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암살>의 배우 전지현이 22일 오후 서울 팔판동의 한 카페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영화<암살>의 배우 전지현이 22일 오후 서울 팔판동의 한 카페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 이정민


애써 티 내진 않았지만 지난 10년은 전지현에게 자기 증명의 역사였다. <시월애>(2000) 이후 출연했던 다수의 작품이 흥행하지 못했고, <블러드>(2009), <설화와 비밀의 부채>(2011) 등으로 해외 진출의 기회를 잡았지만 큰 재미를 보지 못하고 다시 국내로 돌아왔다.

바닥을 쳤다고 평가받던 전지현은 영화 <도둑들>(2012)로 재기하기 시작했다. 그의 출세작 <엽기적인 그녀>(2001)의 그늘을 벗어났다고 할만하다. 이러한 세간의 평가에 전지현이 고백했다. "항상 그 자리에 있었다. 다만 남들이 그렇게 큰 기대를 걸었"을 뿐이라고. 무던하게 자리를 지켜온 전지현의 보폭을 우리가 너무 좁게 본 건 아니었는지. 지난 22일 서울 삼청동의 한 카페에서 전지현을 만났다.

감정이 거세된 인물...시대의 비극 속에서 인간미를 찾다

지난 22일 개봉한 영화 <암살>에서 전지현은 만주를 거점으로 한 독립군 내 저격수 안옥윤 역을 맡았다. 설정 나이로만 치면 20대 초반이다. 한창 사랑에 빠지고, 감상에 젖을 때지만 일제강점기라는 시대적 비극 속에서 사는 인물이다. 일본 제국의 두 거물을 제거하라는 대의를 쫓으면서도 순간순간 풍경의 아름다움과 사랑의 감정에 주춤하는 모습이 이 캐릭터의 매력이다.

- 독립투사다. 그걸 받아들일 때 어떤 마음이었나. 일제강점기에 대한 특별한 감정이나 생각은 없었는지.
"없었다. 솔직히 말하면 민족성이나 애국심 이런 것에 특별한 감정은 없다. 평소에도 나랏일에 큰 관심을 두진 못했다. 영화의 시나리오가 완벽하고 재밌어서 욕심이 난 거지. 그래서였는지 인간적으로 안옥윤을 100% 이해하긴 어렵더라. <암살>을 했다고 해서 크게 삶의 태도가 달라진 건 없지만 새로운 감정은 느꼈다. 영화에서 '대한독립만세'라고 읊조리면서 (다른 투사들과) 사진 찍는 장면이 있는데 뭉클했다. 그런 뭉클함은 처음이었다."

- 홍보과정에서 살짝 숨기긴 했지만 1인 2역을 하지 않나. 친일파 아버지에게 자라난 미츠코는 어릴 때 언니 안옥윤과 헤어진 인물이다. 같은 부모 밑에서 전혀 다른 사람으로 성장했다. 하나는 일본 체제에 순응하고 다른 이는 적극적으로 부정한다.
"미츠코를 통해 안옥윤을 이해하려 했고, 안옥윤을 통해 미츠코를 이해하려 했다. 1인 2역 자체가 어렵지는 않았다. 다만 이들이 한 공간에서 만나는 순간이 있는데 서로 다르게 표현해야 한다는 강박이 있었다. 차라리 신경 쓰지 말고 자연스럽게 할걸. 아쉬웠다. 시나리오 자체에선 좀 더 어두운 인물이었는데 최동훈 감독님의 색깔이 묻으며 경쾌해진 거 같다. 아무리 비극 속에 살더라도 기쁠 땐 기쁜 게 사람이잖나. 그렇게 이해했다."

 영화 <암살>의 한 장면.

영화 <암살>의 한 장면. ⓒ 쇼박스


- 시대적 명령과 사적 감상을 오가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극 중 떠돌이이자 속을 알 수 없는 남자 하와이 피스톨(하정우 분)에게 연애감정을 느끼기도 한다.
"대사를 통해 커피도 마셔보고 싶고, 연애도 하고 싶다고 하지만 하와이 피스톨과의 감정이 연애 감정이란 걸 과연 알았을까는 의문이다. 사랑이란 것도 책에서만 봤을 거고, 이야기만 들었을 법한 인물이다. 본인 감정을 본인 역시 잘 몰랐을 거다."

- 전지현의 상징과도 같았던 긴 머리를 자른 것도 그만큼 인물에 몰입하겠다는 의지표현이다. 
"보기보다 고집하는 스타일이 없다. 사람들이 좋아하는 이미지가 있을 뿐이지. 개인 성향은 하나의 스타일을 고집한다거나 목숨 거는 편이 아니다. 안옥윤이 긴 머리를 찰랑거리며 총 쏘는 모습이 상상이 안 돼서 잘랐던 거다. 사실 나, 전에도 머리 자른 적 있다! (전지현은 2009년 중국 액션 드라마 <블러드> 촬영을 위해 어깨 길이로 머리카락을 자르기도 했다- 기자 주)"

"침체기에 대한 억울함? 전혀 없다"

- 그러고 보니 <시월애> 때 함께 연기한 이정재씨와 다시 만났다. 물론 <도둑들> 때도 함께 출연했지만 이번에 더 오래 현장에서 같이 지낸 것으로 아는데 어떤 대화를 주고받았는지 궁금하다. 
"15년이 지났다. 그 사이 개인적으로 볼일은 거의 없었다. 이정재 선배와 밀레니엄 시대, 그러니까 1999년에서 2000년으로 넘어갈 때 찍은 게 <시월애>다. 그때 '이 세상에 정말 종말이 오는 건가?'라고 대화했던 기억이 난다. 이번 현장에서 깊은 대화는 따로 하진 않았는데 돌아보면 인연이 깊다. 그래서 친오빠 같은 느낌이다."

- 이정재씨가 '지현씨는 집에서 고민을 다하고 현장에선 자유롭게 하던데 그게 부러웠다'고 말했다. 자기는 현장에서 고민하면서 하는데 그게 참 힘들다고.
"맞다. 감정선은 집에서 어느 정도 정리하고 온다. <암살>에선 특히 더 고민하지 말고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안옥윤이 영화 전체 분량 중 80% 이상 나오는데 장면마다 이야기를 강조하려다 보니 보는 사람이 숨 막힐 거 같더라. 너무 많이 이야기하려 하지 말고 가볍게 갈 수 있는 부분은 그렇게 가자고 다짐했었다."

 영화<암살>의 배우 전지현이 22일 오후 서울 팔판동의 한 카페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 이정민


- <도둑들> 이후 작품 선택이 장르물에 치중하는 것 같다. <베를린>도 그랬고.
"일부러 그런 건 아닌데 캐릭터가 강한 작품을 주로 했던 거 같다. 개인적으로도 그런 작품이 잘 맞는다. 다만 촬영에 들어가면 따로 운동할 시간이 없으니 평소에 체력 관리를 잘해놔야지! 그래서 매일 헬스클럽에 나간다."

- 대중은 전지현을 스타로 바라본다. 그 유명했던 테크노 댄스 광고로 급부상하지 않았나. 1997년 잡지 모델 데뷔 이후 정작 당신은 배우로서 치열하게 자기를 증명하려 한 거 같다. 대중은 잘 몰라줬고. 그 예로 <데이지>(2005)를 찍을 땐 수개월 동안 영화 의상을 입고 다녔고, <엽기적인 그녀>(2001) 땐 PC 통신을 뒤져가며 원작을 찾아 읽었다. 이런 노력을 몰라주는 것에 대한 억울함은 없었나.
"(잠시 생각) 억울함은 없다. 그게 자연스러운 흐름이지. 나이도 어리지 않았나. 부족한 면이 많았던 건 사실이다. 그래서 땅을 칠만큼 억울하거나 분하진 않았다. 어릴 때부터 배우로 불리고 싶긴 했다. 근데 스타성 없는 배우는 또 다른 문제다. 누구든 배우는 될 수 있지만 스타는 또 아무나 될 수는 없지 않나. 스타와 배우를 구분하는 게 무의미하다. 선을 그어버리면 둘 사이에 벽을 쌓는 느낌이랄까."

- 스타의 삶을 애써 부정하진 않는다는 의미 같다. 바꿔 질문하면 급부상 이후 스스로 위기의식을 느끼진 않았는지. 스타라는 수식어에 자기가 가려진다는 느낌이랄까.
"출연한 작품이 연달아 대중의 관심을 못 받을 때 당연히 위기라는 생각은 있었지. 그런데 오히려 걱정하고 우려하는 주변 반응이 아이러니했다. 그때 난 20대였다. 진짜 인생의 시작이지 않나. 당장 은퇴할 것도 아니고. 내 생각과 가치관은 지금도 그때도 다르지 않은데 몇몇 사람들은 내게 혹독한 잣대를 들이대곤 했다."

- 대단한 정신력이 필요한 삶일 수도 있다. 시대의 아이콘이란 수식어도 있었고.
"사는 건 똑같다. 다를 게 뭐 있겠나.(웃음) 지금은 배우 전지현으로 잘살기 위해 노력한다. 나이 먹어도 연기는 계속 할 거 같다. 어떤 배우로 남고 싶냐는 질문을 수없이 받았는데 그때마다 좋은 사람이 되고 싶다고 말한다. 악역을 하든 다른 걸 하든 좋은 사람이라는 느낌으로 다가가고 싶다. 진심인데 아마 다들 느낄 수 있지 않을까."

 영화<암살>의 배우 전지현이 22일 오후 서울 팔판동의 한 카페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 이정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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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메가3같은 글을 쓰고 싶다. 될까? 결국 세상을 바꾸는 건 보통의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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