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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백화점에서 일하던 시기는 한겨울이었다. 그날도 시린 손으로 화장실에서 손을 씻고 있는데, 옆에서 차가운 공기가 훅 다가오는 것이었다. 마치 시베리아기단이 갑자기 내 옆에 날아든 것 같았다. 놀라서 쳐다보니 사람이었다. 방에 틀어박혀 펑펑 울다 막 나온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새빨개진 얼굴, 처마 끝에 매달린 고드름처럼 그 옆에 매달려있는 새빨간 귀, 과연 움직이기는 할까 싶을 정도로 꽁꽁 얼어붙은 손. 그 모습에 너무 놀란 나머지 예의 없게도 눈앞에서 대놓고 멍하니 쳐다보고 말았다.   

그는 이제 겨우 20대 초반 정도로 보이는 여성이었다. 복장을 보니 건물 입구에서 주차안내 일을 하는 분인 것 같았다. 늦겨울, 마지막 맹추위가 몰아치던 날이었다. 나도 창고나 집하장을 오가면서 잠깐씩 밖에 나가봐서 알지만 정말 잔인하다 싶을 만큼 추운 날씨였다. 매서운 칼바람도 심하게 불었던 걸로 기억한다. 이대로 밖에 다시 나갔다간 사람 잡을 것만 같았다.

매장으로 돌아오면서 내내 그가 마음에 걸렸다. 주차안내 직원들은 그 추운 겨울날 꼭 그렇게 칼바람을 맞으며 서 있어야 했을까? 지금도 마트나 백화점에서 주차안내를 하는 직원들을 보면 마음이 불편하다.

백화점 안에서 일하는 직원들은 아니지만 한겨울 추위 속에서도 밖에서 몇 시간씩 대기하고 있어야 하는 건 백화점 상품을 배송하는 물류나 택배회사의 기사들도 마찬가지다. 실내주차장도 아닌 곳에 차를 세워두고서 매일 두 시간 정도씩 그 앞에서 택배 접수를 받고, 차에 상품을 싣고 내리는 일을 한다. 찾는 이가 없어도 정해진 시간 동안은 바람조차 피할 곳 없는 데서 대기하고 있어야 한다. 잠깐 상품을 주고받으러 나가는 나조차도 추위에 몸이 움츠러드는데, 두 시간을 내내 거기에 있어야 하는 그분들은 대체 얼마나 고통스러울까?

이 일을 시작하기 전에는 그래도 백화점이니까 직원 시설도 어느 정도 잘 갖춰져 있을 줄 알았다. 그런데 막상 와서 보니, 난방도 휴게시설도 고객들을 위한 것이지 어느 것 하나 노동자를 위한 배려는 없었다. 휴게실에는 자그마한 라디에이터 2개가 있을 뿐이다. 라디에이터는 조금 따뜻한 정도라서 맨손으로 움켜쥐어도 뜨거운 캔커피 하나를 쥐고 있는 것만 못했다.

거대한 백화점, 쉴 공간은 턱없이 부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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앉을 수 있는 자리도 턱없이 부족하다. 휴게실에 열댓 명 정도가 앉아 있으면 어쩔 수 없이 발길을 돌려야 했다. 휴게실이든 직원용 소파든 이 거대한 백화점 안에 근무하는 직원 수에 비하면 쉴 공간은 턱없이 부족하다. 그러나 하루 종일 서서 일하는 백화점 직원들에게 앉아서 다리를 올려둘 수 있는 공간은 무척이나 절실하다.

나도 처음 일을 시작했을 때에는 발바닥이 너무 아파서 한동안 절뚝거리며 걸을 때가 있었다. 약국에 가보니 발바닥 근육에 염증이 생겨서 그렇단다. 인터넷을 보고서야 갑자기 장시간 서 있으면 이렇게 '족저근막염'이 온다는 걸 처음 알았다. 그렇게 나는 시작하자마자 산업재해를 겪었다.

그나마 여직원들은 휴게실이라도 있는 편이었다. 직원용 엘리베이터 앞에 놓인 소파와 의자들 몇 개가 남직원들을 위한 휴게공간의 전부였다.

항상 다른 사람들을 대면하면서 타인의 시선에 노출되어 있어야 하는 백화점 직원들에게 휴게공간이란 단순히 앉아 쉴 수 있는 곳이기만 해선 안 된다. 감정노동을 멈추고 내 마음에 휴식을 줄 수 있어야 진정한 휴게공간이고 휴게시간인 것이다. 관리자들이 지나다니는 엘리베이터 앞에 앉아서 도대체 무슨 휴식이 가능하단 말인가?   

매장 직원들이 하루에도 여러 번을 드나드는 창고도 바깥보다 나을 뿐이지 언제나 한기가 가득했다. 냉난방시설이 있을 리가 없는 그곳에서 차가워진 옷들 사이를 뒤적이다 보면 어느 새 내 손도 꽁꽁 얼곤 했다. 매니저는 창고에 갈 때면 서랍에서 털장갑을 챙겨 갔다.

추운 것보다 더 큰 문제는 안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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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추운 것만 문제는 아니었다. 그보다 더 중요한 안전에 대한 문제도 있었다.

창고 안에는 옷이 가득 담긴 상자들이 대여섯 개씩 차곡차곡 쌓여 있다. 원하는 옷을 꺼내려면 그때마다 내 키보다 한참 높이 쌓인 그 상자들을 내렸다 쌓았다 해야 한다. 옷과 옷걸이가 함께 들어있는 상자들은 무게가 꽤 된다. 한 번에 들어올리기 어려워서 무릎 위에 한번 올렸다가 쌓아올리기를 몇 번 하다보면 다리 곳곳에 멍이 들어있고는 했다. 흔들리는 사다리 위에서 무거운 상자를 올리고 내리다가 균형을 잃고 떨어질 뻔한 적도 있었다.

한 번은 쌓아올린 상자들 중 아래쪽에 있던 상자 하나가 무게를 못 이기고 주저앉았다. 그러자 옷이 가득 들어있는 커다란 상자더미들이 기우뚱 하더니 내 머리 위로 무너져 내린 적이 있었다. 가까스로 떨어지는 상자 두 개를 옆으로 쳐내고 줄줄이 쓰러지려는 나머지 상자들을 두 팔로 버텨내면서 한겨울에 나 혼자 땀 뻘뻘 흘렸던 기억이 난다.

아무도 오지 않는 창고 안에서 힘에 겨워 부들부들 떨리는 팔로 10분가량을 버티다가 결국 상자들을 하나씩 옆으로 떨어뜨리면서 간신히 해방될 수 있었다. 만약 그 상자들을 그대로 머리로 들이받았다면 큰 사고로 이어질 수도 있었던 아찔한 상황이었다. 창고 안에는 외부의 도움을 청할 수 있는 방법이 전혀 없다.

직원들이 가장 많이 이용하는 장소 중 하나인 창고는 대체로 상품을 보관하는 상자들 때문에 통로가 워낙 좁고 복잡해서 위험 요소가 많다. 불이 켜진 창고 안에서 길을 잃을 뻔한 적도 있는데, 만약 건물에 화재가 발생한 채 정전이라도 된다면 과연 무사히 빠져나올 수 있을까?

만약, 노동자가 아니라 고객들이 이용하는 공간이었다면 이렇게 춥고 위험하게 내버려두었을까? 쉴 새 없이 직원들이 짐을 싣고 내리는 엘리베이터 앞에 앉아서 쉬시라고 말할 수 있을까? 노동자의 공간과 고객들의 공간이 달라야 할 이유는 무엇인가?

생각에 생각이 꼬리를 물면서 또 이런 의문도 든다. 백화점에 가장 오랜 시간을 보내는 사람은 누구인가? 그곳에서 일하는 노동자일 것이다. 그렇다면 공간을 가장 많이 이용하는 노동자들이 편안하고 안전한 공간을 만드는 게 우선이 되어야 하는 것 아닌가?

○ 편집ㅣ장지혜 기자



태그:#백화점, #감정노동, #휴게실, #복지, #노동환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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