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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기 말은 3월만큼 바쁘다. 요새는 아주 키보드를 두드리는 것에 도가 텄다. 학기 말 성적을 한 사람 한 사람 처리하고, 밀린 진도를 채우고, 또 나에게 주어진 업무들을 처리한다. 애들은 나에게로 와서 재잘재잘 자기들의 이야기를 풀어놓는데, 내 손은 키보드 위에 눈은 컴퓨터 화면을 향한다. 아이들의 이야기에 "오 그래?", "응~ 알겠어"라고 영혼 없는 대답만 툭툭 던질 뿐, 한 귀로 들어오고 다른 한 귀로 나가버린다. 가끔은 아이들에게 학습지를 던져주고 급한 업무들을 먼저 처리하기도 한다. 이 순간은 정말 내가 선생님이 맞나 싶다.

 어제'도' 화를 냈던 선생님
 어제'도' 화를 냈던 선생님
ⓒ 고상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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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바쁜 일상은 나에게 큰 스트레스가 된다. 아이들에게 관심을 두지 못하고 있다는 자책감, 그리고 기한 내에 업무를 처리해야 한다는 압박까지 요즘의 일상들은 나에게 온갖 스트레스만 던진다. 스트레스라는 이놈은 참 좋지 않은 놈이다. 이놈이 나만 힘들게 하면 그나마 다행일 텐데, 우리 반도 힘들게 하기 때문이다. 화를 내지 않아도 될 조그만 일에도 오히려 크게 화를 내거나 아이들을 향해 온종일 싸늘한 표정만 보여주기도 한다.

아이들은 아무런 잘못도 없는 데 말이다. 담임선생님의 기분이 그저 그래서 자기들까지 주눅이 들어버린다. 요새 아이들이 풀이 죽어 있는 모습이 더위에 지친 것이 아니라 내가 주는 싸늘한 분위기 때문인 것 같기도 하다.

오늘은 출근 전에 네 가지를 약속했다. 물론, 지킬지 말지는 두고 봐야겠지만 말이다.

 네 가지 약속
 네 가지 약속
ⓒ 고상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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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아이들 이야기에 최소한 한 번 질문해주기

요 며칠 아이들의 아침 한 줄 글쓰기에도 영혼 없는 끄덕임을 한 번 하고는 다시 컴퓨터를 봤던 나를 반성하며 글쓰기를 읽고 질문을 던지기로 했다. 첫 번째 친구. 오늘 영화를 보기로 했다는 아이에게 그건 어떤 영화냐고 물었다. 장황한 설명이 이어진다. 물어보지 않았으면 어쨌을까 싶다. 재미있으면 나에게도 추천해주겠다는 말을 남기고 자리로 돌아갔다.

 영화를 본다는 아이의 아침 한 줄 글쓰기
 영화를 본다는 아이의 아침 한 줄 글쓰기
ⓒ 고상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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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번째 친구. 더워서 에어컨을 켜고 싶다는 한 줄 글쓰기를 가져왔다. 더위를 많이 타냐는 나의 물음에 가족이 모두 등장한다. 아빠는 찌개를 먹을 때도 손수건을 들고 계신다고 한다. 자기가 체육을 싫어하는 것도 땀이 많아서 그렇다고 했다. 축구를 싫어하는 줄은 알았는데 이런 사연이 있는 줄은 꿈에도 몰랐다.

세 번째 친구. 오늘 체육이 들어서 좋다는 한 줄 글쓰기다. 가장 좋아하는 과목이 체육이냐고 물었더니 웬걸 수학이란다. 그럼 수학이 있는 날이 체육 있는 날보다 좋으냐고 물으니까 또 그건 아니란다. 수학은 원래 많이 하니까 가끔 하는 체육이 더 기다려진다고 한다. 뭐 이유야 어찌 되었든 수학을 체육보다 좋아하는 친구는 처음 본다.

2. 아이들이랑 쉬는 시간에 같이 놀기

요새 아이들 사이에서 공기가 유행이란다. 교실 뒤편에서 뭔가 꽁냥꽁냥하는 것 같더니 공기였다. 이것도 새까맣게 모르고 있을 정도로 아이들과 얼마나 멀어졌는지 금방 느껴진다. 선생님도 한 판 껴달라고 하니 흔쾌히 끼워주었다. 아이들과 함께하는 쉬는 시간은 진짜 오랜만이다.

"선생님, 손 흔들면 안 돼요. 그거 설거지예요."
"어! 선생님 자리 움직이면 안 돼요! 탈락!"
"으, 선생님 완전 못해! 크크"

요즘 공기는 뭐 그렇게 규칙들이 많은지 다 반칙이란다. 졌다. 아이들이 까르르 까르르 뒤로 넘어간다. 선생님이 자기들한테 뭔가를 졌다는 것 자체가 웃긴 모양이다. 이렇게 빙 둘러보니 어느새 우리 반 아이들이 다 모여들어 내 공기 실력을 구경 중이었다. 한바탕 웃고 나니 어느새 쉬는 시간이 다 갔다.

3. 큰일이 아니면 절대 화내지 않기

급식소에 가는 점심시간이었다. 아이들을 줄 세워두고 배식받을 차례를 기다리는데 아이들이 없다. 저 멀리 보니 남자아이들이 단체로 물을 마시러 가 있었다. 순간 나에게 허락도 받지 않고 대열을 이탈한 저 방울에게 화가 났다. 하지만 그 전에! 이게 진짜 화를 낼 큰일 인지를 생각해보았다. 바로 이전 시간이 체육이어서 목이 마를 아이들이 얼마나 물이 마시고 싶었으면 그랬을까를 생각하니 화를 낼 일은 절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얘들아~ 선생님한테 얘기를 먼저 하고 갔다와야지이."
"아, 넵! 죄송합니돠! 담부터 안 그러겠습니다!"
"크크크, 얘 완전 군인 같아요!"

귀여운 녀석들. 나긋나긋 부드럽게 이야기하니까 나도 아이들도 다 웃으면서 잘 마무리됐다. 그 와중에 물을 안 먹었던 남자아이 하나가 쫄래쫄래 와서 나에게 '물 마셔도 돼요?'라고 묻고 음수대로 가는 모습에 웃음이 절로 핀다.

4. 오늘은 꼭 '반가' 같이 부르기

그동안 아이들 하교를 얼른 시키고 일을 하고 싶은 마음에 하교 직전에 부르던 반가도 많이 생략했었다. '오늘은 반드시! 해야지'하고 다짐했는데. 5교시에 운동장에서 활동을 마치고 교실로 돌아오는 통에 새까맣게 반가를 잊어버리고 아이들을 보내고 말았다. 요 며칠 안 불렀다고 참 습관이 무섭다. 내일이라도 꼭 같이 불러야겠다.

네 가지 약속은 절대 어려운 약속도 아니었고 거창한 약속도 아니다. 질문을 한 번 해주면 그만이었고 쉬는 시간에 나도 같이 놀면 그만이다. 화내기 전에 한 번 생각하는 것, 반가를 같이 부르는 것도(물론 실패했지만) 절대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그 몇 가지는 우리 반의 모습과 분위기를 완전히 바꿀 수 있었다.

한바탕 같이 웃음으로 시간을 보낼 수도 있었고, 아이들의 새로운 모습을 마주하는 기회가 되기도 했다. 앞으로도 나는 이 네 가지 약속을 방학 전까지 지켜나가 볼 생각이다. 나에게 주어진 업무를 처리하는 일도 선생님인 나에게 중요한 일이지만, 아이들에게 좋은 선생님이 되어 주는 것은 더 중요한 일이니까.

 선생님의 미소가 보고 싶다는 아이
 선생님의 미소가 보고 싶다는 아이
ⓒ 고상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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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 2015년 3월 2일부터 시작된 신규교사의 생존기를 그리는 이야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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