동네 한복판이지만 뒤는 산이다. 아직 동네에 나쁜 일이 생긴 적이 없고 사람들은 다 선량하기 때문에 사람보다 짐승이 무섭다. 울타리 밖이라고는 하지만 낮은 펜스만 쳐진 뒤뜰 텃밭에 여름에는 고구마나 옥수수를 먹으러, 겨울에는 먹을거리를 찾아서 멧돼지가 내려온다. 펜스가 없을 때는 겨울에 앞마당에까지 멧돼지가 출현한 적이 있기에 계절과 관계 없이 밤에는 조심한다.

친구가 자는 방문은 잘 닫혀 있는데 방 안에 있는 화장실에 불이 켜져 있다. 방문을 열려는 순간 어렴풋이 무슨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잠시 주춤하고 귀를 기울였다. 화장실에서 친구의 목소리가 들렸다. 끊어질 듯 이어지는 숨넘어가는 소리였다.

"살려 주세요. 살려 주세요."

머리가 쭈뼛했다. 온몸이 긴장되면서 자동 반사적으로 뇌리를 스치는 한 가지 상황이 떠올랐다.

사람이다. 방 안에 친구 외에 다른 사람이 있다. 그러면 지금 어떤 상황이 벌어지고 있나? 친구를 겁박하거나 아니면... 생각이 여기에 미치자 이젠 내가 들어가야 하는지 말아야 하는지에 대한 판단을 내려야 했다. 신고를 하면 시간이 걸리고 시간을 끌면 그 사이에 친구가 어떤 일을 당할지 모른다. 내가 들어간다면 친구와 같이 봉변을 당할 것은 불을 보듯 뻔한 일이다. 어쩌지? 어쩌지? 어쩌긴 뭘 어째, 들어가야지. 만약에 친구가 우리 집에서 어떤 일이든 나쁜 일을 당한다면 친구의 가족을 볼 면목이 없을 뿐더러 내가 살 수가 없다는 판단을 내렸다.

이런 생각을 하며 잠시 망설이는 동안에도 친구의 자지러지듯 살려 달라고 애원하는 소리는 계속 들렸다. 문을 열고 방으로 들어갔다. 어두컴컴한 방안 구석구석을 눈으로 훑었다. 방에는 아무도 없다. 그렇다면 화장실이다. 무서워서 숨이 멎을 것 같았지만, 화장실 쪽으로 가면서 말소리를 냈다. 혹시라도 사람이 있다면 목소리를 듣고 도망가라고.

"영빈아 어딨어? 화장실에 있니? 왜 그래, 배가 아파?"

그 외에도 뭐라고 말을 한 것 같은데 경황이 없던 중에 한 말이라서 생각이 안 난다. 친구는 이미 넋이 나갔는지 내 목소리를 듣고도 계속 잦아드는 목소리로 살려 달라고만 했다. 이젠 앞뒤 잴 겨를도 없이 화장실로 갔다. 문은 열려 있었고 친구는 변기에 앉아서 두 다리를 세면기에 올려놓은 이상한 자세를 취하고 있었다. 나쁜 인간이 들어와서 친구를 묶어 놓고 금품을 강탈해 간 줄 알고, 사람이 안 다쳤으니 다행이라는 생각에 친구 등을 토닥이며 위로를 했다.

뱀인 줄 알았던 '그것'의 정체는

저 변기에 걸터 앉아서 다리는 세면대 위로 올려 놓았다
▲ 지네가 숨었던 곳 저 변기에 걸터 앉아서 다리는 세면대 위로 올려 놓았다
ⓒ 김경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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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괜찮아, 사람 안 다쳤으니 괜찮아."
"있어, 아직 있어."
"아니야. 갔어. 내가 들어오면서 방 다 살펴봤는데 아무도 없어."
"아니야. 안 나갔어. 있어."

내가 등을 토닥이며 안심을 시키는데도 친구는 계속 벌벌 떨고 있었고 온몸이 땀으로 흠뻑 젖어 있었다. 내가 계속 나갔다고 하자 친구는 '뱀뱀'하며 손가락으로 변기 뒤를 가리켰다.

'아, 나는 이제 죽었다. 세상에서 제일 싫어하고 무서워하는 뱀이라니, 그럼 지금 우리가 뱀과 대치를 하고 있단 말인가?'

여기에 생각이 미치자 사람보다 더 무서운 생각이 들면서 다리가 후들거리고 식은땀이 났다. 문밖에 있는 남편을 부르려고 해도 입이 얼어붙었는지 떨어지지를 않았다. 꼼짝없이 당할 때 당하더라도 뱀의 위치를 알아야겠기에 화장실을 찬찬히 살펴보았다.

뱀은 보이지 않았다. 그러면 정말로 변기 뒤에 있다는 말인데 나는 변기 뒤와 옆쪽에 바짝 붙어서 있다. 이럴 때는 좀 둔했으면 좋으련만 뱀이 내 다리를 타고 올라오는 느낌이 들었다. 후들후들 떨리는 다리에 맥이 풀리면서 막 주저앉으려는 찰나, 스르륵 뭔가가 재빠르게 움직이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지네다, 여보. 지네."

지네가 얼마나 큰지 입이 떡 벌어질 지경이었다. 크기만 큰 게 아니라 빠르기도 얼마나 빠른지 화장실을 종횡무진 누비고 다녔다. 어느새 남편이 작은 통나무 의자로 지네를 잡고 있었다. 그 경황에도 나는 친구를 감싸 안으며 뒤도 안 돌아보고 입으로만 지네를 외치면서 잡았는지 물어 보았다. 만약에 외간 남자가 자기의 그 요상한 자세를 봤다고 생각하면 나중에 친구가 얼마나 민망스럽겠는가 말이다.

저 의자로 잡은 지네를 남편은 닭에게 선물했다.
▲ 통나무 의자 저 의자로 잡은 지네를 남편은 닭에게 선물했다.
ⓒ 김경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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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친구는 나와 코드가 아주 잘 맞는 친구다. 이를테면 공연을 같이 보러 가면 자리에 앉지 않고 끝날 때까지 같이 방방 뛰고, 맛있는 음식이나 좋은 물건을 보면 그 표현 또한 솔직한 편이어서 자주는 안 만나지만 1년에 한 번을 봐도 어제 만난 것 같은 친구다.

우리 집에 내려 와서도 별채에서 묵으라고 하자 방을 한번 둘러보고는 "아이 좋아, 아이 좋아" 하며 엉덩이춤을 추는 친구다. 그런 방을 뒤로하고 주섬주섬 친구의 가방을 챙겨 안채로 데려왔으나 쉬 잠이 올 리 만무하다. 그때야 나는 슬그머니 웃음이 나와서 친구를 놀렸다.

"야, 지네를 보고 뱀이라는 사람이 어딨냐?"
"야, 화장실 불을 켰는데 갑자기 기다란 게 막 기어 다녀 봐라, 잠결에 봐서 그랬는지 내 눈에는 꼭 뱀이더라니까. 게다가 나는 지네를 본 적이 없거든."
"하이고, 내가 니 때문에 못산다. 나는 니가 강도한테 당하는 줄 알았다."
"그럼 신고를 하든가 도망을 가야지 방에는 왜 들어 와? 겁도 없이."
"만약에 니가 우리 집에서 나쁜 일을 당하든가, 죽으면 나는 살 수 있겠냐? 차라리 같이 죽는 게 속 편하지."

나는 정말 이해가 안 돼서 남편에게 물었다. 비명을 들었으면 얼른 친구한테 달려가지 왜 나를 깨우러 왔느냐고. 남편은 머쓱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뛰어가 봤지, 그런데 화장실에서 소리가 나더라고. 그러니 어떤 상태인지 몰라서 못 들어갔지."

평소에 너무 지나치리만치 이성적인 남편인지라 그 말에 이해가 갔다. 그런 일을 겪고도 당장 서울로 안 가고 하루 더 묵는 친구를 보고 남편은 고맙다고 했다. 친구는 또, 자기가 금방 서울로 가버리면 우리가 미안해할까 봐 하루 더 묵었단다. 우리는 서로를 바라보며 흐뭇하게 웃었다. 친구가 잘 상경했는지 안부 전화를 하면서 나는 또 장난을 쳤다. 지네와 뱀도 구분 못하느냐고.

○ 편집ㅣ박정훈 기자



태그:#친구, #지네, #뱀, #시골살이, #신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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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에는 시원한 청량제, 겨울에는 따뜻한 화로가 되는 글을 쓰고 싶습니다. 쓴 책 : 김경내 산문집<덧칠하지 말자> 김경내 동시집<난리 날 만하더라고> 김경내 단편 동화집<별이 된 까치밥> e-mail : ok_0926@daum.net 글을 써야 숨을 쉬는 글쟁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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