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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제주올레는 김호진씨가 기증한 부모님의 옷으로 기념품 '간세인형'을 만들었다
 (사)제주올레는 김호진씨가 기증한 부모님의 옷으로 기념품 '간세인형'을 만들었다
ⓒ 김호진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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뇌경색을 앓고 있던 어머니, 그 옆을 아버지는 7년간 지켰다. 거동이 불편한 아내의 몸을 닦아주고 아내의 대변을 받아냈다. 그런데, 고향에 내려온 아들이 쓰러졌다. 뇌졸중이었다. 얼마 후, 건강했던 아버지도 갑자기 뇌출혈로 쓰러졌다. 아버지는 입원 보름 만에 모자의 곁을 영원히 떠났다.

그리고 아들과 어머니는 같은 병원에 입원했다. 아들은 13층 1호실, 어머니는 12층 3호실. 어머니가 있던 병실에서는 엘리베이터가 잘 보였다. 아들은 점심을 먹고 재활 운동을 하러 내려 갈 때마다 일부러 12층 버튼을 누르곤 했다.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다 닫히는 그 잠깐, 아들은 병실에 있는 어머니에게 손을 흔들었다. 어머니도 손을 흔들며 웃었다. 몇 미터를 사이에 두고 나누는 그 무언의 교감, '힘내라, 우리 아들', '어머니, 힘내세요'. 그렇게 매일 어머니와 아들은 애틋한 정을 나눴다.

그리고 2011년 늦가을, 아들은 더 이상 엘리베이터 12층 버튼을 누르지 못했다. 어머니마저 곁을 떠났다. 노총각 아들, 김호진(55)씨는 뭐 하나 허투루 버릴 수 없었다. 특히 어머니가 곱게 간직했던 옷, 아버지의 체취가 진하게 남아있는 옷의 경우는 더욱 그랬다.

155km 떨어진 병원을 아직도 고집하는 아들

병원에 입원한 어머니와 단란한 한 때를 보내고 있는 김호진씨 가족. 사진 왼쪽이 김호진씨
 병원에 입원한 어머니와 단란한 한 때를 보내고 있는 김호진씨 가족. 사진 왼쪽이 김호진씨
ⓒ 김호진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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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호진씨가 소중히 간직하고 있던 부모님 옷들. (사)제주올레에 기증하기 전 촬영해뒀다고 한다
 김호진씨가 소중히 간직하고 있던 부모님 옷들. (사)제주올레에 기증하기 전 촬영해뒀다고 한다
ⓒ 김호진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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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모님의 유품을 꼼지락거리기를 몇 년이다. 특히 옷은 처리 못하고 잘 입어 줄 기증처를 찾고 있었다. 주위에선 태우는 것이 좋다거나 의류 수거함에 넣으라고 권한다. 두 분이 60년을 같이 한 역사도 스며있는 오래된 양복과 한복, 두루마기 등을 참으로 허무하게 처리하란다. 의식도 없이?" (김호진씨 카카오스토리 중)

김씨는 부모님 옷을 기증할 곳을 찾았다. (사)제주올레에도 그 뜻을 밝혔다. 올레와 인연을 맺고 몸과 마음의 건강을 추스린 김씨였기에 그 의미는 더 컸다. 그리고 최근 (사)제주올레로부터 부모님 옷을 기증 받아 기념품 '간세 인형'으로 만들겠다는 반가운 연락을 받았다. 김씨는 제주를 방문해 특별한 '기념품' 54개를 우선 구매했다. '황금'에 찌든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유산'의 의미를 곱씹게 만드는 이야기였다.

지난 14일 서울 구로동 한 요양병원 앞에서 김씨를 만났다. 그는 일주일에 3일, 재활치료를 위해 이 곳을 찾는다고 했다. 그가 사는 강원도 인제군에서 병원까지 대략 155km, 치료받는 동안 임시로 머무른다는 영종도 숙소에서도 50km 이상 떨어진 곳이다. 불편한 몸으로 대중교통을 이용해 오가기에는 먼 거리임에 분명했다. 게다가 어머니와 마지막으로 이별한 아픔이 배어 있는 곳이기도 했다.

왜 굳이 이 병원을 그는 고집하고 있을까. 김씨는 "치료사 분들에 대한 신뢰도 높고, 정이 든 동료 환자들도 있다. 또 형제들과의 접근이 용이하다"며 "그리고 무엇보다 어머니 하고의 좋은 추억이 깃든 곳이기도 하다"고 답했다. 3남 3녀 중 넷째. 형제 중 유일하게 아직 결혼하지 않은 김씨는 "마지막까지 두 분에게 걱정거리였던 불효자"라며 이렇게 말했다.

"병실 문이 항상 열려 있었는데, 어머니 침대에서는 엘리베이터가 바로 보였어요. 형님이나 누님 그리고 동생 가족들이 오면 엘리베이터 문이 촥 열리면서 보이니까, 그 자리를 그렇게 좋아하시더라고요. 다른 병실로 옮기자고 해도 안 옮기셨어요. 병문안을 마친 가족들이 돌아갈 때도 그 자리에서는 배웅까지 할 수 있으니까. 자식의 뒷모습을 끝까지 지켜보는 부모 마음, 그런 거 잖아요. 머리 크고 나서 어머니랑 가장 오래 있었던 시간이 그 때였던 것 같아요."

영화 <국제시장> 같은 가족의 연대기

김호진씨 부모님이 강원도 인제에서 과자 가게를 하던 그 시절
 김호진씨 부모님이 강원도 인제에서 과자 가게를 하던 그 시절
ⓒ 김호진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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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호진씨 부모님의 생전 모습. 고 김용덕(1928년생, 아버지)님과 최정자(1934년생, 어머니)님
 김호진씨 부모님의 생전 모습. 고 김용덕(1928년생, 아버지)님과 최정자(1934년생, 어머니)님
ⓒ 김호진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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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총각 아들은 늘 바빴다. 김씨는 "일에 몰두하다보니 50살이 됐고, 이제 (결혼은) 끝났구나 생각하게 되더라"고 했다. 2009년 여름 그 어느 날 산 속에서 쓰러지기 전까지 "완전히 일에 미쳐서 정신 없이 돌아다니며 일을 했다"고 했다. 마흔 살에 고향으로 돌아와 생태 복원 운동과 산림농업에 매진했다. 30대는 농민운동에, 20대는 학생운동에 '미쳤다'.

김씨의 삶은 아버지의 젊은 시절을 꼭 빼 닮은 것이었다. 그의 아버지는 해방 후 러시아 쌀 공출에 반대하는 시위를 벌이다가 학교에서 제적당했다고 한다. 아버지의 고향은 함흥, 흥남 철수 작전 때 남한으로 오게 됐고, 그 때 홀어머니 그리고 여동생과 생이별을 했다. 남한에 와서는 미군 통역관으로 일했던 아버지, 김씨는 영화 <국제시장>을 보면서 아버지 또 어머니가 많이 생각났다고 했다.

김씨의 외할머니는 미군 부대 물품을 파는 이른바 '보따리 장사'를 했다고 한다. 어머니 집안의 경험을 밑천 삼아 김씨의 부모는 구멍가게부터 시작했다. 이 가게는 신남제과라는 도매점으로 성장했지만, 소양강 댐이 건설되면서 문을 닫는다. 그 후 광장시장에서 물건을 떼다 팔면서 뜨개질 대리점을 했고, 화장품 대리점을 운영하기도 했다. 나이가 들어서는 다시 화장품 소매업을 했다고 한다. 그렇게 3남 3녀를 다 공부시켰다고 했다.

"평생을 절약하며 사셨어요. 제가 고향으로 돌아오고 나서 부모님 집을 수리했어요. 수세식 화장실을 만들어드렸는데 잘 안 쓰세요. 물 쓰기가 아까운 거예요. 그게 아까워서 공동 화장실을 쓰거나 재래식 화장실을 이용하시고... 제가 부모님 댁에 갈 때만 보일러를 틀어놓으시고... 그렇게 아껴서 어려운 자식한테 주시고, 가난한 자식 챙겨주셨어요."

그래서 더욱 부모님 옷을 쉽게 버릴 수 없었다고 했다. 어머니가 너무나 곱게 간직한 한복들을 보면 "어머니의 연대기를 한꺼번에 보는 것 같아" 좋았고, 많이 남아 있지 않은 아버지의 옷 몇 가지에서는 "낡을 대로 낡을 때까지 옷을 입었던" 아버지를 떠올릴 수 있었다. 제주어 '간세'의 뜻은 느릿느릿. 부모님의 평생은 오직 자식들을 위해 꾸준히 걸어온 '간세 인형'을 닮은 것이었다. 

"돈 같은 것은 칼같이 챙기면서...왜?"

김호진씨는 몇 년 동안 소중히 간직하고 있던 부모님 유품을 (사)제주올레에 기증해 기념품 '간세인형'으로 재탄생시켰다
 김호진씨는 몇 년 동안 소중히 간직하고 있던 부모님 유품을 (사)제주올레에 기증해 기념품 '간세인형'으로 재탄생시켰다
ⓒ 김호진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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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인형을 봤을 때는 정말 기분이 참 싸...하더라고요. 모든 게 다 떠오르고, 부모님이 보고 싶고, 눈물이 글썽하더군요. 그래도 인형으로 만들길 참 잘 했다는 생각이 들어요. 어디 걸어놓을 수도 있고, 가방에 메고 다닐 수도 있고, 친근하게 가까이 둘 수 있으니까. 좋은 의미에서 '직면'이란 생각이 들어요.

머리를 돌린다고 잊히는 건 아니잖아요. 돈 같은 거는 칼 같이 챙기면서 다른 흔적들은, 부모님이 소중하게 간직한 것들은 왜? 없앤다고 없어지는 게 아니잖아요. 거기 배어있는 삶을, 그런 식으로 외면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해요. 죽음을, 한 시대를 살아간 역사를 이어받는 데는 다양한 형식이 있지 않을까요? 부모님의 유산을 다양하게 받았으면 좋겠어요."

- 시간이 약이란 말이 있잖아요. 볼 때마다 생각나는 것, 오히려 힘들 수도 있지 않을까요?
"부모님의 유산을 잘 처리해야 본인 스스로도 행복한 삶을 살 수 있다고 생각해요. 부모님 삶을 소중하게 여겨야 본인의 삶도 소중히 여길 줄 알겠지요. 그래야 자신이 언젠가 이 세상을 떠날 때도 불행하지 않을 수 있다고 믿습니다. 오히려 제 삶의 힘으로 작용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이 효도 아닐까요."

- 이번 가을에 다시 제주올레를 하신다고 들었습니다. 그 때는 간세 인형과 함께 걷겠군요.
"아버님, 어머님과 함께 걷는 기분이 들 것 같아요. 아니면 여행 시켜 드린다는 생각?(웃음) 생각만 해도 즐거워요."

제주 올레 삼총사 이야기

최근 뇌졸중 후유 장애 동료들과 김호진씨는 제주올레에 나섰었다
 최근 뇌졸중 후유 장애 동료들과 김호진씨는 제주올레에 나섰었다
ⓒ 김호진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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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페에서 인터뷰를 하다가 문득 김호진씨는 차창 밖 병원 앞에 서 있는 한 젊은이를 가리켰다. 손끝을 따라가 보니 귀에 이어폰을 꽂고 있는 청년이 눈에 보였다. 김씨는 "17살에 뇌졸중으로 쓰러졌던 친구다. 지금 스물 두 살"이라며 "제주 올레 삼총사"라고 소개했다.

"우리는 삼총사, 뇌졸중 후유장애로 오른쪽이 마비된 같은 병 동료들이다...(중략)...우리는 5년 째 같은 병동과 병원을 다니며 서로 힘이 되는 관계이다. 쓰러진 시기도 2009년 7~9월이다. 고맙게도 (사)제주올레의 도움으로 3명의 봉사자가 걷기 동행을 해 주기로 하였다. 그리고 몇 분의 지인들도 그 자리를 함께 하기로 힘을 실어 주었다. 세 명의 걷기 속도도 각기 다르지만 시작과 끝은 같이 할 수 있을 것이다." (김호진씨 카카오스토리 중)

이들 삼총사는 지난 3월 제주 올레길을 함께 걸었다. 김씨가 올레에 나선 것은 2011년부터. 처음에는 자신의 건강을 위해, "병원에서 나온 후 잔존 능력 일부라도 소중하다는 걸 느껴서" 시작한 올레였다고 한다. 작년까지 올레 26개 전 코스를 걸었고, 올해 다시 완주에 도전할 생각이라고 한다.

김씨는 "재활의 최종 목표는 사회복귀 아니냐"며 "그러려면 가정의 보호에서 벗어나려는 시도를 해야 한다. 그런 점에서 제주 올레는 아주 좋다"고 했다. 이제 그는 의료사회복지사로 그만의 복귀를 꿈꾸고 있다. 숭실대에서 사회복지학을 뒤늦게 전공한 것도 그 때문이라고 했다.

김씨는 "같은 환자가 치료할 때 그 효과가 더욱 좋다고 하더라. 제주올레와 함께 사회복지사 일을 하고 있는 셈"이라고 말하며 웃었다.



○ 편집ㅣ홍현진 기자



태그:#올레, #제주올레, #간세인형, #김호진, #국제시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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