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텍스트(Text)에는 맥락(Context)이 있습니다. 문화 콘텐츠도 마찬가지입니다. 100% 정치적인 예술이 존재할 수 없듯이, 100% 순수한 예술도 없습니다. 문화 공연을 때로는 인문학적으로, 때로는 사회과학적으로 읽어봅니다. 마음에 안 들면 신랄하게 태클도 걸어보고, 재미있으면 '우쭈쭈' 칭찬도 합니다. 공연을 정치·사회적으로 해석하려는 시도가 항상 성공하지는 않을 겁니다. 시도가 비록 재미(Fun)는 없더라도, 최소한 '뻔'한 리뷰는 쓰지 않으려 합니다. [편집자말]
 지난 6월 14일, 뮤지컬 <빈센트 반 고흐>의 커튼콜에 나선 배우 김보강과 박유덕. <빈센트 반 고흐>는 충무아트홀 중극장 블랙의 무대를 충실하게 사용했다. 3D 영상을 활용한 연출, 고흐의 실제 작품을 보여주고 중간중간 테오가 도슨트처럼 이를 설명하는 부분은 상당히 자연스럽다.

지난 6월 14일, 뮤지컬 <빈센트 반 고흐>의 커튼콜에 나선 배우 김보강과 박유덕. <빈센트 반 고흐>는 충무아트홀 중극장 블랙의 무대를 충실하게 사용했다. 3D 영상을 활용한 연출, 고흐의 실제 작품을 보여주고 중간중간 테오가 도슨트처럼 이를 설명하는 부분은 상당히 자연스럽다. ⓒ 곽우신


"지도에 나라를 표시한 점이 있듯, 하늘 지도에는 수많은 나라가 있고, 그중에는 화가들이 살고 있는 별도 있지. 죽은 화가들이 모여 사는 별 이제 나도 그 별에서 함께 살게 되겠지. 그림을 사랑했던 사람, 그림으로 살았던 사람. 나는 떠나지만 그림만은 남아서 누군가와 얼굴을 마주하고 다정하게 말을 걸 거야. 그림으로 말을 걸고, 그림으로 울리는 화가."

2015년 7월 29일은, 위대한 화가 빈센트 반 고흐가 죽은 지 125주년이 되는 날이다. 정확히 125년 전 죽은 화가를 기리는 뮤지컬이 호연을 마치고 곧 막을 내린다. '문화네'라는 애칭이 더 잘 어울리는 HJ컬쳐의 창작뮤지컬 <빈센트 반 고흐>가 오는 8월 2일, 서울 충무아트홀 중극장 블랙에서 성공적이었던 재연을 마무리 짓는다. 10월 경기도 부천 공연이 예정되어 있다.

사람을 좋아하고, 그림을 사랑했던 빈센트는 평생 불행한 조건 속에서 살았다. 사랑했던 사람은 집안의 반대로 만나지 못하고, 아버지와의 불화로 제대로 된 지원은 기대할 수 없었다. 그림은 팔리지 않아 가난 속에서 살았고, 화가 공동체 구상은 실패로 돌아갔다. 그가 존경하고 집착했던 친구 고갱과의 다툼은 그의 자존감마저 부쉈다.

빈센트는 주변 사람과 참으로 많은 편지를 나눴다. 700통에 가까운 이 편지 중 대부분은 그의 동생 테오와 나눈 이야기였다(900통으로 설명하는 이도 있으나, 1996년 출간된 <빈센트 반 고흐의 편지>에 따르면 700통이 더 정확한 것으로 보인다. 빈센트가 남긴 작품이 900여 점이다). 이 예민하고 괴팍한 화가를 끝까지 믿고 지원했던 존재는 동생 테오 반 고흐뿐이었다. 뮤지컬 <빈센트 반 고흐>는 이 편지들을 토대로 고흐가 그림을 그리기 시작한 순간부터 자살로 생을 마감할 때까지를 감각적으로 그려낸다.

고흐 사후 125년, 그 위대한 화가를 노래하는 작품

테오 반 고흐 뮤지컬 <빈센트 반 고흐>의 지난 6월 14일 커튼콜 현장. 배우 박유덕이 연기한 테오 반 고흐는 형 빈센트를 끝까지 믿고 후원하는 존재이다. 그러나 빈센트가 자살한 후, 큰 충격을 받고 몇 달 후 뒤따라 세상을 떠난다.

▲ 테오 반 고흐 뮤지컬 <빈센트 반 고흐>의 지난 6월 14일 커튼콜 현장. 배우 박유덕이 연기한 테오 반 고흐는 형 빈센트를 끝까지 믿고 후원하는 존재이다. 그러나 빈센트가 자살한 후, 큰 충격을 받고 몇 달 후 뒤따라 세상을 떠난다. ⓒ 곽우신


빈센트 사후 테오가 형의 작품을 모아 회고전을 준비하는 과정을 보여주면서 극은 시작한다. 빈센트를 잃은 후 시름시름 앓아가는 테오는 자신의 기억도 희미해지는 가운데 형의 편지를 붙잡고 그를 기리는 전시회를 꾸리기 위해 안간힘을 쓴다(실제로 테오는 죽기 전, 자신의 아파트에 빈센트의 유작을 모아 전시회를 연다).

그리고 시점은 처음 빈센트가 그림을 그리기로 결심하는 때로 돌아가, 그가 죽을 때까지를 순차적으로 그린다. 그리고 중간중간 전시회를 준비하는 시점의 테오가 등장한다. 교차하며 흐르는 두 시간은 두 형제의 사랑과 아픔을 효과적으로 풀어낸다.

뮤지컬 <빈센트 반 고흐>는 참 잘 만든 작품이다. 빈센트 반 고흐의 삶과 고뇌를 관객들도 이해하고 공감할 수 있도록 짜임새 있게 극을 구성했다. 고흐의 여러 작품 이미지가 무대 위에 그려지고, 3D 영상도 섬세하다.

특히나 'From. 빈센트 반 고흐', '사람을 닮은 그림' '돈이라는 놈' '나를 행복하게 하는 것들' 등 넘버(노래)들이 훌륭하다. 멜로디를 음미하다 보면 자연스레 가사에 집중하게 된다. 객석에 앉아 있는 관객의 마음을 공명하게 만든다. 남자 배우 단 두 명이 이끌어가는 극이지만, 무대를 가득 채우는 중량감은 어설픈 대극장 작품보다 훨씬 낫다.

뮤지컬 속 빈센트는 실제 빈센트보다 훨씬 친근한 인물로 묘사된다. 테오에게 물감을 살 돈을 달라고 아픈 척 익살을 떠는 연기나, 고갱에게 잘 보이기 위해 첫 인사를 연습하는 모습은 인간적으로 다가온다. 자기중심적이고 타인과의 교감에 서툴렀던 기존의 고흐 이미지와 사뭇 다른 모습이다.

그러나 뮤지컬의 빈센트가 관객과 함께 호흡할 수 있는 이유가 '친근한 미화'에만 있는 건 아니다. 빈센트 반 고흐는 귀족적인 화풍의 '고급진' 그림을 그리는 화가가 아니었다. 전도사가 되려다가 화가로 전향한 그는, 농민과 노동자, 가난하고 불우한 이웃, 우리 주변의 평범한 서민을 관찰하고 이들의 삶을 화폭에 담았다.

"작고 초라한 집, 꺼질 듯한 불빛 아래서 감자를 먹고 있는 자신의 인생을 꼭 닮은 손. 거칠고 투박하지만, 자신의 땀으로 캐고 땅에서 얻은 그 결실을 먹는 손. 이게 내 그림이 말하려는 것. 잘나진 않지만, 특별하진 않지만 지금 여기 이 세상에 살아가고 살아지는 사람들. 흙 묻은 작업복을 입고 있는 농부가 더 사람다워. 매춘부나 거지라도 인생의 쓴맛을 아는 사람을 그리는 게 더 좋은 걸."

미술이라는 장르가 점차 대중화되고 있기는 했지만, 당시에 그림을 의뢰하고 그림을 사는 계층은 여전히 부유한 이들이었다. 고흐는 모델에게 줄 돈은커녕, 캔버스를 살 돈도 없어 한 캔버스에 그림을 덮어 그리기도 했다. 그의 독특한 그림체는 당시 '있는 집' 사람들에게 인기가 없었다. 그러나 그는 현실적 여건 때문에 자신의 화풍을 그들의 입맛에 바꾸거나, 부유한 이들의 화려한 모습을 담으려 하지 않았다.

빈센트를 열연한 김보강 지난 6월 14일, 서울 충무아트홀 중극장 블랙에서 배우 김보강이 뮤지컬 <빈센트 반 고흐> 커튼콜에 올라와 있다. 뮤지컬 <빈센트 반 고흐>는 '믿고 보는' 제작사로 발돋움하고 있는 'HJ컬쳐'의 웰메이드 작품이다. 배우의 땀방울이 아깝지 않은 작품이 탄생했다.

▲ 빈센트를 열연한 김보강 지난 6월 14일, 서울 충무아트홀 중극장 블랙에서 배우 김보강이 뮤지컬 <빈센트 반 고흐> 커튼콜에 올라와 있다. 뮤지컬 <빈센트 반 고흐>는 '믿고 보는' 제작사로 발돋움하고 있는 'HJ컬쳐'의 웰메이드 작품이다. 배우의 땀방울이 아깝지 않은 작품이 탄생했다. ⓒ 곽우신


그는 기본적으로 사람을 사랑하는 사람이었다. 매춘부 시엔을 사랑했던 이유도 그 때문이었다. 자신과 비슷한 처지의, 버림받고 가난한 그에게서 오히려 빈센트는 아름다움을 찾는다. 다른 사람의 아이를 가진 시엔을, 빈센트는 껴안고 함께 살려고 한다.

"나처럼 평범하고 가난한 여자. 너무도 추운 날, 길거리에 버려진, 시엔. 시엔은 말이야, 날 닮은 사람. 나처럼 상처 많고 겁이 많은 여자. 우리와 같이 평범한 사람. 만삭의 배를 쓰다듬는 손은 날 겸손하게 하는 숭고함."

평범한 사람들의 일상을 그리는 데서 행복을 찾았던 그, 몸을 파는 여자에게서 숭고함을 보는 눈을 가진 빈센트. 그의 '휴머니즘'이, 뮤지컬 <빈센트 반 고흐>가 관객을 울리는 또 하나의 코드이다. 그는 죽는 순간까지 대중 친화적인 작가였다.

125년이 지났지만, 크게 달라지지 않은 예술가의 삶

사이 좋은 형제 서울 충무아트홀 중극장 블랙에서 공연 중인 뮤지컬 <빈센트 반 고흐>의 지난 6월 14일 커튼콜 현장. 빈센트 반 고흐를 연기한 배우 김보강과 테오 반 고흐를 연기한 박유덕이 앉아 있다. 여러 배우들의 페어가 모두 합이 좋지만, 초연부터 함께한 두 배우의 호흡은 유독 좋다.

▲ 사이 좋은 형제 서울 충무아트홀 중극장 블랙에서 공연 중인 뮤지컬 <빈센트 반 고흐>의 지난 6월 14일 커튼콜 현장. 빈센트 반 고흐를 연기한 배우 김보강과 테오 반 고흐를 연기한 박유덕이 앉아 있다. 여러 배우들의 페어가 모두 합이 좋지만, 초연부터 함께한 두 배우의 호흡은 유독 좋다. ⓒ 곽우신


칼 마르크스라는 사상가 옆에, 그를 후원하는 벗 프리드리히 엥겔스가 있었던 것처럼. 테오는 빈센트의 유일한 후원자였다. 만약 테오가 없었다면, 빈센트는 진즉에 그림을 그만뒀어야 할지 모른다. 그러나 테오는 엥겔스만큼 부유하지 않았으며, 재정적으로 빈센트를 더 여유롭게 도와주지 못하는 데 죄책감을 느끼며 힘들어 했다.

빈센트는 그림을 그리는 데서 행복을 찾았던 사람이다. 그는 그림을 그릴 때에 비로소 '빈센트 반 고흐'로 존재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토록 그림을 좋아하던 사람이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우리는 흔히 "좋아하는 일만 할 수 있으면, 돈 따위는 상관 없다"고 쉽게 말한다. 그러나 노동의 목표는 두 가지이다. 자아실현과 밥벌이. 이 둘 중 하나라도 충족하지 못하면, 사람은 결코 행복할 수 없다. 좋은 목표를 가지고 일을 하니, 너가 하고 싶었던 직업을 가졌으니, 배고픔과 가난함을 인내하라는 말은 헛소리다. 어디까지나 정상참작의 여지가 있을 뿐이다. 배고픔에 물감을 먹어가면서까지 고흐는 버텼지만, 결국 돈은 그토록 좋아하던 그림을 더 그릴 수 없게 만들었다.

"빈센트, 어쩌면 말이야. 네가 높은 지위의 직업을 가졌더라면 아버지가 뿌듯해 하셨을까. 빈센트, 어쩌면 말이야. 네가 돈을 많이 버는 직업을 가졌더라면 누군가의 애인이 되고 남편이 되고 아빠가 될 수 있었을까."

아버지에게서 인정받지도 못하고, 시엔을 끝까지 지켜줄 수도 없었던 빈센트. 그는 그래도 그림을 포기하지 않았다. 그의 희망이 번번이 좌절될 때마다, 그는 이를 악물고 그토록 좋아하는 그림에 매달렸다. 하지만 그를 옥죄고 있는 상황은 좀처럼 나아지지 않았다. 그림만이 그에게 구원의 길이었지만, 그림만으로는 온전히 살 수가 없는 세상이었다.

"여전히 그림은 팔리지 않고, 기운 빠지는 생활의 연속. 요즘 말이야. 인물화를 그리지 못해. 모델에게 줄 돈이 없거든. 언제 제대로 밥을 먹었는지, 음식을 살 돈이 없거든. 항상 미안해. 그런데 너무 힘들어. 생활이 나아진다면 여유로워 질 수 있다면, 가장 하고 싶은 건 캔버스를 사고 물감을 사는 것."

고흐처럼 그림을 사랑한 사람도 없었다. 고흐가 목숨을 끊은 이유가 무엇일까. 고흐의 의지가 약해서였을까. 고흐가 더 치열하게 그림을 그리지 않아서였을까. 아니다, 고흐의 죽음은 고흐 개인에게 있지 않다. 그토록 좋아하는 그림을 마음껏 그릴 수 있는 환경이 마련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토록 열렬하게 그림을 추구했던 사람조차, 끝까지 그리지 못하고 삶을 포기해야 했던 시대. 그리고 이런 상황은 아직도 나아지지 않았다.

고흐 사망 125주년, 우리 시대의 예술가들은 고흐보다 나은 환경 속에서 예술혼을 쏟고 있다고 말할 수 있을까. '열정 페이'를 강요당하는 우리 시대 청춘, 그중에서도 예술계의 환경은 더욱 열악하다.

최근 여러 예술인들이 안타깝게도 우리 곁을 떠났다. 지난 6월 고시원에서 주검으로 발견된 고 김운하 배우, 자살을 암시한 후 차 안에서 발견된 고 판영진 배우만이 아니다. 우리는 잊을 만하면 한 번씩 생활고를 못 이기고 삶을 포기하는 예술인들을 마주한다.

그들에게 말할 수 있을까. "그토록 좋아하는 예술을 하려면 그 정도는 각오해야지" 혹은 "하고 싶었던 예술을 하면 밥은 몇 끼 굶어도 되는 것 아니냐" 등. 이런 폭력적인 말을 합리화하는 구조는 125년이 지난 지금까지 바뀌지 않았다.

고흐는 살아서 가장 가난한 화가였지만, 지금 그의 그림은 세계에서 가장 비싼 값에 거래되고 있다. 죽어서라도 인정받았으니 다행이라고 해야 할까. 만약 그가 생전에 그림을 더 그릴 수 있는 생계 기반이 마련되어 있었다면, 우리는 보다 풍요로운 그의 작품으로 고흐를 추억할 수 있지 않을까.

우리는 여전히 그들의 고통이나 삶은 외면한 채 결과물에만 박수를 보내고 있지 않은가. 고흐 사후 125주년. 참으로 아름다운 한 편의 드라마를 마주하고도 입맛이 씁쓸한 이유다.

뮤지컬 <빈센트 반 고흐>의 포스터 지난 6월 6일, 서울 충무아트홀 중극장 블랙에서 관객을 맞이한 뮤지컬 <빈센트 반 고흐>의 포스터. 원래 잘 만든 작품이었지만, 재연에서 더 탄탄해져 돌아왔다. 오는 8월 2일 서울 공연을 마지막으로 막을 내린다. 10월에 경기도 부천 공연이 예정되어 있다.

▲ 뮤지컬 <빈센트 반 고흐>의 포스터 지난 6월 6일, 서울 충무아트홀 중극장 블랙에서 관객을 맞이한 뮤지컬 <빈센트 반 고흐>의 포스터. 원래 잘 만든 작품이었지만, 재연에서 더 탄탄해져 돌아왔다. 오는 8월 2일 서울 공연을 마지막으로 막을 내린다. 10월에 경기도 부천 공연이 예정되어 있다. ⓒ HJ컬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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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5월 공채 7기로 입사하여 편집부(2014.8), 오마이스타(2015.10), 기동팀(2018.1)을 거쳐 정치부 국회팀(2018.7)에 왔습니다. 정치적으로 공연을 읽고, 문화적으로 사회를 보려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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