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한국전쟁 전후 약 100만 명이 넘는 대한민국 민간인들이 경찰과 군인, 우익단체에 의해 학살당했다. 이 때문에 지금까지 모든 학살 관련 책이나 자료나 연구들은 누가, 언제, 어디서, 왜 학살을 했는지에 초점을 맞춰졌다.

<그질로 가가 안 온다 아이요>는 창원지역 민간인 학살 유가족들의 인터뷰를 실은 책이다. 이 책에서는 기존 연구에서 놓쳤던 정말 중요한 부분을 다루고 있었다. 바로 남은 가족들의 아픔과 고통, 삶을 기록해 놓았다. 예상치 못했던 내용에 사무실에서 이 책을 읽다 몇 번이나 눈물을 닦아야 했다.

책을 읽다 보면 곳곳에 가슴 아픈 대목이 나온다. 가족들은 학살당했을 것이라 짐작을 하면서도 혹시나 천만 분의 일의 확률이라도 살아 돌아올까 기다리고 또 기다렸다.

한국전쟁 이후 수십 년간 실종된 가족을 기다린 사연

<그질로 가가 안 온다 아이요> 표지. '그질로 가가 안 온다 아이요'는 서울말로 하면 '그 길로 그 사람이 안 오지 않습니까?'란 뜻이다.
 <그질로 가가 안 온다 아이요> 표지. '그질로 가가 안 온다 아이요'는 서울말로 하면 '그 길로 그 사람이 안 오지 않습니까?'란 뜻이다.
ⓒ 도서출판 해딴에

관련사진보기

"할머니가 항상 밥을 이렇게 담아서 아랫목에다 이불로 덮어 놓고 그랬습니다. 언제라도 아버지가 오면 배고프기 전에 밥 먹인다고요. 십 년을 그렇게 하시더라고요."

"증조할머니가 삼십몇 년 동안 밥을 해놓고 기다렸잖아요. 증조할머니가 구십 다섯에 돌아가셨는데 돌아가실 때까지 정신이 좋으셨어요. 맨날 하시는 말이, 우리 똑똑한 자식이 절대 죽었을 리 없다, 살아있다, 올 때까지 살아있어야 한다, 노망들어 못 알아보면 안 된다. 맨정신으로 자식 알아보고 죽어야 한다, 백 살이 넘어도 우리 자식 얼굴 보고 죽는다. 그런 말씀이었어요."

"항시 아침 일찍이 밥을 딱 떠놓았어요. 할머니는 우리 아버지를, 상아, 상아, 이런 식으로 불렀는데, 나가면 밥 굶는다고 항시 떠 놓으라고 했습니다. 또 아침 해가 뜨면 우리 할머니는 우리 집이 딱 동쪽을 보고 있었거든요. 아침마다 세수하고 머리 빗고 동쪽을 보고 절을 했어요."

남편 잃은 과부는 시댁에서도 친정에서도 쫓겨나 결국 아이를 버려야 했다.

"친정 시댁에서도 쫓겨난 엄마는 옷을 한 벌 사 와서 입혀주면서 그러더라고요. 'OO야, 열 밤만 자면 내가 데리러 올 거마.' 상남역에서 붕 하면서 기차 뜨는 소리가 나면 오늘 저녁에나 오려나 내일 저녁에나 오려나 (중략) 매일 매일 울면서 살았습니다."

당시 당국은 아무것도 설명해 주지 않았다. 잡아갈 때도 물론이고 차라리 '당신 가족 누구가 언제 어디서 죽었소'라는 말도 해 주지 않았다. 그야말로 그냥 사람이 실종된 것이다. 지금도 마찬가지지만 사람이 사라지자 온 가족이 나서서 백방으로 수소문하고 다녔다. 오히려 이것이 빌미가 돼 돈을 뜯기는 일이 많았다.

"(우익 단체 인사가) 만나려면 돈이 좀 필요하니까 돈을 달라고 했답니다. 논이 여섯 마지기가 넘어댈 거예요. 그 논을 바쁘게 팔아서 돈을 줬어요. 또 와서는 돈을 또 달라고 했답니다. 남은 논이 얼마 안 되니까 (중략) 고모부가 선뜻 농사짓던 큰 황소를 팔아서 돈을 또 해줬다고 합니다. 그랬는데도 역시 아버지는 안 나오고 (중략) 면회도 못 했지요. 면회가 뭡니까. 이제 알고 보니까, 잡혀 간 사람들이 다음날 김해 생림에 나박고개로 끌려가서 다 처형을 당했는데, 사람이 안 살아 있는데, 무슨 면회입니까?"

운 좋게 소재를 확인해도 가족이 할 수 있는 건 별로 없었다.

"엄마가 새벽에 나를 업고 마산형무소 앞으로 갔답니다. 형무소에서 남들하고 똑같은 죄수복을 입고 있으니 알아볼 수가 있습니까? 그래 담 너머로 한참을 지켜보다가 우리 아버지가 나올 거 같다 싶으면, 내 궁둥이를 이렇게 콱하고 꼬집었답니다. 그러면 내가 울잖아요. 그럼 아버지가 (울음소리를 알아듣고) 안에서 보고 고개를 끄덕끄덕하고 그랬답니다. 당시 아침마다 일과가 그거였답니다."

'학살로 국토 전체가 공동묘지', 구체적 증언 담았다

민간인학살 창원유족회가 창원시 마산합포구 구산면 원전 앞 괭이바다 낚시용 좌대 선상에서 한국전쟁 전후 민간인학살 창원지역 합동위령제 및 추모식을 여는 모습. 유족들 증언에 따르면 1950년 마산 지역에서만 1681명의 민간인이 학살당했고, 대부분 괭이바다에서 수장당했다. 이 때 수장당한 시신은 멀리 대마도까지 떠내려가기도 했다./경남도민일보 DB
▲ 마산 괭이바다 민간인 학살 추모식 장면 민간인학살 창원유족회가 창원시 마산합포구 구산면 원전 앞 괭이바다 낚시용 좌대 선상에서 한국전쟁 전후 민간인학살 창원지역 합동위령제 및 추모식을 여는 모습. 유족들 증언에 따르면 1950년 마산 지역에서만 1681명의 민간인이 학살당했고, 대부분 괭이바다에서 수장당했다. 이 때 수장당한 시신은 멀리 대마도까지 떠내려가기도 했다./경남도민일보 DB
ⓒ 임종금

관련사진보기


군인이나 공무원도 때에 따라서는 학살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19살에 일등항해사 자격을 따고, 해방 이후 군에 투신해 해군 소령을 지냈던 이상규씨. 그는 여순사건 진압의 공으로 중령 승진을 앞두고 있었다. 그런데 어느 날 방첩대에 끌려간 뒤로 마산형무소에 수감 돼 있다가 한국전쟁 직후 처형당한다.

나중에 알고 보니 이상규씨는 김구 선생과 가까웠다고 한다. 해병대 창설을 최초로 기안했고, 주변 사람들에게 '해군 참모총장감'이라는 평을 들었다고 한다. 창원 군청에 다니던 이쾌호씨는 전쟁 직전 어느 날 출근한 이후 다시는 돌아오지 않았다. 이씨 말고도 창원 군청 직원 여러 명이 그렇게 사라졌다.

이 책은 그저 가족들의 사연만 나열한 책은 아니다. 두고두고 역사의 기록으로 남기기 위해 만든 책이기 때문에 구술 증언을 매우 구체적이고 체계적으로 적었다.

먼저 해방 전후 마을과 집안 상황을 구체적으로 정리하고, 경찰이나 당국에 끌려간 상황, 당시 소문이나 분위기 등도 잘 정리했다. 그런 다음 목격자들과 학살에 대해 알게 된 경위, 학살 전후 가족들의 몸부림과 당국의 대응을 정리했으며, 이후 남겨진 가족들의 삶과 진상규명을 위한 노력 등을 체계적으로 구술을 받았다.

무엇보다 이 내용을 보고서 형태로 정리한 것이 아니라 구술을 문답 형태로 풀어놨기 때문에 당시 상황이 더욱 분명하게 구체적으로 이해된다. 그저 피상적으로 '원통했겠지', '빨갱이 손가락질 당하면서 가족이 고생 좀 했겠지'라고 넘겨짚는 것과 직접 이들의 삶을 구술로 전해 듣는 것과는 천지 차이다. 읽다 보면 머릿속에 당시 사람들의 표정까지도 그려지는 듯했다.

한국전쟁 전후 숱한 학살로 국토 전체가 거대한 공동묘지나 마찬가지였다. 이 사실을 어떻게 정리해서 남겨야 할까? 어떻게 하면 후손들이 이 사실을 잘 이해하고 잊지 않도록 할 수 있을까?

여러 방법이 있겠지만 <그질로 가가 안 온다 아이요>가 하나의 좋은 예가 아닐까 싶다. 지금이라도 남아 있는 사람들의 증언을 최대한 상세하고 체계적으로 모아 책자 형태로 만드는 것 말이다. 큰 비용을 들이지 않으면서도 당사자의 증언만큼 분명하고 확실한 것이 없기 때문이다.

○ 편집ㅣ김준수 기자

덧붙이는 글 | <그질로 가가 안온다 아이요>(박영주 기록/ 도서출판 해딴에/ 2015. 7. 15/ 1만7천원)
제목은 '그 길로 그 사람이 안 오지 않습니까'라는 뜻으로, 내용은 한국전쟁 전후 민간인희생자 창원유족회의 증언자료집이다.



그질로 가가 안 온다 아이요 - 한국전쟁 전후 민간인희생자 창원유족회 증언자료집

박영주 지음, 해딴에(2015)


태그:#민간인학살, #학살, #우익, #한국전쟁, #해딴에
댓글1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