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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개봉된 영화 <소수의견>이 주목받고 있다. 용산참사를 모티브로 한 점 때문인지 관객들은 실제 사건의 진실과 얼마나 일치하는지에도 관심을 갖는 듯하다.

그런데 <소수의견>은 '이 영화는 실화가 아니며 극중 인물은 실존인물이 아닙니다'라는 자막과 함께 시작된다. 이에 대해 김성제 감독은 언론인터뷰에서 "허구라고 알린 뒤 리얼하게 찍으면 영화가 관객의 뇌리에 더 구음(오랫동안 노닐고 머묾)할 수 있을 것 같다고 여겼기 때문"이라고 했다(조이뉴스 24 2015. 6. 30. 기사 참조).

사실, 다큐멘터리가 아닌 이상 영화가 허구임을 모르는 사람은 없다. 어찌보면 영화 속 내용이 진실에 얼마나 근접한지 따지는 일은 영화의 속성을 이해한다면 불필요한 일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한국현대사를 배경으로 한 영화 중 몇 편은 진실과 허구 사이의 간극 때문에 송사에 휘말려야 했다. <판결 대 판결> 이번 이야기는 실화를 배경으로 만들었다가 법정까지 간 영화 <그때 그 사람들>과 <실미도>의 판결을 살펴본다.

[판결 1] 10. 26 사건 소재 <그때 그 사람들>

"이 영화는 실제 있었던 사건을 모티브로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야기의 세부사항과 등장인물의 심리묘사는 모두 픽션입니다."

대통령 암살이라는 민감한 소재를 다룬 탓이었을까. 10.26 사건을 소재로 한 영화 <그때 그 사람들>은 까만 화면에 이런 자막이 깔리면서 시작된다. 영화는 대통령 암살 당일에 벌어진 일을 다룬 정치풍자 블랙 코미디다. 하지만 개봉도 하기 전에 영화 화면이 잘려나가는 코미디같은 일이 벌어졌다.

박정희 전 대통령의 아들 박지만씨가 2005년 1월 고인과 유족의 인격권 침해 등을 이유로 법원에 상영금지가처분신청을 내면서부터다. 법원은 박씨의 신청을 일부 받아들인다.

그리고 친절하게도 영화를 다큐로 받아들일 수도 있는 장면 3곳(총 3분 50초 가량)을 자른 뒤 상영하라는 결정을 내린다. 그 중 첫 번째 장면이 부마항쟁 다큐멘터리다. 영화는 그해 2월 3일 개봉하면서 첫 부분에 예상치 못한 자막을 또다시 덧붙인다.

"이 장면은 2005년 1월 31일 대한민국 서울중앙지방법원 제50민사부의 결정에 따라 삭제되었습니다."

개봉도 하기 전에 잘려나간 장면들은?

영화 <그때 그사람들>의 한 장면
 영화 <그때 그사람들>의 한 장면
ⓒ MK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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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처분은 서막에 불과했다. 영화 개봉 후 보름이 지났을 무렵, 박씨는 영화사를 상대로 상영금지 및 손해배상청구 소송을 정식으로 제기한다. 박씨는 영화가 허위 내용을 사실적으로 표현하여 고인과 유족의 명예, 프라이버시권을 침해하고 유족의 고인에 대한 경애, 추모의 정 등 인격권을 침해하였다고 주장했다. 따라서 위자료 5억 원 지급과 함께 영화 상영과 배포 금지를 청구했다.

박씨가 특히 문제삼은 장면은 극중 '각하'가 여성편력을 드러내거나 일본어를 사용하거나 일본문화에 향수를 갖는 장면, 사망 당시의 상황과 대화 장면이다.

영화사 측은 "영화는 어디까지나 허구이므로 인격권을 침해할 여지가 없고, 설사 침해했더라도 표현의 자유와 공공의 이익을 위해 영화상영이 보장돼야 한다"고 맞섰다.

법원의 판단은 어땠을까. 2006년 1심 법원(서울중앙지법 제63민사부 부장 조경란)은 어느 한쪽의 손을 번쩍 들어주지는 않았다. 결론은 일종의 절충안에 가까웠다. 하지만 판결 이유를 보면 영화의 상상력을 그다지 존중해주지 못했다는 비판을 피하기 어렵다.

우선 일반론부터 살펴보자. 사람의 명예, 신용 등 인격적 가치는 헌법으로부터 나오는 기본권이기 때문에 절대적이고 배타적인 권리를 갖는다. 따라서 인격권 침해를 당한 사람은 침해행위 금지와 함께 손해배상을 청구할 수 있다. 사자(死者)는 유족이 대신 청구할 수 있다.

1심, 인격권 침해인정하면서도 상영가능 판결

법원은 "영화가 고인의 인격적 법익을 침해하였다고 하려면 관객이 실제 사건을 연상할 수 있음이 전제되어야 한다"면서 "영화는 도입부에서 고인의 이름을 직접 언급하면서 실제 사건과 매우 유사하게 구성되어 있으므로 관객의 입장에서 극 중 '각하'가 곧 고인을 특정한 것임을 쉽게 인식할 수 있다"고 지적했다.

내용 면에서는 "여러 장면이 간접적이고 우회적으로 비유하거나, 상징적인 표현을 사용함으로써 고인의 사회적 평가를 저하시키는 등 고인의 인격권을 침해하였다"고 판단하였다. 예를 들어 각하가 여색을 탐하고, 일본 문화에 향수를 갖고 있으며, 측근들과 일본어로 대화하고, 금고에서 돈을 꺼내어 쓰는 장면들은 "영화 전체적인 구성으로 보아 합리적인 관객이라도 각하의 모습을 실제 고인의 모습으로 인식할 가능성을 배제할 수는 없다"고 판시했다.

특히 김 부장이 각하에게 총을 겨누며 일본어로 "다카키 마사오, 누구라도 죽으면 그냥 썩은 내 피우는 쓰레기인 거요"라고 말하는 장면도 문제 삼았다. "고인의 죽음을 부패하여 더러운 쓰레기에 비유하여 대중 앞에 공표함으로써, 역사적 평가를 떠나 한 인간으로서 당연히 보장받아야 할 인격적 법익 즉, 생존시 또는 사후에 자신의 죽음의 가치와 그 경건성에 대해 갖는 기대라는 인격적 법익을 침해하였다"는 것이다.

이쯤 되면 영화상영 자체가 위태로울 지경이었다. 하지만 법원은 일부 장면만을 금지하면 영화가 갖는 창작의 본질이 껍데기만 남을 수도 있다고 우려했다. 그러면서 갑자기 태도를 바꾸어 "고인의 인격권 침해가 영화의 상영을 금지할 정도로 중대, 명백하지는 않다"고 한다.

법원은 ▲ 고인이 현대사에서 차지하는 비중 ▲ 10.26 사건은 역사적 의미를 갖는 공적인 사항이고 ▲ 영화의 특수성으로 합리적인 관객이라면 허구라는 점을 인식하고 있는 점 ▲ 이 영화는 어디까지나 상업영화일 뿐이라는 특수성을 감안하면 상영금지는 과하다는 결론에 이르게 된다.

1심 법원은 영화를 상영하되, 위자료 1억 원을 지급하는 것으로 결론을 내린다. 법원은 위자료는 박씨가 이 영화 때문에 '고인에 대한 추모의 정'이 침해됨으로써 입은 정신적 손해를 위로하기 위한 돈이라고 했다.

양쪽 모두 만족할 수 없는 판결이었다. 영화사로서는 추모의 정과 인격권을 침해했다는 불명예와 함께 금전 배상을 하게 됐고, 박씨로서는 영화상영을 막지 못한 점이 큰 불만이었다.

항소심, 절충안 끝에 우여곡절 끝 상영

항소심인 서울고법은 양측을 조정 테이블에 앉힌다. 그리고 절충안을 이끌어낸다. 박씨는 금전청구는 하지 않는 대신 "상상력에 기초한 이 영화의 내용으로 말미암아 영화 속 등장인물과 연관된 분들과 그 가족들에게 본의 아니게 상처를 준 점에 대해 유감을 표명한다"는 유감 표명을 공개하는 것을 받아들인다. 영화사는 도입부 자막 내용을 다음과 같이 바꾸면서 삭제장면 없이 상영하기로 한다.

"이 영화는 역사의 한 사건을 모티브로 한 상상력에 기초하고 있습니다. 대부분의 세부사항과 등장인물의 심리묘사는 모두 픽션입니다."

이로써 소송은 종결됐다. 이때가 2008년 2월이니 블랙코미디 영화 한 편 때문에 박씨와 영화사는 3년간 송사에 매달린 셈이다. 이 사건을 한 마디로 "웃자고 만든 영화에 죽자고 달려들었다"고 표현하면 과장일까.

[판결 2] '684부대' 훈련병들 다룬 <실미도>

2003년에 개봉한 영화 <실미도>는 최초로 1000만 관객을 돌파하면서 우리 영화사에 손꼽히는 흥행기록을 남겼다. 영화는 북파공작원 문제를 정면으로 다룸으로써 현대사의 잊혀진 비극을 수면 위로 떠오르게 했다.

그런데 <실미도>가 흥행에 성공하자 뜻하지 않은 문제가 불거졌다. 영화에 등장하는 '684부대' 훈련병들의 유가족이 영화 실미도 제작사와 감독을 상대로 소송을 낸 것이다.

유족들이 주장과 요구는 크게 2가지였다. 첫째, 영화에서 684부대 훈련병 전원을 살인범, 사형수 등 사회 낙오자로 묘사하고 있는 부분은 사실과 다르니 삭제해야 한다. 둘째, 영화가 마치 진실인 것처럼 홍보해 유족들의 명예가 훼손됐으니 유족별로 1억 원씩을 지급해야 한다.

2004년 말에 시작된 소송은 2010년 7월 대법원 판결로 끝이 났다. 재판 결과는 1심부터 3심까지 원고 패소. 유족들의 완패로 돌아갔다. 법원의 판단 근거는 대법원 판결에 자세히 나와있다.

684부대 유족들 "훈련병이 낙오자? 사실과 다르다"

 영화 <실미도>의 한 장면
ⓒ 시네마서비스

대법원은 먼저 헌법 22조 1항 '모든 국민은 학문과 예술의 자유를 가진다'에 주목했다. 영화 역시 예술 작품으로서 창작 활동의 자유가 있다. 하지만 법원은 예술의 자유가 무제한의 권리는 아니기 때문에 실재 인물이나 사건을 배경으로 한 영화가 허위 사실을 적시해 사람의 명예를 훼손하는 경우에는 책임을 물을 수 있다고 했다. 하지만 예외가 있었다.

"공공의 이해에 관한 사항으로서 그 목적이 공공의 이익을 위한 것일 때에는 행위자가 적시된 사실을 진실이라고 믿었고 또 그렇게 믿을 만한 상당한 이유가 있으면 행위자에게 불법행위책임을 물을 수 없다."

대법원은 공공의 이익이 있는지를 가리기 위해서는 "적시된 사실의 내용, 진실이라고 믿게 된 근거나 자료의 확실성, 표현 방법, 피해자의 피해 정도 등 여러 사정을 종합해 판단해야 한다"고 판시했다. 여기에, 역사적 사실인 경우 망인이나 그 유족의 명예보다는 역사적 사실에 대한 탐구 또는 표현의 자유를 보호해야 하며 객관적 자료의 한계 때문에 진실을 확인하는 작업이 쉽지 않은 점도 고려해야 한다고 덧붙였다.

대법원은 상업 영화의 특성도 감안했다. 일반 대중이 보는 상업 영화는 역사적 사실을 토대로 하더라도 흥행이나 감동을 위해 다소 각색하는 것은 불가피하고, 일반 관객도 모든 내용이 실제 사실과 일치하지는 않을 것이라는 전제 하에서 관람한다는 말이다.

영화사 쪽에서 영화 실미도가 역사적 진실이라는 취지로 홍보한 부분은 어떻게 판단했을까. 대법원은 "영화 내용의 특정 부분을 적시하지 않은 채 진실이라고 광고·홍보했다고 하더라도 모든 내용이 진실이라는 의미보다는 역사적 사실에 바탕을 두고 극적 허구와의 조화 속에서 확인된 사실관계를 최대한 반영했다는 취지로 이해해야 할 것"이라고 판시했다.

법원 "세부사항 다르다고 명예훼손 인정하면 창작의 자유 위축"

법원도 영화 <실미도>가 부대원들을 전부 사회 낙오자로 묘사하는 등 일부 진실이 아닌 부분이 있음을 인정했다. 그러나 ▲ 영화제작 당시 사실을 더 확인할 방법이 없었고 ▲ 실재 인물의 실명을 거론하거나 극중 배역과 연관 지을만한 묘사가 없었다는 점 ▲ 영화 전체적으로 볼 때 훈련병들을 비방하기보다는 권력에 희생된 사람들로 부각한 점을 지적했다.

끝으로 "30년 이상이 지난 사건을 소재로 한 영화에 대해 세부 내용이 진실과 일치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명예훼손을 인정하게 되면 창작의 자유가 크게 위축될 수 있다"고 우려했다.

결론은 유족들의 패소로 돌아갔다. 유족의 명예 감정도 중요하지만 그것이 예술(표현)의 자유를 위축할 정도로 엄격해서는 안 된다는 판결이었다.

예술 작품이라도 타인의 권리와 명예를 함부로 침해해서는 안 된다. 하지만 영화는 감동을 위해 어느 정도의 과장이나 각색이 허용되고 관객도 이런 점을 감안하면서 영화를 본다. 영화 <실미도>도 마찬가지다. 역사적 사실도 중요하지만 예술 작품에서의 극적 허구도 인정해야 한다. 이것이 대법원 판결의 핵심이다.

실제 사건을 모티브로 한 영화라고 해서 반드시 진실과 일치해야 한다는 법은 없다. 그렇게 되면 영화의 감동은 떨어질 수밖에 없다. 영화를 영화로, 예술을 예술로 받아들이지 못하고 다큐로 받아들이면 세상이 더 우울해진다. 하긴 영화보다 더한 비극이 너무 잦은 세상이니 영화와 현실의 구분이 더 어려워지는 건지도 모르겠다.

○ 편집ㅣ이준호 기자



태그:#실미도, #그때 그 사람들, #박정희, #판결 대 판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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