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자료사진.
 자료사진.
ⓒ sxc

관련사진보기


한 여성이 '아는 사람'에게 강간을 당했다고 4년 만에 회고한다면, 어떤 반응을 보일 텐가. 일부 사람들에게 '4년'이란 시간적 공백과 '지인'이란 정서적 거리는 이 사례에서 편견을 유발하기 충분하다.

특히 '여혐'이란 단어가 심심찮게 신문지면에도 오르내리는 요즘이라면 더더욱 말이다. 일부에서는 '꽃뱀'을 의심하거나, '자초한 일'이라 매도의 눈빛을 보내지 않을까. 예컨대, 이렇게.

"그건 강간이 아니에요. 강간은 모르는 남자가 머리에 총을 들이대는 거라고요."
"키스하는 건 좋았다면서요. 조금 더 진도를 나가는 게 뭐가 문제죠?"
"그냥 죄책감이 드니까 나중에서야 강간당했다고 과장하는 것뿐이에요."

그러나 로빈 윌쇼의 <그것은 썸도 데이트도 섹스도 아니다>는 이런 발상이 너무나 위험한 생각임을 알려준다. 책은 가장 빈번하게 발생하지만 가장 은밀하게 숨겨지는 '아는 사람'에 의한 성폭력을 추적한다. 저자는 여러 피해자를 만나고 그 고통과 치유, 예방책에 관해 기록했다.

책에 따르면, 낯선 사람에 의해 피해를 당하였을 때와 달리 가해자가 아는 사람일 경우는 (단순히 가볍게 정도라 하더라도) 자신이 당한 게 성폭력이었다는 것을 인식하는 데 오랜 시간이 걸릴 수 있다고 지적한다. 거기다 피해자에 대한 위와 같은 비난은, 사회 구조적으로 '침묵'을 강요하고 자신이 당한 게 '강간'이란 인식조차 할 수 없게 만들어버린다.

책에 실린 레이첼의 사례를 보자. 대학 1학년에 막 입학한 그는 기숙사에 입주했다. 가끔 마주친 3학년 미식축구 선수에게 매력을 느꼈다. 하지만 그 남자와 깊은 관계는 유지하지 않고 서로 막 알아가는 단계를 유지했다. 요즘 말로 하면 '썸남'이다.

말하기는 어렵고 피해는 크다

사건은 기숙사에서 파티가 벌어진 날 터졌다. 남자는 적극적으로 레이첼에게 관심을 보였다. 적당히 술을 마신 후, '자신의 방'에 가서 놀자고 했다. '썸남'의 관심에 기분이 달뜬 레이첼은 그를 따랐다. 다만 서로의 생각이 달랐다.

레이첼은 '단지 딴 데서 다른 사람들과 놀자'는 의미로 받아들였다. 그러나 방 안에는 아무도 없었다. 남자는 레이첼에게 키스를 하고 옷을 벗기기 시작했다. 남자는 190㎝가 넘었고 레이첼은 160㎝가 되지 않았다. 반항은 무의미했다.

"그냥 다 잊어버리고 싶었고, 그런 일이 있었다는 게 수치스러웠죠. 더럽혀지고 망가진 느낌이었어요. 제 탓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 남자애가 저한테 뭔가 했다기보다는, 제가 그렇게 하도록 놔뒀다는 생각이 들어서 죄책감이 심했어요." - <그것은 썸도 데이트도 섹스도 아니다>에서

당한 직후에는 누구에게도 이 얘기를 털어놓을 수 없었다. '잘나가는 미식축구 선수'가 뭐가 아쉬워서 그랬겠냐는 사람들의 반응이 무서웠다. 그게 강간인지조차 헷갈렸다. 그리고 무엇보다, 자신에 대한 죄책감이 컸다.

4년이 지나서야 레이첼은 스스로 만든 감옥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사람들의 공감과 지지가 그를 치유했다. 이제 레이첼은 당당히 말한다. "저도 바보 같은 선택들을 했지만, 그 남자가 저를 공격한 건 제 잘못이 아니에요"라고.

피해 여성이 갖는 끔찍한 트라우마

아는 사람에 의한 강간, Acquaintance Rape에 관해 알아야 할 모든 것 <그것은 썸도 데이트도 섹스도 아니다>
▲ 책표지 아는 사람에 의한 강간, Acquaintance Rape에 관해 알아야 할 모든 것 <그것은 썸도 데이트도 섹스도 아니다>
ⓒ 일다

관련사진보기

레이첼처럼 홀로 끙끙 앓는 경향은 '아는 사람'에 의한 성폭력일수록 특히 짙다. 보통 강간은 '낯선 사람'에게만 당한다는 선입견 때문이다.

또한 폭행이나 흉기가 동원되는 경우가 적기 때문에 피해 여성의 트라우마가 상대적으로 덜 심각하리라 생각할 수 있지만, 결코 그렇지 않다. 책에 따르면 '낯선 가해자'에게 당한 경우, 주변에서 보호받고 지지받을 수 있다는 믿음을 미약하게나마 가질 수 있다. 가까운 사람들과 공감대를 형성할 수도 있고 조금은 안전한 공간을 찾을 수도 있다.

하지만 친분이 있는 사람에게 당한 경우라면 얘기가 다르다. 이미 속속들이 알고 있는 가해자에게서 숨을 수 있는 공간이 적다. 거기에다가 이런 유형의 성폭력에 대한 사회적 통념, 즉 오히려 피해자를 비난하는 문화에 직면한다. 피해 여성을 더욱 고립시키고 힘들 게 한다.

'아는 사람에 의한 강간'이 남기는 심리적 후유증은 또 있다. 피해 여성이 '남성'과의 '성관계'에 두려움을 가지게 된다는 사실이다. 사건 전에는 '기쁨과 즐거움'이었을 행위가, 피해 이후에는 '두려움, 혐오, 분노의 대상'으로 변질된다.

아는 사람에게 강간 피해를 당한 '안나'는 책에서 "어떤 남자라도 저를 해치고 심지어 죽일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기 때문에, 세상 모든 곳이 위험하게 느껴졌다"고 토로했다. 안나 뿐만 아니라 알고 지내던 사람에게서 피해를 입은 많은 여성은 앞으로 또다시 남자와 사랑하는 관계를 맺을 수 있을지 고민했다. 안타깝게도, 나이가 어릴수록 이 불신을 극복하지 못하는 경우가 잦다고 한다.

어떤 경우에도 정당한 강간은 없다

책은 작가 티모시 베네크의 이 말을 인용하며 남성들의 인식 전환을 주장했다. "강간을 끝낼 수 있는 것은 강간하는 남성들, 집단적인 파워를 지닌 남성들이다." 더군다나 '보통의 남자들'을 성적, 사회적, 도덕적 불량배로 환원시키는 행동에 우리 사회가 상처를 입지 않도록 남성들이 나서야 한다고도 지적했다.

이 세상에 강간당할 만한 여성은 없다. 취했건 멀쩡하건 말이다. 여성의 "안 돼"는 말 그대로 "안 돼"를 의미한다. 언제든 상대방이 더 진행하길 원치 않는다면, 그 의견을 무시해서는 안 된다.

여성들과의 적극적인 소통도 필요하다. '썸녀'만이 아니라 좀 더 다양한 여성들을 만나 소통하자. 여성의 전반적인 삶과 그들이 어떤 상황에서 어떻게 느끼는지에 대해 더 깊게 이해할 수 있으리라. 어떤 경우에도 정당한 강간은 없다.

책에서 소개한 연구들에 따르면, 아는 사람에 의한 강간에서 '울거나 말로 설득하는 방법'은 그다지 효과가 없다고 한다. 대신 '냉정하고 단호하게 대처하라'고 주문한다. 도와달라고 소리치고, 필요하다면 강한 공격으로 맞서라. 이야기를 하면서 시간을 버는 것도 좋다. 그럼에도 상황이 악화됐다면, 가장 중요한 건 '살아남는 것'이라 강조한다.

남자가 당신을 강간하도록 '내버려두었다'고 스스로를 질책하지 마라. 피해자로서 당신이 유일하게 책임져야 할 것은 당신 자신뿐이다. 당신이 강간당했음을 증명하기 위해 부상을 입거나 죽을 필요는 없다. 그 대신, 부디 살아 있으라. - <그것은 썸도 데이트도 섹스도 아니다>에서

그리고 사람들이 뭐라고 하던 절대로 '그런 사건을 자신이 불러왔고 빌미를 제공했다'고 생각하지 마라. 명심하라. 당신에게는 죄가 없음을, 당신의 잘못이 아님을.

○ 편집ㅣ박정훈 기자

덧붙이는 글 | <그것은 썸도 데이트도 섹스도 아니다> (로빈 월쇼 지음 / 한국성폭력상담소 부설연구소 울림 옮김 / 일다 펴냄 / 2015.07 / 1만4500원)



그것은 썸도 데이트도 섹스도 아니다 - 아는 사람에 의한 강간Acquaintance Rape에 관해 알아야 할 모든 것

로빈 월쇼 지음, 한국성폭력상담소 부설연구소 울림 옮김, 일다(2015)


태그:#그것은 썸도 데이트도 섹스도 아니다, #일다
댓글3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